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5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습니다. 35 아들은 아버지와 맞서고 딸은 어머니와 맞서고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서게 하려고 나는 왔습니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자기 원수입니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38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도 내 사람이 될 자격이 없습니다. 39 자기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잃을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을 것입니다.” (마태 10,34-39)

▲ <최후의 심판> 세부, 바이덴의 작품(1450년)
예수의 사명(34-36)과 예수를 따름(37-39)이라는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나는 왔습니다”라는 표현은 예수의 활동 전체를 특별한 관점에서 보려는 의도다. “생각하지 마십시오”는 예수의 활동에 대한 일부의 생각을 고치려는 의도다. 복된 선언에서 평화를 이루는 사람 축복(마태 5,9), 원수 사랑(마태 5,44)에 이어 평화와 칼이라는 대조가 등장하는 이야기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칼을 쥐어 주진 않았다. 칼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들었다.

34절 “칼” 부분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제자들은 평화의 인사를 전하라(마태 10,13),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마태 5,9)는 말씀과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 예수의 말씀보다는 젤로데파나 에세느파의 발언이라야 더 적격이다.

요한 묵시록에 입에 칼을 문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긴 한다(묵시 1,16; 2,12.16; 19,15.21). 당시 유다교에 널리 퍼졌던 평화의 메시아(이사 9,5-; 11,5-10; 말라 3,23-)에 대조되는 모습을 34절에서 마태오는 소개한다. “칼”은 요한 묵시록 6,4와 다르게 전쟁을 가리키진 않는다.

예수를 따름에 있어 가족과 집안의 분열이라는 소재를 마태오는 공동성서(구약성서) 미카서 7,6에서 가져왔다. 몰락한 세상을 묘사한 미카서의 탄생 배경을 의식해야 한다. “이웃을 믿지 말라. 벗이라고 기대지 말라. 네 품에 안겨 잠드는 아내라고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미카 7,5). 가정(oikos)은 고대 아시아에서 삶의 기초 단위다. 드물게 쓰이는 단어 오이키아코스(oikiakos)는 4복음서에서 마태오 복음서에만 보이는데(마태 10,25), 집안의 종(oiketes)이 아니라 집안 식구를 가리킨다.

34-36절을 두고 다양한 해석들이 나타났다. 전쟁과 평화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을 다룬 구절은 아니다. 예수를 정치적 혁명가로 보는 학자들이 있다(Reimarus, Kautzky, Eisler). 결과적으로 예수의 활동은 로마 군대와 유다교 지배층에게 상당한 위험을 가져다 준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수가 젤로데파처럼 무력투쟁을 벌여서 그런 결과가 생겼다고 보기 어렵다. 예수는 로마 군대에 비폭력으로 저항한 분이다.

철학자 블로흐(Bloch)는 예수가 ‘정신적 전쟁’(geistlicher Krieg)을 치른 것이라 주장한다. 세상의 평화와 대조되는 마음의 평화를 예수는 주러 왔다는 다른 해석도 있다. 전쟁 중에도 마음의 평화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해석은 교회를 세상과 관계없는 모임으로 오해하게 만든다.

부모, 자녀 사이 분열이 묘사되지만, 부부 사이 분열은 예시되어 있지 않다. 예수의 이혼 금지 규정을 의식한 것 같다. 통념과 다르게 천륜이라는 부모와 자녀보다 인륜이라는 부부 사이가 예수에게 더 소중하다는 뜻일까.

에세느파에서 구성원들에게 요구하던 가족과의 절연을 예수가 따르는 것은 아니다. 부모에 대한 존중보다 토라 존중을 더 강조하던 랍비들의 요구를 예수가 따르는 것도 아니다. 예수는 가족 사랑을 당연히 중시했다(마태 15,3-6; 19,19). 예수 따름을 가족이 방해하는 극단적인 경우에 그 판단 기준을 말하려는 것이다.

예수도 자기 가족과 불화를 겪었다. 미쳤다는 소문이 있던 예수를 가족들이 찾아다녔다는 보도가 있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를 평생 잘 이해한 분이라고 가톨릭 신자들은 배웠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 깊이 새겨 오래 간직하였다”(루카 2,19).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를 잘 이해한 분 같지 않다. 마리아는 예수의 유랑운동에 동참하지 않았다. 아들의 십자가 처형장에도 어머니 마리아는 없었다.

마리아의 태도는 초대교회에서 차차 문제가 된 것 같다. 그래서 복음서는 후대에 갈수록 ‘마리아 살리기’에 나선다. 요한 복음서에는 십자가 아래에서 마리아와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와 차분히 대화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마리아와 제자들을 신학적으로 구출하기 위해 복음서 저자가 일부러 꾸며 넣은 단락이다. 그 메시지는 받아들여도 그 장면을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하면 안 된다.

‘십자가를 지다’의 본래 뜻을 두고 논란이 계속되어 왔다. 창세기 22,6에 희생제사에 쓸 나무를 메고 가는 이사악을 십자가를 지는 사례로 보는 랍비들도 있다. 예수가 젤로데파의 언어를 빌어다 쓴다고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헹엘(M. Hengel)은 주장하지만 그런 사례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에제키엘서 9,4-6처럼 예수를 따르는 표시로 십자가를 이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십자가는 세례를 뜻하겠다(2코린 1,22; 로마 4,11). 오늘의 단락에서 십자자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십자가를 지고 사형장으로 향하는 모습은 당시 이스라엘에서 흔한 광경이다. 마카베오 시대부터 로마 총독 통치기까지 많은 유다인들이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율법학자 요세 벤 요에셀(Jose ben Joezer), 예수 탄생 즈음인 공통년(서기) 3년, 전 예루살렘 근처에서 무려 2,000명의 십자가 처형, 공통년 70년 유다전쟁에서 무수한 십자가 처형 등 인용하기에도 슬픈 역사다.

‘십자가를 짐’이란 주제는 요즘 주로 심리적으로 설교되지만 마태오의 의도는 그런 설교와는 전혀 다르다. 정치적 주제를 재빨리 심리적 주제로 바꿔치기하는 수법에 능숙한 사람들이 있다. 신자들의 저항의지를 약화시키고 악의 세력에게 점수 따려는 잔꾀를 부리는 설교다.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문제로 돌리는 수법이다. 설교를 심리분석으로 도배질하는 설교자도 있다. 성서를 잘 모르는 탓이다. 엉터리 설교를 하는 것보다 차라리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신자들에게 더 유익하다.

39절 “목숨”은 제자들의 고통이 예수의 사명과 연결된다는 뜻이다. 목숨 걸고 예수를 따르라는 결연한 촉구다. 예수를 제대로 따르면 가족과 사회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되고 사회 특권층의 반발을 가져오기도 한다. 악의 세력과 마찰을 빚지 않고, 악의 세력에게 비난받지도 않는 평안한 종교생활을 바라는가. 그런 삶에는 무언가 중요한 내용이 빠져 있다.

가족보험 가입하는 심정으로 예수를 따르는 신자들이 적지 않다. 선교를 보험 상품 선전하듯 생각하는 종교인도 드물지 않다. 그들이 순교라는 단어를 생각이나 할까. 그들이 예수를 알까. 우리 기도 중 90%가 아마 가짜이듯, 그리스도교 신자 90%는 아마 가짜 신자일 것이다. 한 명이 예수를 제대로 해설하고 다섯 명이 예수를 엉터리로 해설한다면, 이 나라 그리스도교는 어떻게 되어 갈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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