정호경 신부의 내 자랄 적에 ④ 여덟살에서 열살 때(1947-1949)
할아버지: 1948년 초겨울 밤이었어. 우리집 문이란 문은 모두 열려있고, 등이란 등은 모두 켜져 있으며, 그것도 모자라 동쪽 제방 위에는 강력한 탐조등이 우리집 전체, 특히 기와집 쪽을 비추고 있었고, 그 탐조등 옆에는 큰 기관총을 장치하고 손확성기로 소리소리 지르고 있고, 우리 가족들은 방구석에 머리를 박은 채 비명을 지르고 있었어. 아홉 살인 나는 그 탐조등과 큰 기관총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는데, 어머니가 갑자기 한 손으로 나를 구석 쪽으로 잡어당기며 "코를 박고 있어"라며 꾸중을 하셨지.
그들의 요구는 우리 둘째 외삼촌을 내어놓으라는 거였어. 그 외삼촌은 당시 영주청년단 단장이었고, 사회주의(좌익)운동을 하신 모양이야. 확성기 소리가 날 때마다, 할머니 어머니 여동생들의 비명소리가 들렸어. 얼마동안 그렇게 대치(!)하고 있었을까! 숨 막히는 순간순간이었으니, 한 시간이 십 년 같았겠지! 그런데 드디어 타타타타 타타타타...... 기관총 소리가 쉬지 않았고, 동시에 여자들의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어. 그 총소리 비명소리 속에서 우리 둘째 외삼촌은 아래채 초가집 문을 박차고 나와서, 우리가 있던 본채 기와집으로 뛰어 들어와, 코트인지 오버인지 외투를 들고 다시 그 총알받이 앞마당으로 나와, 그 초가집을 반 바퀴 돌아 골목길로 달아나셨어. 물론 그러는 동안 총소리 비명소리가 그치지 않았고, 외삼촌은 물론, 우리도 모두 죽는 줄 알았지.
나중 확인한 것이지만, 그렇게 쉴 사이 없이 기관총을 난사했는데도 외삼촌이 남긴 핏자국 하나 없었고, 외삼촌은 무사히 우리집을 빠져나가셨어. 이상하지? 또 이해할 수 없었던 점은, 외삼촌이 왜 좀 더 안전한 집 뒤로 달아나시지 않고, 위험하기 짝이 없는 총알받이 앞마당 쪽으로 다시 나와서 빠져나가셨는지? 그리고 그들이 외삼촌이 숨어 있던 아래채 초가집을 소홀히 하고, 왜 본채 기와집에만 신경을 썼는지? 이 의문점들은 아직도 모르겠어.
훗날 소문으로는, 외삼촌이 영주극장 분장실에서 자고 간 흔적이 있다고 하더군. 그날 밤 우리 가족은 지옥을 겪은 셈이지. 너무도 끔찍해서 그날 밤 겪은 얘기를, 약속이나 한 듯이, 가족들끼리도 한 적이 없었어.
슬기 : 60년이 지난 얘긴데도, 그 얘기를 들으면서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어요.
나도 그래! 숨 좀 넉넉히 쉬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자꾸나......
그 외삼촌 생각이 날 때마다, 자식 하나 없던 외롭고 쓸쓸한 모습의 외숙모님이 기억 나.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까, 6ㆍ25 때 서울에 살면서 피난을 안 가고 있다가 인민군들의 밥 짓는 일을 했대. 부역이라는 거지. 서울수복 후 부역죄(!)로 긴 옥살이를 하고 있다고 했어. 부역을 한 것도, 혹시나 남편인 우리 외삼촌을 만나지 않을까 하는 바람 때문이었을 거야. 자식이라도 하나 있었다면, 덜 외로웠을 텐데...
1948년 4월 제주4ㆍ3사태로 수만 명의 양민이 학살되었고, 5월에는 남한 단독선거, 8월 15일에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9월 9일에는 북한 단독정부 수립, 12월에는 일제시대 청산을 위한 반민특위법 공표, 1949년 4월 9일 김구선생 암살, 7월에 반민특위법 무산......
그래, 결국 과거청산도 물 건너갔고, 철천지한인 분단이 굳어진 거지. 남이나 북이나,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잔인하게 제거했지. 부모자식도 스승제자도 없던 험악한 시절이었으니까!
탕 탕 탕 총소리가 들렸고, 나는 부리나케 집 옆 제방 위로 올라가 총소리 진원지를 찾았지. 영주-안동 간 철길 저편, 가을걷이가 끝난 논에서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사람 하나가 죽자고 내빼고 있었고, 그 뒤를 총과 몽둥이를 든 세 사람이 따라가며 총을 쏘고 있었어. 이럴 경우 어른들은 하나같이 몸을 사리고 나타나지 않지만, 우리 아이들은 너나없이 따라붙게 마련이지. 그게 스릴(!) 넘치는 놀이였거든.
아니나 다를까, 처음엔 나 혼자인줄 알았는데, 금방 열 명이 넘게 불어난 아이들이 영주-안동 간 철길 건널목을 넘어섰을 때, 도망치던 흰 와이셔츠 아저씨가 물이 차 있던 철길 굴다리 안으로 들어갔어. 총질을 하며 뒤쫓던 셋 중 하나는 재빨리 굴다리 맞은쪽으로 돌아가 총을 겨누며 지키고 있고, 나머지 둘 중 하나는 총을 들고 다른 하나는 막대기로 수면을 치면서 소리를 지르더군. 굴다리 안이라 소리가 울려 나오니까 더 무서웠어. 굴다리 안에는 깊이가 어른 무릎 정도의 물이 차 있었지.
잠시 후 잡혀 나온 그 하얀 와이셔츠 아저씨는, 구정물 속에 숨었던지, 머리와 수염과 온 몸에 구정물이 흐르고 있었어. 삐죽삐죽 깎지도 못한 까만 수염과 구정물이 흐르는 창백한 얼굴의 아저씨는, 포승줄에 묶이면서 잠시 우리들 얼굴을 멀뚱히 보셨는데, 그때 갑자기 그 아저씨의 얼굴과 우리 둘째 외삼촌 얼굴이 겹쳐지면서 몸이 부르르 떨렸어. 포승줄에 묶여 힘없이 끌려가는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지켜보고 있었지. 그 후에도 가끔 구정물이 흐르던 그 아저씨의 창백한 얼굴이 떠오르더군!
집에 돌아와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어머니는 무척 놀라시면서, 그런 장소엔 절대 가지 말라면서 입조심을 당부하셨지.
그후 어머님의 당부 말씀을 따르셨어요?
웬걸! 전에도 말했듯이, 그런 게 우리 아이들의 놀이였으니까. 하지만 입조심하란 말은 명심하고 지켰던 것 같아. 내 기억으로는, 조금 전 그 아저씨 얘기도 할머니한테 말고는 어느 누구한테도 말한 적이 없어.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조금 전에 처음 입을 연 거야, 대단한 입조심이지?
정말 대단하시네요, 할아버지!
정호경/ 신부, 안동교구 사제이며, 현재 경북 봉화군 비나리에 살며 밭작물과 매실나무를 가꾸고, 책을 읽거나 나무판각과 글을 쓰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