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8]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라는 인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삶 안에 일어나는 변화, 곧 놀이이다. 신앙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언어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깨달은 사람들이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기 위해 하는 실천이라는 말이다. 신앙은 사람의 자유와 관계있는 일이다.

신앙은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사색이나 정보 제공이 아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신앙은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사실들, 예를 들면 창조, 단일원조론(單一元祖論), 동정녀 탄생 등에 대한 사람의 태도 표명이나 맹신(盲信)이 아니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모든 지식은 객관적 학문에 맡겨야 한다.

신앙인이 할 것은 예수라는 인물로 말미암아 발생한 언어가 어떤 것이며, 그것이 우리의 자유에 하는 호소(呼訴)가 어떤 것인지를 보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가 움직여서 그리스도인의 놀이가 발생하게 해야 한다. 우리의 자유가 어떻게 움직이는 놀이인지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자유를 지녔다. 그러나 우리의 자유는 지극히 연약하다. 우리의 자유가 하는 선택은 절대적이 아니다. 재물(財物)의 유무(有無), 권력(權力)의 강약(强弱), 지위(地位)의 고하(高下), 사랑과 미움, 이기심(利己心), 몸의 생리적 여건, 인간의 잠재의식(潛在意識) 등이 우리의 자유를 얼마나 제한하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의 자유는 구원받아야 하는 자유이다. 자유가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이다. 17세기 이후에 인류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다윈 이후 인류는 인간이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고, 20세기 프로이트 이후 인간에게는 잠재의식(潛在意識)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과 인간은 자기 자유의 주인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 ‘산상 설교’(부분), 프라 안젤리코, 1437~1445년

말씀이 지배하는 자유

사람이 사는 사회 혹은 공동체에는 그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가 있다. 일제(日帝) 점령기에 한국인을 지배한 언어는 천황이었다. 해방 후 한국 사회를 지배한 것은 자유, 민주, 평등 등이었다. 1979년 유신(維新) 시기에는 충효(忠孝)라는 언어가 일시 강요되었지만, 사람들은 그것이 독재정권을 정당화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 언어들은 우리 국민에게 대단한 의욕도 주었지만, 또한 많은 불행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법조인들을 지배하는 언어는 법(法)이고, 의료기관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은 환자의 치유이며, 상품 유통 기관을 지배하는 것은 이윤(利潤)이다. 인류 역사 안에 사람들을 한결같이 지배해 온 언어는 재물, 지위, 권력 등이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예수를 말씀이라 일컫는다. 그리스도 신앙은 과거 역사 안에 살았던 예수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말한다. 예수의 삶 안에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 주신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를 하느님의 말씀이라 말하기 시작한 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부터이다.

초기 교회가 예수에 대해 기록으로 남긴 문헌을 우리는 신약성서라 부른다. 그 문서들은 순수 역사적 기록만이 아니다. 초기 교회 신앙인들이 예수에 대해 믿고 실천하였던 바가 그 시대의 표현 방식으로 함께 기록되어 있다.

신앙은 실천이다. “누구든지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7,21)라는 말씀을 비롯해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입니다”(마태 7,24)는 말씀은 실천이 믿음이며, 진리라고 말한다.

신약성서가 그런 기록을 남긴 이유에 대해 요한 복음서는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21,31)라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 안에 일어난 순수 사실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도 기록으로 남겼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 문서를 바탕으로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사람들이 체험하고, 표현하고, 기록하였다고 해서 하느님이 하신 일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한다. 하느님은 역사 안에 인간과 함께 계시며 인간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신다. 사람이 하지 않은 것만 하느님이 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람과 하느님을 대등한 입장에 놓고, 사람의 영역 다르고, 하느님의 영역 다르다는 착각에서 비롯된다. 하느님은 아니 계시는 곳 없이 다 계신다는 말은 사람의 영역에도 하느님은 계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대자연을 통해서도, 또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신다.

신약성서는 그리스도교 신앙사(信仰史) 안에 많은 삶을 발생시켰다. 그 삶의 전승을 우리는 전통이라 부른다. 악보(樂譜) 안에 음악이라는 진리가 들어 있고, 사람이 그 악보를 기준으로 곡을 연주함으로써 음악이라는 진리가 발생한다. 신약성서 안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진리가 문자화되어 수록되어 있으며, 신앙인이 그 문서를 기준으로 삶을 실현할 때, 비로소 신앙의 진리가 발생한다.

진리는 전통 안에 족보적(族譜的) 성격을 지니고 있다. 족보는 혈통이 같다는 사실을 말하지만, 그 혈통 안에 있는 개개인의 모습이 다르듯이, 신앙인의 삶이라는 진리도 시대와 장소에 따라 그 모습이 달리 나타난다는 사실을 말한다. 음악을 연주하는 사람이 그 곡의 연주사를 참고하듯이, 신앙인은 그리스도 신앙 전승 안에 나타나는 삶의 모습들, 혹은 놀이들을 참고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한 분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정의(定義)하지 않는다.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이면, 그것을 알고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 기원전 1250년경으로 추산되는 이집트 탈출 사건 전에 모세에게 하느님이 “나 너와 함께 있다”(탈출 3,12)고 하신 말씀과 더불어 이스라엘 신앙의 체험 전승이 시작하였다.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삶의 공간이 하느님의 나라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어서 가는 곳이라고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것은 현재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혜택이 없기 때문에 미래의 것이라고 단정하는 데서 연유한다. 하느님은 현재에도, 미래에도 하느님이시다. 그분의 현존(現存)을 미래에다 국한시키지 말아야 한다.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