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7

2 그런데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어 묻게 하였다. 3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이 바로 선생님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하겠습니까?” 4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다. “여러분이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리시오. 5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듣고, 그리고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해집니다. 6 내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 (마태 11,2-6)

▲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성 요한 세례자’,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의 작품, 1655년
오늘의 단락이 실제 일어난 일을 바탕으로 하는지 학자들의 의견은 엇갈린다. 마태오 복음서 11장은 세례자 요한과 연결된 세 단락을 포함하고 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가 연결된 부분(2-6절),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의 평가(7-15절),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활동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16-19절)를 다루고 있다.

사람들이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관계에 대해 궁금했던 것 같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 운동에 입문하였으나 곧 탈퇴하여 독자적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초대교회가 신자들에게 분명히 설명할 필요성이 있었다. 마치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청문회에 불러 예수의 정체에 대해 심문하는 풍경 같다. 갈릴래아 지방에서 예수의 활동 전반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도 지니는 단락이다.

세례자 요한의 설교(3,7-), 감옥에 갇힘(4,12), 처형이(14,1-) 이미 마태오 복음서에 소개되었다. 세례자 요한과 달리 예수는 투옥된 적 없었다. (영화 <로메로>(Romero)에서 로메로 대주교가 투옥된 장면이 나오는데 사실 그는 투옥된 적은 없다. 로메로 대주교는 설교 도중 총에 맞았는데 영화에서 성체를 들어 올릴 때 총에 맞은 것으로 잘못 묘사되었다. 보수적 주교로 살다가 친구 신부의 피살 후 회개한 그는 성당 제의실에 간이침대를 가져다 놓고 거기서 몇 년 생활했다. 노숙자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주교관이 대한민국에 혹시 있는지 궁금하다.)

자기 문하생인 예수의 독자적 활동에 대해 세례자 요한이 소식을 들었겠다. 2절에서 ‘그리스도의 일’이란 구절이 특이하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생각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입장에서 세례자 요한 측에 강조하고 싶은 표현이다. 3절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을 공동성서(구약성서) 여러 구절에서 참고할 수 있다(시편 118,26; 이사 59,20; 창세 49,10).

세례자 요한을 예수를 미리 알리는 예언자로 소개(마태 3,11)하는 마태오가 3절 세례자 요한의 질문을 수록한 것은 의아하다. 세례자 요한 자신이 예수를 의심했다기보다 자기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질문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학자들도 있다. 초대교회 때 테르툴리아노는 예수가 메시아임을 세례자 요한이 의심했다고 주장하다가 크게 비판받았다. 루터는 세례자 요한의 질문을 필요 없는 질문으로 여기고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20세기 가톨릭의 존중받는 신학자 칼 라너는 예수를 알기 위해 바울의 편지를 거의 읽을 필요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보고 들은 대로 요한에게 알리시오”(루카 7,22)를 마태오는 4절에서 “듣고 본 대로”라고 순서를 바꾸었다. 루카는 이적을 말씀보다 우선했지만 마태오는 이적보다 말씀을 강조하는 것이다. 뛰어난 신학자들인 복음서 저자들이 아무 생각 없이 단어 순서를 정하진 않는다. 마르코, 루카, 마태오는 예수의 역사를 강조하고, 요한 복음 저자와 바울은 부활한 그리스도를 강조한다. 보수적 신자들은 요한 복음과 로마서를, 개혁적 신자들은 마르코, 마태오, 루카 복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성서 저자들마다 강조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메시아가 오면 병과 고통이 사라지리라는 희망이 유다교에 있었다. 후대에 주로 이사야서 35,5 단락이 자주 인용되었다. 그러나 유다교 문헌에 메시아가 병을 고쳐줄 것이라는 구절은 보이지 않는다. 예수의 치유활동은 유다교 메시아 상에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는 것이다.

5절에 여섯 가지 이적 활동이 차례로 소개된다. 처음 네 활동은-소경과 절름발이, 나병환자와 귀머거리―쌍으로 두 번 소개되고 마지막 두 가지는 “그리고”(kai)라는 단어로 점층법으로 강조되었다. 이사야서에 없는 나병환자와 죽은 자에 대한 이적이 마태오 복음서에 첨가되고 이방 민족에 대한 심판 구절이 삭제되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일이 죽은 자의 부활보다 더 강조되는 점이 놀랍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부활 신앙보다도 더 소중하다는 뜻이겠다. 부활 신앙도 가난한 사람에 대한 사랑과 깊이 연결된다. 부활을 가난한 사람과 연결하여 설명하지 않는 설교자들은 크게 뉘우칠 일이다. 예수가 인류에게 선물한 가장 위대한 사상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의 제자라고 생각할 수 없다.

예수의 제1 청중은 가난한 사람들이다. 복된 선언 맨 처음 구절이 가난한 사람에게 선포되었다(마태 5,3). 세례자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에서도 그 마지막 절정은 역시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려되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접촉이 예수처럼 잦은 그룹은 당시 유다교 여러 그룹 중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예수의 이적과 말씀도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것이다. 오늘 지구상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가장 접촉이 많은 조직이 그리스도교인가. 사람들은 요즘 그리스도교에 대해 무엇을 ‘듣고 보고’ 있을까. 종교인들이 하루 일과 중 가장 접촉을 많이 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들인가. 종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과 자주 밥 먹고 있는가.

심판을 강조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예수는 자비로운 메시아의 모습을 전한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차별화가 돋보이는 오늘의 단락이다. 더구나 마태오는 오늘 단락에서 두 번의 세심한 단어 배치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선물하였다. 첫째, 예수의 이적 활동보다 말씀이 우선이다. 둘째, 부활 신앙보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더 소중하다.

사족―성서를 제법 알고 있다는 자부심이 사실 성서 공부에 가장 큰 장애물이다. 나 자신도 매일 그것을 실감하며 반성한다. 겸손한 사람이라야 성서를 공부하지만 성서를 공부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겸손해진다. 겸손이 부족하다고 스스로 느끼는 사람은 성서를 진지하게 공부해 보시라. 그러나 근본주의적 태도로 성서를 대하면 오히려 교만해질 수도 있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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