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대의를 그르칠 경우가 있다. 공자는 사소한 이익에 집착하여 대의를 그르치는 이를 소인배라고 보았고, 이익보다 대의를 존중하는 이를 군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간혹 사소한 이익이나 대의를 구별해 낼 객관적인 기준이 애매해 질 경우가 있다. 시장판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경우 조그만 이익을 소홀히 하다가는 자신의 가업이 기울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정치적인 긴장관계 속에서 강한 자 편에 서지 않을 경우 간혹 냉혹한 차별을 받는 수모를 겪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익과 대의를 나누는 논리에 앞서 무엇보다도 사익을 택할 수도 있고 대의를 택할 수 있는 자유로운 삶의 조건이 우선해야 한다.

나는 우리 사회가 이런 자유를 박탈당한 사회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 누구든지 자신의 양심과 지성적 판단에 따라 사안을 결정해도 될 자유가 도무지 없기 때문이다. 즉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은 이미 누군가에 의하여 구획되어져 있는 셈이다. 거대한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양심의 법을 지킨다는 것은 이 편견을 조장하고, 이 편견에 의하여 이익을 도모하는 집단의 미움과 감시를 받는 처지로 전락하기 십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판단에 신뢰를 가지기보다 누군가의 판단에 스스로를 맡기는 도덕적 자아의 상실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칸트는 자유를 가진 인간은 양심의 법에 따라 보편적 격률을 실천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만일 이미 사회적 압력이 무거운 짐처럼 내려 누르고 있는 정황, 곧 일정부분 자유가 박탈당한 정황에서 답을 내려야 하는 강요된 상황은 보편적인 격률보다 집단의 요구와 이해관계에 천작하는 판단을 내리게 된다. 개인의 존엄과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 세계 속에서 집단의 요구를 거부하는 것은 결국 소외와 차별과 배제를 당할 것이라는 예측을 불러온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집단의 폭력이 암시하는 가치판단의 구조가 작동한다. 마치 깡패들이 눈짓만 해도 입을 다물고 머리를 조아리는 양상과 유사하다.

한 지식인으로서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기독교인은 누구보다도 양심의 자유를 이해하고 있는 존재다. 그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경험하고 의로운 삶을 살겠다는 의지를 신앙 안에서 이미 굳게 세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의미가 이와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의로운 삶보다는 안전과 행복과 축복을 추구하는 삶의 연장선상에서 영적인 안전망을 확보한 존재라는 자기이해를 가지는 경우가 십중팔구인 까닭이다. 조용기 목사의 삼중축복론은 아예 대의와 사욕을 구별할 능력이 없는 불량 기독교인을 양산하는 체계로 작동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축복은 대의와는 상관없이 오직 나의 교회에 대한 헌신의 질에 정비례한다고 믿게 되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불량 기독교인들은 대의와 의로움의 지평에 대한 자각과 인식에 있어서 매우 후진적이다. 이들은 끊임없이 성직자들에 의하여 교도받기를 즐겨하며 길들여진 존재가 된다. 성직자들과의 거리는 안전의 척도처럼 이해되고, 성직자의 요구라면 거절할 수 없는 요구로 해석된다. 이를 거절하는 것은 결국 삶의 안전와 축복망을 상실할 위기를 초래하는 까닭이다. 영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한 성직자를 만날 경우 불량 기독교인이 직면할 위기는 적다. 하지만 저질의 성직자를 만나는 경우 어떤 기독교인들은 깊은 불만과 더불어 공포와 두려움을 가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자유를 행사할 주체적 의식이 심각하게 약화되어 의존성을 버릴 수가 없다. 이럴 경우 그들은 선과 악, 대의와 사익을 구별하지 못한다. 다만 성직자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들의 지시에 따라 깃발을 들고 움직일 뿐이다.

불량 성직자에 의하여 길러진 불량 신자의 경우 신앙인으로서의 자유와 희열, 깊은 자각과 은총에 대한 감격, 그리고 사죄의 복음이 주는 평화를 일면 가지지만 그 신학적 해석 지평은 매우 편협하다. 나와 내 가족과 내 교회가 그들 신앙의 축이 된 까닭이다. 이런 점에서 트뢸치가 이해했던 기독교 사상의 핵심인 급진적 개인주의도 없고, 에큐메니칼한 보편성도 결여되어 있다. 급진적 개인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과 자기 집단의 위기를 인식하고 이의 갱신과 변혁의 힘을 불러오는 힘이 된다. 그러나 축복을 통한 삶의 안정망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변혁과 개혁이란 종교적 회심일 수는 있어도 옳고 그름에 대한 삶의 판단구조의 변혁이 되기는 매우 어렵다.

이미 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위기로 몰아가는 순화의 종교적 경험을 축복과 획득의 구조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버림과 자기 부인의 이름을 가졌으나 그들의 시선은 이미 약속된 축복에 가 있다. 그리하여 자기 버림의 좁은 길이 아니라 축복의 증거를 가진 신앙의 승리자가 되기를 갈망한다. 불량 기독교인은 이렇게 그 본래의 이기적 동기를 포기하지 못한다. 오히려 신앙의 이름으로 그 이기성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강화하려는 것이다. 어느 교회 버스에 쓰여진 광고 문구를 보고 나는 참으로 놀란 적이 있다: “우리 교회에 나오시면 부자 되십니다.” 갈 데까지 다 간 불량 기독교다.

오늘 미국에 계신 홍상설 목사님으로부터 성탄메시지를 받았다. 그 메시지 안에는 목사님의 우려가 담겨 있었다: "Lewis Mumford 의 경고가 떠오릅니다. '한 때는 인류의 한 부분으로 하여금 어둠 속에서도 바르게 걸어가기를 가르쳐 주던 교회가 오늘 또 하나의 암흑시대를 이기고 전진할 만한 능력을 불러일으키기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 지난 날 기독교의 성장과 발전은 교회나 신자가 우리 사회의 모범이 될 수 있다는 사회적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과연 기독교가 사회적 신뢰를 받고 있는 종교인지 심각하게 의심하게 되었다. 대의를 잃고 이기성에 빠진 개인으로서의 불량 교인, 불량 집단이 되어가는 교회 현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기성에 빠진 집단은 이기성을 내려 놓으라는 권고를 거절한다. 따라서 사소한 이익을 넘어선 희생과 봉사의 대의를 무시한다. 적선을 하고 동정을 하면서도 그는 심리적 혹은 사회적 대가를 기대한다. 교회 주보들이 나열하고 있는 위선도 대단하다. 학문적 성취를 통하여 얻은 학위가 아님에도 박사임을 광고하고, 박사가운을 입고 강단에 서기를 즐겨한다. 이런 가치들이 보편적으로 통용되고 있다는 것은 결국 이미 하느님의 교회가 사소한 이익관계를 일상적인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익관계를 비판하고, 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그 집단에 의하여 따돌림을 자초하는 것과 다름없게 되었다.

나는 근래 들어 홀로코스트 이후 유대인 집단 속에서 유대인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 교회, 그리고 대학, 그 어느 곳에서든지 개인이 사회적 지위와 권리를 누리려면 그 소속 집단의 가치와 충돌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 소속 집단의 질서를 존중해야 하고, 소속집단의 전통을 인정해야 하며, 소속 집단의 결정에 이의를 달거나 토를 달아서는 안 된다. 만일 이런 원칙을 지키지 않을 경우 집단으로부터 눈흘김을 당하며 무언의 비판과 배제와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더구나 힘없는 개인이 왕따를 당하고 있는 특정인의 편에 선다는 것은 스스로 왕따를 초래하는 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집단이 정직하고, 대의를 지키며, 스스로를 부단히 갱신함으로써 도덕적 우월성과 정당성을 재고할 경우 이 집단은 양심적인 진실의 소리를 수용하고, 이를 통하여 더욱 진실한 가치를 형성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집단이 그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보편적인 가치를 외면하고, 불의를 행하며 불투명한 결정을 해 나갈 때 그 집단으로부터 생존의 조건을 부여받고 있는 그 집단의 구성원은 자기 판단을 포기하고 집단의 불의한 의식에 동조 참여하거나 심한 경우 앞장서서 불의를 조장하기도 한다. 이런 연유에서 무수한 양심적인 지식인들은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자를 희생시키는 제의를 묵인하거나 소극적인 참여자가 된다.

그러나 양심이 지지하는 보편성을 상실하는 것을 방임할 경우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매우 무거운 형벌로 되돌아오게 된다. 자각과 인식구조의 붕괴가 일어나 그 스스로도 도덕적 판단의 기준을 낮추어 잡게 되는 까닭이다. 그릇된 관행을 반복하는 이들은 한결같이 도덕적 자아의 붕괴를 드러내고 있다. 양심과 진실, 투명성과 정의가 없는 삶에 찾아오는 것은 결국 불의와 억압과 배제와 차별의 논리가 되고, 이런 삶에 젖어든 이들은 이내 불의한 판단의 주체자가 되어 그 불량집단을 불량한 방법으로 존속시키는 것이다. 도덕적 보편성이 결여된 집단 안에서 힘을 가진다는 것은 더 큰 이익관계를 얻기 위해 집단의 힘을 강화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 최고의 엘리트들을 양산해 내는 대학과 그 대학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었던 대기업들의 몰락은 바로 이렇게 보편성을 상실한 집단의 유희에 너무 깊이 빠져들었던 까닭이다. 대우와 신동아의 몰락에 이어 삼성의 비자금 사건들은 이런 사실이 우리 사회에 버젓이 통용되고 있다는 증거다. 그들은 우리 사회 권력기관에 뇌물을 정기적으로 보내주며 그들의 불투명성과 불의를 묵인받아 왔다. 그들로부터 뇌물을 받아온 검찰은 사건이 보도된 지 한 달이 지나도 아무런 수사 결과를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렇듯이 우리나라는 참 이상한 나라다. 물론 그 중에는 정직과 투명함을 기하며 살아가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직과 투명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예찬하는 사회인 것이 이상하다. 결국 정직과 투명함을 지키는 이들이 소수자로서 예외로 취급을 받는 불량 사회가 된 것이다.

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를 바라보면서 한 후보에 대하여 너무나 많은 의혹과 문제가 제기되어도 이에 개의치 않겠다는 우리 사회의 의식에 놀라고 있다. 두 차례에 걸친 개혁 정권에 대한 비난을 일삼는 깡패신문 조중동에 시달려 온 국민들은 자신도 모르게 개혁정권 기피증에 감염된 증상을 보이고 있다. 조석으로 애써서 정부를 비방해온 신문들이야말로 그들의 전력을 살펴보면 결단코 우리사회의 목탁이 될 만한 양심과 지성과 도덕성을 확보하지 못했으며, 오히려 권력에 기생해 온 천박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일제에 아부했으며, 독재를 옹휘했고, 상업주의에 길들여져 있다. 이런 신문들이 중앙지가 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신문들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대중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의와 진실, 그리고 투명한 사회 공동체를 위한 노력에 대하여 이들은 조소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위주의이며, 권위주의 정권의 시녀가 됨으로써 누리는 특권의 향유와 더불어 그들의 본질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민주적, 평등적, 탈권위적인 정책을 좌파라 몰아 세웠고. 적색 알러지가 있는 국민들은 좌파라는 말만 들어도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소리높여 매도하기 십상이었다. 이들은 그간 전 국민을 세뇌시키더니 선거철이 되자 반민주적, 특권적, 권위적 지배세력을 양성하는 데 혈안이 되었다. 상대의 조그만 흠은 잡아 늘이고, 그들이 선호하는 이의 결점은 철저히 덮어 주는 기가 막힌 행보를 거듭하고 있다. 나는 공정한 잣대를 버리고 굽은 펜을 든 이들이야 말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망치는 반민족적 집단이라고 생각한다.

오늘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지는 우리사회가 과거로의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고 보도했다.(FT.COM) 권위주의적 권력을 옹위함으로써 그 권위의 국물을 나누는 집단의 이기성이 전 세계적인 보편적 정신의 기틀을 무시하고 있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드러나고 있는 과거로의 회귀가 결국 가진 자. 특권을 누리는 자, 그리고 권력 근친성을 가진 자들의 꿈이라고 생각한다. 어리석은 민중은 그들의 선전과 책략에 춤추고 있을 뿐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민중의 어리석음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조작과 선동에 의한 착취와 억압을 벗어날 길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는 거대한 권력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과거로의 회기를 재촉하는 집단이기를 자처하고 있다. 이런 기독교 안에서 어떻게 미래를 위한 새로운 예언의 메시지가 나올 수 있겠는가? 권력과 재산을 가진 자들 편에 서는 정권이 가져오는 부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겠는가? 나는 극명한 집단간의 갈등을 드러내고 있는 사례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관계에서 본다. 이스라엘은 자기 집단의 안전과 평화를 위하여 팔레스타인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중기준의 윤리를 담은 정책을 앞세워 팔레스타인의 희망을 빼앗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우리 사회에서 팔레스타인인과 같은 운명에 빠질 수밖에 없는 민중들이 오히려 강압적인 이스라엘을 편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민중의 자기혐오와 배반이다. 그 대가는 거대한 벽이 세워지는 것이고, 어느 한편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고통은 적지 않을 것이다.

유태인 해방신학자인 마크 엘리스는 이스라엘 사람으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이스라엘 정부를 거역하는 강연을 하고 글을 쓴다. 즉 그는 유태인으로서 유태인들의 집단의식을 해체하고, 그들의 특권을 거부하며, 유태주의의 반보편성을 비판해 왔다. 정의와 평화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부정하는 한, 유태주의는 고립될 수밖에 없으며, 나치가 벌렸던 시대착오적인 오류를 반복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까닭이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서 일본과 싱가포르가 보여주고 있는 바와 같이 보편적인 민주적 의식 없이 경제적 특수를 누리려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증오하는 자기증오의 덧을 놓아야 한다. 권위적 권력에 의하여 통제를 받고, 도덕적 이상은 버려야 하며, 이기적인 동물들이 되어 단지 좀 더 나은 우리 안에 가두어지는 것을 행복이라 여겨야 한다.

나는 지난 10월 엘리스 교수의 해방신학 모임에서 비록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양심적 지성인의 길을 걷고 있을지라도 그의 신념의 타당성에 동조하는 많은 유대인들을 만나 볼 수 있었다. 그 중에는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집을 파괴하는 이스라엘 정부에 저항하며 스스로의 몸을 팔레스타인인들의 집에 묶어 놓고 팔레스타인인들과 연대하여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지키려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며 참된 인간의 얼굴이란 강한 힘과 소유의 크고 적음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이익, 우리의 이익보다 더 큰 보편적인 진리를 위하여 나를 포기하고 우리도 포기함으로써 더 큰 평화의 연대를 이루어 나가는 데에서 드러난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집단의 오류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경험한 적이 있다. 집단의 이익에 집착하는 이들은 자기 집단을 의롭게 여기고, 그 집단을 비판하는 개인을 사적 이익에 집착하는 자라고 몰아 세운다. 사적 이익에 집착한다면 그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왜 집단에게 저항하겠는가? 삼성의 비리를 제보한 김용철 변호사를 비난하는 이들이 많은 사회 - 나는 이것이 우리의 자기혐오, 혹은 자기증오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옳은 것을 주장하는 이를 싫어하는 행위는 곧 자기 안의 옳지 못함을 인식하고 있는 자기를 혐오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다. 집단의 몰매를 맞아 본 사람은 권력과 이익에 앞서 옳고 그름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예수도 바로 그렇게 집단의 몰매를 맞았던 이가 아닐까.

예수를 죽인 유태인들처럼, 우리는 양심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하여, 그리고 더 가지기 위하여 과거의 권위주의 정권으로 우리 사회의 방향을 되돌리는 어리석은 국민이 되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 명박 씨 같은 기독교인, 무수한 의혹을 안고 사는 그에게서 정치적 메시아를 보려하는 목사들을 보아도 참 슬프다. 불량 기독교인, 불량 성직자들이 다량으로 생산된 한국 교회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성서의 구절을 기억한다. 가라지와 알곡을 함께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 가라지와 알곡이 언젠가는 나누어지고 구별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에서 위로를 얻지만, 그 때까지 견디고 참아야 할 일이 벌써부터 염려된다.

/박충구 교수( 평화와인권센타 소장) 200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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