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열의 떼제 일기 - 1]

프랑스 동부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 떼제에는 오늘도 젊음의 물결이 넘실댄다. 예외가 있지만 흔히 젊은 사람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유럽 교회의 현실에서 떼제는 특별한 것이 사실이다. 무엇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드는가?

우선 이곳의 자연 풍광을 빼놓을 수 없겠다. 낮고 완만히 굽이치는 구릉들, 그 사이로 길게 펼쳐진 들판, 드문드문 소와 말, 양과 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는 모습이 평화롭다. 언덕 위에 있는 떼제에서는 사계절 아침저녁으로 해돋이와 해넘이를 맘껏 볼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가까이 살펴보면 그리 특별한 것은 없다. 9백년이 넘은 작은 마을 성당과 그 주위의 오래된 돌집들은, 이 지역 여느 마을에서도 볼 수 있는 것들이다. 다른 것은 방문자들이 지내는 마을 위쪽 공간. 여기에는 숙소(도미토리)가 길게 이어진 단층 건물 몇 동과 수백 명이 모일 수 있는 대형 천막이 몇 군데 세워져 있다. 그리고 방학 때면 크고 작은 텐트가 수백 개가 마을을 이루는 캠프장이 눈에 띈다.

사진 제공 / 떼제 공동체 www.taize.fr

이곳의 숙소나 화장실, 샤워장 등의 시설 역시 유럽 기준으로는 그리 좋다고 하기 어렵다. 식탁도 따로 없어 벤치나 땅바닥에 앉아 무릎 위에 식판을 얹고 식사한다. 맛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양도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도 이곳에서 만나는 젊은이들은 표정이 밝고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날씨가 흐린 날에도 침울한 분위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떼제 한가운데 콘크리트로 지은 ‘화해의 교회’가 있다. 하루 세 차례 종소리가 울리면 모두가 이곳에 모인다. 흰 전례복을 입은 수사들이 가운데 자리에 길게 앉고 그 주위에 손님들이 자리한다. 의자 없이 그냥 카펫 바닥이다.

떼제의 생활은 공동기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짧고 단순한 노래를 오래도록 반복해서 부른다. 기타 반주와 독창 소리가 곁들여진 4부 합창의 화성이 아름답다. 길지 않은 성경 구절을 여러 나라말로 읽고 긴 침묵의 시간이 이어진다. 수천 명이 교회를 가득 메우는 여름에도 이 순간은 새소리와 벌레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이 공동기도에 참석하면 왜 사람들이 떼제에 오는지 조금 알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이들은 목마르고 배고프다.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물으며 삶의 의미를 찾는다. 일상에서 얻지 못하고 학교나 사회, 때로는 교회가 채워주지 못하는 그 무엇에 굶주려 있다. 비록 직접 표현하지는 않아도 또 자신이 의식하지 못할지라도, 사실 그들은 하느님을 찾고 있다. 이곳에 와서 기도하는 많은 젊은이들은 하느님에 대해 아직 잘 모른다고 말한다. 삶과 신앙에 대해 해답보다는 질문이 더 많은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이들은 오늘날의 보통 젊은이들이다.

떼제에서는 언어와 문화, 풍습과 경제 형편이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지낸다. 그리스도인들이 대부분이지만 교회나 전통이 같지 않다. 포르투갈의 가톨릭 신자가 러시아에서 온 정교회 신자, 스웨덴의 루터교 신자와 한 그룹에서 만난다. 이곳에 와서 정교회나 동방가톨릭의 전례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매일 기도하고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례는 받았지만 성경이나 신앙 지식이 별로 없는 청년들도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가나안 신자’(교회에 나가지 않는 신자)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이 다양함이 장애가 되지 않고 서로를 더 풍부하게 해 준다. 여기서는 누구나 자기 얘기를 할 수 있고 열린 자세로 들어주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 떼제 공동체 www.taize.fr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평생을 바친 형제들의 공동체가 없다면 떼제의 젊은이 모임은 불가능할 것이다. 수사들은 많은 청년들을 동반하지만 스스로 영적 지도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청년사목 전문가’도 아니다. 우리는 음악 전공자들도 아니다. 만일 노래 잘하는 사람들을 불러 기도를 맡기고 성경학자들이 강의를 하고 심리학자나 상담 전문가들이 떼제의 모임을 이끌도록 한다면? 떼제의 분위기는 지금과 전혀 다를 것이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 기도와 침묵, 공동생활 가운데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이다. 거기서 발견한 기쁨과 친교의 아름다움을 다른 이들과 나누려 한다.

우리 떼제의 형제들은 이곳에 오는 젊은이에게 신앙을 주입하거나 일방적으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그들 스스로 모색하고 성찰하고 해답을 찾도록 얘기를 들어주고 질문을 던지고 함께 기도할 뿐이다. 사랑과 믿음을 어떻게 강요할 수 있겠는가? 사랑이신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자유로운 응답을 기다리신다. 우리는 젊은이들이 이곳에서 단순 소박한 생활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기도와 묵상, 그리고 나눔을 통해 마음의 평화를 발견하고 하느님과의 그윽한 친교를 심화하기를 바란다. 고통 받는 이들과의 연대도, 정의와 평화를 위한 노력도 거기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떼제에는 20대부터 90대까지 모든 연령층의 수사 70여 명이 산다. 여기서 주간 단위로 열리는 젊은이 모임에는, 여름의 경우 매주 수천 명이 참가하지만 고용된 직원이 한 사람도 없다. 그 대신 몇 주에서부터 몇 달, 혹은 1년에 이르기까지 오래 머물면서 손님맞이와 프로그램 진행을 돕는 청년들이 여럿 있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누구나 식사 준비, 배식, 설거지, 청소 등 일을 돕는다. 많은 것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젊은이들을 믿고 그들에게 많은 책임을 맡긴다. 사실 젊은이들을 모으는 방법이나 비결은 없다. 우리는 그들을 신뢰하고 동반할 뿐이다. ‘신뢰’야말로 떼제의 핵심어다.


 
신한열 수사
떼제 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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