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4

“26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감춰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기 마련입니다. 27 내가 어두운 곳에서 말하는 것을 여러분은 밝은 곳에서 말하고, 귀에 속삭이는 말을 지붕에서 외치시오. 28 그리고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시오. 29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런 참새 한 마리도 여러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30 아버지께서 여러분의 머리카락까지 낱낱이 세어 두셨습니다. 31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수많은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합니다. 32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안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안다고 증언하겠습니다. 33 그러나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른다고 증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모른다고 하겠습니다.” (마태 10,26-33)

▲ ‘4명의 사도를 축복하는 구세주’(세부), 카르파초, 1480년
원래 독립된 3개 말씀을 마태오가 한 단락으로 엮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제의 28절을 중심으로 앞뒤 구절이 둘러싸인 구조다.

전해진 여러 자료를 앞에 두고 어떻게 편집할까 고심하는 마태오의 표정을 곁에서 보는 듯하다. 돌아가신 선친에 대한 사진을 놓고 어떤 순서로 앨범에 담을지 자녀들이 토론한다면 어떨까. 중요한 사건 순서로? 시간 순서로? 편집 기준이 자녀들마다 의견이 다를 수 있겠다. 4복음서 저자들이 한 데 모여 예수의 역사와 말씀을 떠올리며 토론하는 편집회의 모습도 상상하자.

26절은 박해 때 두려움을 이기라는 말씀이다. 감추어진 것이 ‘언제’ 드러나느냐 토론되어 왔다. 역사 안에서? 최후의 심판에서? 아마 마태오는 마지막 날 심판을 가리키는 듯하다. 27절은 제자들이 지금 당당히 예수의 역사와 말씀을 선포하라는 당부다. 지붕이 평평한 이스라엘 가옥 구조를 참고하여 집에서 가장 높은 곳인 지붕에서 외치라는 표현이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 금요일에 유다교 회당 봉사자는 도시 제일 높은 곳에서 나팔을 분다. 28절은 박해당할 때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전통에서 나왔다(2마카 6,30; 마태 5,11-; 10,17-22).

죽일 수 있는 육신과 죽일 수 없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학에 대한 그리스 철학의 이분법적 영향이 유다교에 퍼졌음을 알려준다.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그리스 철학의 주장은, 그러나 오늘의 단락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느님은 영혼도 죽일 수 있다.

‘지옥’은 영이 머무는 중간지대가 아니라 최종적 처벌 장소라는 후대 유다교에서 발전된 사상이 오늘의 단락에 보인다. 28절과 비슷한 내용을 다룬 문헌이 유다교에 많다. ‘죄인의 영혼은 심판 때 부활되지 않는다’, ‘처벌받은 후 죄인의 영혼은 죽게 된다’, ‘죄인은 지옥에서 열두 달 고통 받은 후 영혼은 죽어 먼지가 된다’ 등의 표현이 있다.

28절은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에 대한 설명을 하는 자리가 아니다. 그럼에도 28절은 그리스도교 해석 역사에서 영혼 불멸의 근거로 자주 언급되었다. 그리스도교 부활 교리는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에 대한 어떠한 자세한 설명―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어디에 머무느냐, 부활 때 영혼은 몸과 어떻게 결합되느냐 등―도 한 적 없다. 마태오는 죽음 이후 인간의 상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긍정적으로 보면 마태오는 육신을 천시하는 말을 하지 않은 셈이다. ‘영혼은 육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다’는 주장은 그리스도교와 아무 관계없다.

안티고누스 치하(기원전 40~37년)에서 유다 동전 제도는 로마식으로 바뀌었다. 1아스(As)는 16분의 1 데나르(Denar)에 해당한다. 참새 두 마리 가격은 한 끼 식사 때 빵 가격에 해당한다.

참새와 머리카락의 비유는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애정을 강조하려는 뜻이다. 안타깝게도 오늘의 단락은 예정설이라는 주제로 잘못 다루어지기도 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느님의 허락 없으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주장 등이 그렇다. 그것이 공식이 된다면 교통사고, 전쟁, 미사일 발사 등 모든 사건을 하느님께 낱낱이 항의해야 할 판이다. 그리스도교는 어떤 종류의 예정설도 가르친 적 없다. 칼빈, 바르트 등 일부 신학자들의 예정설 주장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풍경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함’은 ‘존중(순종)을 강조(율법서), 하느님을 알고 태도를 바꿈(지혜서), 하느님을 믿고 연결됨(시편)’ 등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다양하게 표현된 요구다. (그리스도교 일부에서 흔히 쓰이는 ‘순종’이란 단어 대신 ‘존중’이란 단어를 나는 쓰겠다. 순종에서 느껴지는 독재의 냄새를 줄이고, 인간의 자발적인 태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다. 그리스도교는 노예 윤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마태오는 그 단어를 심판과 연결하는 것 같다. 유다교 문헌에도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신명 10,12.20; 13,5). 유다교를 심판의 종교로,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로 규정하는 그리스도교 내 일부 경향은 잘못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보다 우월하다’, ‘두려움에서 하느님을 보는 바리사이, 사랑에서 하느님을 보는 바리사이’ 등 여러 표현이 유다교 문헌에 보인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존중하는 자세다. 하느님이 마치 자기 비서인양 설치는 사람도 있다. 하느님과 매일 직통전화하고 문자를 주고받는 것처럼 처신하는 종교인도 있다. 하느님이 당신 손바닥 안에 있단 말인가. 제발 자제하시라. 용감함으로 무식을 덮을 수는 없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교만은 종교적 교만이다.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반비례 관계가 아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커지면 하느님을 덜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정비례 관계다. 하느님을 두려워할수록 더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커지고,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하느님이 더 두려워진다. 심판에 대한 두려움과 하느님의 자비는 모순이 아니라 동반관계다. 누구를 진정 사랑한다면 사랑이 깊어갈수록 상대에게 더 조심스럽고 존경하게 된다. 사랑을 해보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죄다.

두려워 말고 당당하게 예수의 역사와 말씀을 전하라는 오늘 단락의 주제는 우리에게 심각한 과제 하나를 던져준다. 누구에게, 언제 예수의 역사와 말씀을 우리가 배우기나 했나. 전체적으로 보면 천주교는 예수를 소홀히 가르치고, 개신교는 예수를 엉터리로 가르치는 경향이 있다.

모르는 것을 우리가 어떻게 전하라는 말인가. 예수를 잘못 전하는 것보다는 아예 전하지 않는 것이 차라리 더 낫다. 성서 공부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와 설교자 모두에게 시급하고 중요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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