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3

“16 이제 내가 여러분을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늑대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17 여러분을 법정에 넘겨주고 회당에서 매질할 사람들이 있을 터인데 그들을 조심하십시오. 18 또 여러분은 나 때문에 총독들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받으며 그들과 이방인 앞에서 나를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19 그러나 잡혀갔을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미리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가 오면 여러분이 해야 할 말을 일러주실 것입니다. 20 말하는 이는 여러분이 아니라 여러분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십니다. 21 형제끼리 서로 잡아 넘겨 죽게 할 것이며, 아비도 또한 제 자식을 그렇게 하고 자식도 제 부모를 고발하여 죽게 할 것입니다. 22 그리고 여러분은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23ㄱ 이 동네에서 박해받거든 저 동네로 피하십시오. 23ㄴ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여러분이 이스라엘 동네를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입니다. 24 제자가 스승보다 더 높을 수 없고 종이 주인보다 더 높을 수 없습니다. 25 제자가 스승만큼 되고 종이 주인만큼 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집주인을 가리켜 베엘제불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그 집 식구들에게야 무슨 욕인들 못하겠습니까?” (마태 10,16-25)

▲ ‘4명의 사도를 축복하는 구세주’(세부), 카르파초, 1480년
예수를 제대로 따르는 사람은 박해받고(17-18) 미움 받는다(21-22)고 예수는 예고한다. 그러나 성령(19-20)과 사람의 아들(23)이 그들을 도울 것이라는 위로로 이루어진 오늘의 단락이다. 18-22는 마르코 복음서 13,9.11-13에서 따왔다.

복음서에서 드물게 보이는 동물의 비유가 16절에 등장한다. 양과 늑대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상태가 이사야서 11,6에 묘사되어 있다. 뱀은 창세기 3,1부터 교활함의 상징으로 쓰였다. 비둘기는 깨끗함의 상징이다(아가 5,2; 6,9). “내 곁에서 비둘기처럼 깨끗하고 이방 민족 사이에서 뱀처럼 지혜로워라” 하고 하느님이 말씀하신다는 예화가 유다교 설교집 미드라쉬에 있다.

가짜 예언자 앞(마태 7,15), 바리사이와 사두가이 앞(마태 16,6)처럼 사람들을 조심하라고 예수는 말한다. 120명이 넘는 유다교 공동체에는 법정이 있었다. 유다교 회당은 또한 정치집회 장소이며 법적 처벌이 행해지는 곳이기도 하다. 39번의 매질은 공개적으로 행해진다(신명 25,1-3; 2코린 11,24).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실행되었는지 우리는 알기 어렵다.

18절 ‘총독과 왕’은 이스라엘 밖에 해당되는 상황이니 이방인 선교를 염두에 두는 언급이다. 예수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생각될 수 없는 구절이니 초대교회에서 생긴 이야기겠다.

박해 순간에 성령이 언급된 것은 특이하다. 마태오는 성령을 드물게 언급하는데 대부분 예수와 연결한다(1,18; 3,16; 12,18). 초대교회가 박해받을 때 성령 체험을 했다는 느낌이 배어 있다. 세례(28,19)를 제외하면 제자들에게 성령은 마태오 복음에서 이곳에서만 약속되었다. 박해받음은 유다교에서도 높이 평가되지만 율법에 대한 충실함과 연결되었다.

19절은 성서 공부나 설교 준비에 게으른 종교인들이 변명에 즐겨 쓰는 구절이다. 오늘 단락의 문맥과 아무 관계없는, 성서를 모욕하는 행위다. 지성이 높지 않은 설교자를 격려하기 위해 ‘기도로 설교를 준비하면 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이 본의와 다르게 잘못 쓰인 것이다. 악마도 성서를 인용할 줄 안다.

아프리카에서 활약한 유명한 의사이자 신학자 알버트 슈바이처는 23ㄴ을 근거로 ‘제자들이 돌아오기 전 하느님 나라가 온다고 한 예수가 실망했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후대 성서 연구는 23ㄴ을 예수가 진짜 한 말로 여기지 않는다. 사실 23ㄴ은 성서무오설을 좁게 해석하는 사람들이나 근본주의자들에게 크게 당황스런 구절이겠다. 그러나 그들은 이 구절을 모르는 척 슬쩍 지나친다. 그들의 속셈은 누구나 안다.

25절 “베엘제불”은 가장(家長)을 뜻하는 단어다. 가장인 예수와 예수의 가족인 제자들은 같은 운명에 처하리라는 뜻이다. 앞 단락에서 제자들에게 가난을 요구한 예수는 오늘의 단락에서 박해를 예고한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와 같은 운명을 지닌다는 뜻이 오늘 단락의 핵심 내용이다(마태 10,24-25; 로마 6,1-).

예수는 제자들에게 어떤 현세적 보상도 약속한 일이 없다. 오히려 가난과 박해라는 충격적인 말씀을 한다. 지금 유럽 신자들뿐 아니라 한국 신자들에게도 불쾌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만 이상한 표어가 아니다. ‘예수 믿으면 잘 살게 된다’거나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는 부류의 통념은 사실 예수의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 숨겨진 야욕을 가지고 예수를 믿으면 언젠가 그 야심에 반드시 배신당한다.

오늘 누가 박해받는가. 부자와 권력의 보호 아래 만수무강하는 종교인들은 박해받을 염려가 없다. 근본주의 신자들, 반(反)개혁적인 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남을 박해할지라도 남에게 박해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수를 제대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박해나 미움을 받지 않을 것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심판을 초조하게 기다리시라.

교회개혁은 예수를 정확히 알고 믿음을 도우려는 목적을 지닌다. 교회를 파괴하고 믿음을 방해하기 위해 교회개혁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교회개혁을 외치는 사람 중에 예수를 잘 모르는 사람이 드물지 않다. 예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 교회개혁을 적절히 촉구하기 어렵다. 먼저 예수를 잘 알도록 애쓰는 것이 교회개혁을 위한 우선 순서다. 예수를 모르면 교회개혁은 꿈도 꾸지 못한다.

그리스도교에서 ‘역사’라는 단어보다 ‘말씀’이라는 단어가 더 자주 쓰이는 편이다. 개신교나 가톨릭 모두 예수의 역사보다 예수의 말씀에 대해 더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풍조는 잘못이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어록을 그저 연구하는 모임이 아니다. 예수의 역사를 현재에 복원하기 위해, 실천하기 위해 말씀을 연구하는 것이다. 예수의 역사가 예수의 말씀보다 우선이고 더 중요하다.

‘하느님 나라가 곧 오리라는 자신의 기대에 예수가 실망했느냐’는 문제를 오늘 단락 23ㄴ 구절이 제시한다. 놀랍게도 초대교회에서 외면된 이 문제는 근대에 이르러 비로소 진지한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오늘도 가톨릭 · 개신교 성서학자들은 물론 조직신학자들도 그 문제를 심각히 연구하지 않는 것 같다. 예수 오신지 겨우 2000년―아직 신학이 갈 길은 멀고도 멀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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