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7]

▲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세부), 두초의 작품(1311년)
하느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체험은 그들이 기대하지도 않았고, 그들이 그 정당성을 설명할 수도 없는 사건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것은 이집트에서의 해방 사건이다. 해방절은 이스라엘이 그 사실을 해마다 기념하는 날이었다. 그것은 사람들의 실존적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었다.

시나이 산에서 주어진 율법과 유대교가 만드는 제도는 하느님의 무상성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놀이를 표지하는 것이다. 성서는 하느님이 율법을 주셨다고 말한다. 하느님은 우리 스스로는 불가능하던 것을 우리의 역사 안에 발생시키셨다. 하느님이 놀이를 주신 것이다. 창세기(2-11장)는 인류의 타락, 카인의 살인, 노아의 홍수, 바벨탑의 이야기 등으로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의 구원에로 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하느님이 무상으로 베푸신 구원의 삶, 곧 놀이다.

예수는 그 무상성을 어떻게 나타내었나? 예수는 성서 유산을 폐기하지 않았다. 예수는 유대교 자체를 비난하지 않는다. 예수는 무상성(無償性)이 자기의 삶 안에 구체적으로 나타나게 한다. 인간의 생활을 정지하고, 인간의 삶 밖에서 얻는 무상성이 아니다. 백일기도, 공양미 300석, 전대사(全大赦)와 한대사(限大赦)를 얻는 방법 등은 인간의 삶 밖에서 하느님과 교섭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과도 인간과도 무관한 일들이다.

예수는 유대인이다. 유대교의 위대함은 하느님이 인간의 삶 밖에서 위로나 보상을 주는 분이 아니라, 인간 삶의 한가운데서 당신 스스로를 주신다는 사실을 알아들은 데 있다. 성서의 하느님은 우리의 부족을 충족시켜 주는 미봉책(彌縫策)이 아니다. 그분은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가능성과 능력을 주신다.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놀이를 발생시키려 한 것은 옳았다.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발생하는 놀이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상적(假想的)인 것이 아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하는 접근은 우리 일상의 삶을 버리고 다른 세계, 곧 탈혼, 환상, 사적 계시 등에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우리의 세계에서 살게 하신다. 우리의 세계가 지닌 갈등, 제한, 통념 등에 대해 전혀 달리 대처하게 하신다. 전혀 다른 놀이를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성서의 율법은 바로 그 놀이를 발생시키기 위한 그 시대적 표지(標識)이다.

그러나 여기에 어려움은 있었다. 율법이 놀이가 존중해야 하는 표지가 되면서, 무상성이 위협을 받게 되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율법과 제도의 존재 이유를 잊어버리고, 그것을 지키는 데만 골몰할 수 있다. 그것이 사두가이파와 유대인 군중이 처한 상황이었다. 사두가이는 하느님의 무상성을 소홀히 하면서 하느님을 거론하고, 백성의 책임과 자유를 무시하면서 그들을 지배하였다.

따라서 놀이가 가상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즉 잘 지키면 상 받고, 못 지키면 벌 받는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주는 놀이가 아니라, 계명 준수와 그것의 반복이라는 폐쇄된 삶을 만들고 말았다. 이제 율법은 사람의 자유를 빼앗고. 그들에게 죄책감만 주었다. 인간은 자기의 놀이를 잃고, 노예와 같이 되면서 율법은 부담스럽기만 하였다. 동시에 율법도 표지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사람들은 그 부족을 메우기 위해 더 많은 법을 만들었다. 율법이 가상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며, 불충실함이 발생하지 않도록 완벽한 장치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것이 바리사이의 노선이다.

예수는 율법 위에 무상성이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율법이 제 기능을 잃은 것은 놀이를 발생시키는 무상성이 사라지면서였다. 이것을 위해 예수는 과거 예언자들과 같이 감사할 줄 알 것, 겸손한 마음을 가질 것, 참회할 것 등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부족하다.

예수는 율법을 범한다. 더도 덜도 없다. 예수의 범법(犯法)은 전시용이나 영웅주의가 아니다. 예수는 자기가 회복하려는 무상성이 희석되지 않기를 원했다. 예수는 자기의 활동이 다른 문제로 비화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예수는 율법이 그 상징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율법 위주의 삶에 몇 개의 구멍을 뚫었다.

예수는 유대교의 계명들이 그 상징적 의미를 회복하기를 원하였다. 안식일, 정결법, 율법이 보장하는 권위에 대한 순종,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차별, 이혼법 등을 무상성에 입각하여 해석하기를 원하였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하는 실천을 무너트린다. 예수는 우리의 윤리적 · 율법적 올바름이 우리를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세리들과 창녀들이 여러분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갑니다”(마태 21,31). 하느님의 무상성과 그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우리의 놀이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사람들에게 그런 예수의 말은 비합리적이었다.

예수는 모세의 법만 범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해석되고 채색된 자연법 혹은 생명의 법도 범한다. 예수는 병자들을 고친다. 유대인들에게 병고는 죄에 대한 벌이었다. 예수는 그런 악(惡)의 논리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킨다. 예수는 당신 안에 죽음의 법을 이길 수 있는 부활의 영이 계심을 말씀한다.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은 나에 관해 증언할 것입니다”(요한 15,26).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16,15).

예수는 인간의 한계에서도 후퇴하지 않는다. 예수는 그 한계를 넘어서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을 자기 안에 느낀다. 그것이 하느님이다. 예수의 부활은 하느님이 죽음을 넘어서도 무상으로 베푸신다는 사실을 말한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무상성과 그것의 상징성을 거부하는 일이 아니면, 무엇이나 할 수 있다. 예수가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메시아가 되기를 거부한 것은 하느님의 무상성과 그 상징성을 은폐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이기에 인간도 베풂을 살아야 한다.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계시다, 보라 저기 계시다 하더라도 믿지 마시오”(마르 13,21).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은 우리가 무상성의 놀이를 잃으면 사라진다.

예수가 우리에게 권하는 것은 우리 삶의 변화이다. 우리 삶의 여백(餘白)에 무상성은 이미 들어 있다. 우리는 무상성 안에 태어났고, 무상성 안에서 성장하였다. 그 무상성에서 시작하여 하느님의 이름을 해석하고, 그분을 부르는 놀이를 해야 한다.

그것이 신앙이다. 그것은 소수의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 아니다. 신앙은 하나의 결단이다. 그것은 인간이 뒤로 미룰 수 없는 결단이다. 예수의 말씀과 행동은 그 결단을 빨리하라고 말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가까웠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누구든지 쟁기에 손을 얹고 뒤를 돌아다보지 말아야”(62) 한다.

예수는 초대한다. 사람들은 각자 선택해야 한다. 예수도 결단한 사람이다. 예수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당신의 음식이라고 말씀하신다(요한 4,34).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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