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6

“40 여러분을 맞이하는 사람은 나를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를 맞이하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이하는 사람입니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이하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입니다.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이하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입니다. 42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이 작은 사람 중 하나에게 그가 내 제자라 하여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사람은 반드시 그 상을 받을 것입니다.” 11,1 예수께서 열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 근방 여러 마을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그곳을 떠나셨다. (마태 10,40-11,1)

▲ <최후의 심판> 세부, 바이덴의 작품(1450년)
40절은 마르코 복음서 9,37, 루카 복음서 10,16, 요한 복음서 13,20에 병행 구절이 있다. 40절은 예수의 말씀일 수 있다. 41절은 부활 이후 교회 상황을 전제하므로 예수가 진짜 하신 말씀으로 볼 수 없다. 42절이 예수의 말씀인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40절은 스승을 높이 여기는 유다교 전통을 배경으로 한다. 지금도 유다인들은 학자의 딸을 최고 신부감으로 선호한다.

40절 “여러분”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초대교회부터 논란이 되어 왔다. 이냐시오는 ‘주교’(에페 6,1), 마태오 복음과 비슷한 시기에 쓰인 문헌 디다케는 ‘사도’(디다케 11,4), ‘교회’(아우구스티누스), 후대에는 ‘교황’(콘스탄티노플 공의회, 869년), 개신교는 ‘설교직’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마태오는 예수의 제자들, 즉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를 가리킨다.

41절 “예언자”는 초대교회의 방랑예언자를 가리킨다. “옳은 사람”이 누구를 가리키는지 뚜렷하지 않다. 마태오 공동체의 어떤 그룹을 지칭하는가. 초대교회에 3개 또는 4개 그룹이 있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1코린 12,28 참고). 노아, 아브라함, 아벨, 요셉이 옳은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마태오에게 완전함의 길을 걷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옳은 사람이다(마태 5,20.48). 그들의 옳음은 최후 심판에서 드러날 것이다(마태 13,43.49; 25,37.46).

42절에서 마태오는 놀랍게도 “작은 사람”(mikros)을 예언자와 옳은 사람 반열에 올려놓는다. 유다교에서 어린이, 사회적 약자, 성숙하지 못한 사람, 거룩하지 못한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다. 초대교회에서는 교회 안에 두드러지지 않은 평범한 신자를 가리킨다(마르 9,42).

마태오는 돋보이는 신자들인 예언자, 옳은 사람과 대조되게 평범한 신자를 부각시키는 것이다(마태 18,1-14; 23,8-12). 오늘 그리스도교에서 성직자와 신자의 차별, 신자 사이의 차별 풍경은 마태오에게 어이없는 모습이겠다. 교회 안의 남녀차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인간 평등의 아름다운 모습보다는 교회 안팎에서 사람 차별의 역사를 그리스도교가 지금껏 이어온 사실은 인류와 역사 앞에 참으로 부끄럽다. 오늘의 단락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평등을 강조하는 구절이지만 교회사에서 그렇게 주목받아 오지 못했다.

마태오가 미크로스(mikros)를 평범한 그리스도인으로 해석한다 할지라도 미크로스의 당시 본뜻을 외면하기 힘들다. 미크로스는 당시 구걸하며 떠돌던 가난한 어린이를 우선 가리킨다. 중미 엘살바도르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하던 시절, 내게 돈을 구걸하는 어린이를 수없이 만났다. 그 어린이들의 눈망울은 분명 예수의 눈망울이리라. 돈이 없어 그냥 지나치던 경우가 내게 흔했다. 그 어린이들을 이용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세상 대부분의 죄는 성인 남자들이 범한다. 고학력 상류층 남자들의 죄는 더 크고 교묘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는다.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마태 9,36-11,1)이 마무리되는 단락이다. 마태오 교회론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역사의 예수에 집중하는 교회론을 강조한다. 부활한 예수에서 교회를 바라보는 ‘그리스도의 몸’ 교회론과 사뭇 다르다. ‘그리스도의 몸’은 플라톤적 사상과 연결되어 지상의 교회와 하늘의 교회를 구분하며, 부활한 예수가 교회에 현존함을 강조한다. 둘째, 교회는 희생해야 한다. 예수는 십자가 죽음으로 교회에 모범을 보여주신다. 셋째, 교회는 자비로워야 한다(마태 9,36). 넷째, 교회는 예수의 삶과 고통을 따르면서 세상에 대한 예수의 사명을 이어간다.

마태오 교회론의 핵심 단어는 ‘제자들을 가르침’에서 처음(9,37; 10,1), 중심부(10,24-), 마지막 부분(10,42; 11,1)에 나오는 마테테스(mathetes)다. 교회를 영적 · 구조적인 관계가 아니라 민주적이고 형제자매적인 관계로 보는 관점이다. 마태오의 제자 개념에는 교회 내 그룹 사이의 어떤 위계질서(Hierarchie, Ordo)도 포함되지 않았다. 모든 제자들에게 동등한 사명과 권한을 마태오는 생각하였다. 마태오의 교회론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주로 교황권 문제로 집중된 면이 많다. 그러나 개신교와 가톨릭의 현재 교회제도를 마태오의 교회론 관점에서 진지하게 돌아보고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아우크스부르크 협약에 기초하여 개신교 교회론은 말씀과 성례전(聖禮典)이 펼쳐지는 성도의 모임으로 ‘보이는 교회’를 이해한다. 가톨릭은 여기에 교회제도를 하나 덧붙여 말씀, 전례, 교회제도가 있는 곳을 교회로 이해한다.

개신교 교회론의 약점은 그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펼쳐지는지 모호한 점, 즉 교회의 주장과 교회의 현실이 모순될 수 있다는데 있다. 가톨릭 교회론의 약점은 가톨릭교회 구조를 ‘교회’와 동일시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개신교에는 ‘모순’이라는 위험이, 가톨릭에는 ‘동일시’라는 교만이 언제나 있다.

개신교와 가톨릭의 공통된 약점은 무엇일까. 성직자 또는 목회자의 인간적 · 도덕적 품질이 교회론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목회자가 아무리 부패해도 말씀과 성례전만 펼쳐지면 교회는 존재한다니 말이다. 성사의 유효성은 집행자의 도덕적 품성에 관계없이 집행 행위에 따른다(ex opere operato, 사효론)는 가톨릭 교리는 마치 성직자들의 면책특권으로 잘못 이해될 수 있다. 개신교, 가톨릭 모두 성직자 부패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구조로서 교회는 이미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지만, 신학적으로 교회는 아직 교회가 되기 위한 길을 걷는 있는 중이다. 마태오의 교회론은 ‘가난한 교회, 희생하는 교회, 불의에 저항하는 교회’를 가르치고 있다. ‘예수 말씀 선포, 전례, 교회제도’가 있다 할지라도, 교회가 가난하지 않으면, 희생하지 않으면, 불의에 저항하지 않으면 아직 교회가 아니다.

‘전례에 갇히지 말고 세상으로 가 보라, 사제는 출세에 신경 쓰지 말고 가난한 사람에게 가라’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말에서 마태오의 음성을 오늘 듣는 것 같다. 첫째, 종교인은 전례와 출세에 갇히지 말라. 둘째, 세상과 가난한 사람에게 가라.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듣겠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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