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은의 신학 오디세이아]

학생들과 기도에 관한 수업을 하다가, 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기도가 있는지, 혹은 무슨 기도가 나의 삶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질문을 했다. 많은 학생들이 ‘주님의 기도’를 꼽았다. 아주 어릴 때 배웠던 기도이기 때문에, 아무 때나 기도하고 싶을 때는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는 것이 그들의 답변이었다.

누가 나에게 가장 좋아하는 기도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라고 답할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성당에 가면 미사 후 우리는 이 기도문을 다 함께 바쳤었다. 그때,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기도도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릴 때 감명 깊게 외운 기도문이서인지 짧지 않은 기도문이지만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내 영성생활에 가장 도움이 된 기도가 무슨 기도인지 묻는다면, 나는 단연 양심성찰 혹은 의식성찰(examination of conscience)이란 아주 고전적인 기도를 들 것 같다. 양심성찰은 마치 화려한 음식이나 멋을 잔뜩 낸 음식보다, 결국 밥과 된장찌개로 된 간소한 식단이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것처럼, 그렇게 내게 있어 깔끔하고 단정한 기도이며, 아주 익숙한 동네의 골목길을 걷다가 불쑥 문방구에도 들러보고, 떡볶이집도 기웃거리는 것 같은 그런 편안하고 정겨운 기도이다.

양심성찰은 요즘 유행하는 멋지고 세련된 기도는 아니지만, 교회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기도다. 양심성찰은 자칫 기계적이고 고답적(高踏的)인, 혹은 그저 판공성사 보기 전에 죽 훑어보는 죄의 목록 같은 느낌을 받기 쉽다. 그러나 양심성찰은 단순한 행위를 넘어 나의 의식이 어떻게 흘러가는가를 바라보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은, 또한 훈련을 요구하는 기도이다.

ⓒ박홍기

양심성찰은 전통적으로 수도자들이 완덕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습관적인 결점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사용한 기초적인 수련이라 할 수 있다. 초세기 수도자들은 주로 돌멩이를 사용했다. 아침에 일어나 깨끗한 돌을 10개 골라 오른쪽 주머니에 넣고, 한 번씩 그 습관적인 행위를 하게 되거나 습관적인 생각을 할 때마다, 혹은 하는 그 순간을 의식할 때마다, 왼쪽 주머니에 돌을 옮겨 놓고, 점심식사 전이나 저녁식사 전, 그리고 잠들기 전, 얼마나 자신이 이 결점에 떨어졌나를 세어 보았다. 한 가지의 나쁜 습관을 고치고 나면 또 새로운 결점을 주의 깊게 관찰해 가면서 바르게 살고자 노력했다. 내가 수도원에 입회해서 처음으로 배운 기도도 양심성찰이었다.

다시 말해 양심성찰은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언제나 학생들에게 양심성찰을 기도 수업 첫 시간에 가르친다. 학생들에게 오늘 하루를 비디오를 거꾸로 돌리듯이 한번 보자고 권유하면, 학생들은 신기해하며 열심히 따라한다. 지금 이 수업에 오기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교실로 들어오면서 무엇을 보았는지, 또 그 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렇게 시간을 되짚어서 결국 아침에 눈을 뜰 때 어떤 느낌이었는지, 무슨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해 보라고 권한다.

어제는 가을의 초입에 바람과 햇살이 너무 좋아 이론을 먼저 강의하고, 나는 학생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잠시 눈을 감고 이 시간 어떤 소리와 어떤 향기가 나는지 한번 느껴보라고 했다. 어떤 학생은 풀냄새를 이야기했고, 어떤 학생은 멀리서 들리는 기차소리도 이야기했다. 나무에 기대기도 하고, 잔디에 드러누운 채, 틀에 매이지 않은 모습으로 열심히 성찰하는 그들의 모습이 무척 사랑스럽다.

물론 힘들어하는 학생들도 있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어떻게 해야 맞는가에 골몰하는 소위 착한 모범생들도 있다. 그래서 이야기했다.

“내가 느끼고 기억하는 순간은 생이 되고 기도가 되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고 알아채지 못하는 순간은 우리가 움켜쥔 모래처럼 스르르 빠져나가는 거니까,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어떤 양심성찰도 틀린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기억을 많이 못해도 괜찮아요. 대신 그럼 이 순간에 그냥 머물며 이 공기와 햇살과 바람을 느껴보세요.”

나의 양심성찰은 주로 하루의 일상을 되돌아 보고 나서, 한 가지 사건이나 한 가지 느낌에 주목하며 관찰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어디서 이 느낌이 오는 건지, 그리고 이 느낌은 나의 하루 일상 안에서 어떻게 발전되었는지, 그리고 비슷한 느낌을 언제 받았는지 기억해 본다. 그리고 이런 느낌에 대해 (몸이 반응한다면) 나의 몸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떠올려본다.

나는 수련자 때부터 이 기도를 정말 열심히 했는데, 그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았던 것 같다. 그리고 서원 후 미국에서 영성을 공부하면서, 내가 누구인지, 나의 내면의 지도를 무척 그리고 싶었을 때, 양심성찰은 잔잔한 물처럼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나의 경우, 양심성찰은 내 삶의 자리에서 무언가를 식별할 때 많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하느님은 이런 나의 삶속에서 무엇을 향해 초대하고 계신지 찾는 단초 같은 것 말이다.

양심성찰을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나의 경험이나 알 수 없는 내면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법일 수 있겠는데, 성서의 구절 혹은 어떤 주제들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성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나는 시편 139편을 자주 사용한다. 나를 다 아시는 하느님 앞에 오늘 하루 나의 느낌들은 어떻게 펼쳐져 갔고, 나의 마음과 생각들은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바라보면 마음이 조금 느긋해지곤 한다.

이 기도를 하는 동안 죄의식이나 수치심은 별로 들지 않았는데, 이는 내가 뻔뻔한 까닭도 있지만, 하느님 안에서 나의 행동이나 마음이 어디에서 출발하고 어디로 가는지 그 추이에 더 관심을 두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영성에 관심을 갖고 그렇게 성장하고 싶다면, 사회교리 중 한 구절이나 가장 기초적인 문구,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관심” 같은 구절을 놓고 양심성찰을 해도 좋겠다.

그렇게 해서 나를 알게 되면 무슨 효과가 있고, 그게 무슨 기도인가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양심성찰을 계속하면, 내가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순간과 아닌 순간의 차이를 점점 느낄 수 있다. 이 기도를 통해 하느님과 내가 현존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연장되어 간다고나 할까? 그리고 그 순간들에 하느님 앞에 자연스러운 나를 깊이 사랑하게 한다고나 할까? 그런 훈련은 결국 기도의 열매가 아닐는지.

내게 있어 기도는 무한한 타자로서의 하느님과의 대화이다. 여기서 “무한한 타자(the infinite Other)”란 나를 상대하시고, 나와 관계하시면서, 내가 내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나를 더욱 발견케 하시고, 내 이웃과 사회 구조와 문화 안에 육화해 계시면서, 내 존재 밖에 있는 타자를 향해 나아가게 하시고, 그리고 더 멀리 그리고 더 깊이 영원히 알 수 없는 존재로 계시면서 당신을 끊임없이 갈망하게 하는 신비를 의미한다.

그러기에 나는 시편 작가의 말대로 “야훼여, 당신께서는 나를 환하게 아십니다. 그 아심이 놀라워 내 힘 미치지 않고 그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 납니다”(시편 139,1.6)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박정은 수녀 (소피아)
홀리 네임즈 수녀회. 1990년대 후반부터 미국에서 연구하며, 이방인이자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자 시도했고, 지구화된 세상에서의 '이주' 문제, 동양 종교의 몸 수행에 관한 책을 써 왔다. 현재는 캘리포니아 소재 홀리 네임즈 대학의 영성학 교수이며, '여성의 원'이라는 피정도 지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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