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2

예수께서 열두 사람을 파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방인들이 사는 곳으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에도 들어가지 마시오. 다만 이스라엘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시오. 가서 하늘나라가 왔다고 선포하시오. 나병환자는 깨끗이 낫게 해 주고 마귀는 쫓아내시오. 여러분이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시오. 돈주머니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가지고 다니지 마시오. 식량주머니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시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습니다. 어떤 도시나 마을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고장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거기에서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무르시오. 그 집에 들어갈 때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시오. 그 집이 평화를 누릴 만하면 여러분이 비는 평화가 그 집에 내릴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그 평화는 여러분에게 되돌아 올 것입니다. 어디서든지 여러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또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도시를 떠날 때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리시오. 나는 분명히 말합니다. 심판 날이 오면 소돔과 고모라 땅이 오히려 그 도시보다 가벼울 것입니다.” (마태 10,5-15)

▲ ‘4명의 사도를 축복하는 구세주’(세부), 카르파초, 1480
마르코 복음서 6,8-11과 루카 복음서 10,4-12을 대본으로 하여 마태오가 새로 만든 단락이다. 예수처럼(마태 9,37) 제자들은 이스라엘의 양들을―목자들이 아니라― 돌보라는 말씀이다. 유다교 지배층에 대한 비판이 이미 담겨 있다. 예수의 선포(마태 4,17)를 제자들은 선포할 것이며, 예수의 행동(마태 8,1-4.17.28-34; 9,18-26.32-25)을 제자들은 행동하라는 말이다.

전체 문장은 명령체로 되어 있다. 초대교회 유랑운동은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유랑하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선교’와 ‘가난한 교회’가 오늘 단락의 두 핵심 주제다.

‘이방인이 사는 곳으로 가지 말라’는 말씀도 의외지만(이방인 마을을 통과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그렇다면 지리적으로 아예 다닐 수 없는 이스라엘 지역도 많겠다.) 사마리아 지역에도 가지 말라고 예수는 말한다. 이 말을 예수가 진짜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성서학자는 드물다.

사마리아 지역 사람들은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고 이방문화와 접촉하여 독특한 제의를 발전시켰다(에즈 4,1-5). 그래서 유다인들과 랍비들이 그들과 접촉을 금지시켰다(서기 135년에 사망한 랍비 아키바는 예외다).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보통 유다인들보다 훨씬 개방적이던 예수의 모습(루카 9,51-56; 10,30-35; 17,11-19; 요한 4)과 사뭇 다르다.

오직 이스라엘에 가라는 예수의 말씀은 이미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온 세상 선교를 가르치는 마태오 복음서 28,16-20과 오늘 단락의 모순을 마태오는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할까.

첫째, 역사의 예수는 이스라엘을 우선 구출하려 했다. 둘째, 제자들의 이스라엘 선교는 결국 실패하였다. 셋째, 이스라엘 선교 실패 후 제자들은 이민족 선교에 나서게 되었다. 이런 세 가지 역사적 흐름을 정확히 순서대로 주목해야 하겠다.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루카 10,4)는 금지 말씀이 너무 엄해서 다른 복음서에서 그 구절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대식가요 주정뱅이”(마태 11,19)라는 예수의 모습과 함께 생각하기 어려운 구절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모순이라고 보긴 어렵다. 마태오 복음서 10,9이 제자들에 대한 음식 규정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시 방랑자의 생존에 기본적인 식량, 속옷, 신발, 지팡이 등 4가지도 예수는 제자들에게 금지하였다. 신용카드, 고급차, 저금통장, 골프채 등 4가지를 가진 종교인들은 오늘 예수의 말씀을 어떻게 생각할까.

당시 상황과 오늘날 교회 상황이 이처럼 거리가 있는 성서 구절은 보기 드물다. 가난하게 떠돌던 제자들의 삶과 오늘 교회의 성직자의 삶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안정된 제도, 건물, 토지를 가진 오늘의 교회는 상당한 재산 소유주다. 성직자 대부분이 중산층 이상의 안락한 삶을 누리고 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든 일단 돈부터 걷는 관행은 이미 상식처럼 벌어지는 일이다.

예수가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가장 먼저 당부한 덕목은, 기도 · 열정 · 돈 · 조직이 아니라 바로 가난이었다. 아무리 기도를 열심히 하고, 선교 열정에 넘치고, 조직으로 탄탄히 준비한다 하더라도, 교회가 가난하지 않으면 헛된 일이다.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가난은 최대의 적이겠지만 그리스도교 관점에서 가난은 교회의 최대 무기다. 교회의 최대 특징은 바로 가난이다. ‘가난한 교회’가 아니면 오늘 그리스도교의 위기에 백약이 무효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 ‘가난한 교회’를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현실적으로 어느 정도 모순관계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 깃발 아래 돈, 사람, 박수갈채가 모인다. 마더 데레사. 이태석 신부 같은 경우다. 부자들은 돈을 기부하면서 죄책감을 크게 덜 수 있다. 사회개혁과 교회개혁에 거리를 두는 성직자들은 이 흐름에 기꺼이 합류한다. 교회 안에서 칭송과 명예를 동시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해 모금하고 병원이 생긴다. 교회는 자선단체를 소유하는 경영주가 된다. 그 단체의 노사문제가 생기면 교회는 당연히 사측 입장을 택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어느덧 대규모 재산소유주가 된다. 재산소유주인 교회는 부자와 권력자들과 당연히 밀착하게 된다. 이런 흐름을 효과적으로 자제하기란 쉽지 않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부자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한 교회’라는 깃발 아래에는 교회 밖은 물론 교회 안에서도 차가운 시선과 의심이 뒤따른다. 로메로 대주교, 보프 신부 같은 경우다. 부자들과 반(反)개혁적 종교인들은 가난한 교회를 싫어한다. 그들이 누릴 명예와 안락함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가난한 교회가 되려면 우선 교회의 재산을 줄여야 한다. 불편하더라도 성당과 교회 신축은 자제할 필요가 있다. 신자들에게 돈을 걷는 방식과 규모를 반성해야 한다. 십일조, 미사 예물, 교무금 등 관행을 재검토해야 한다. 돈으로 성직자에게 예의를 표하는 방식은 사라져야 한다. 종교인의 삶도 스스로 검소하게 꾸려야 한다.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를 내세우면서 ‘가난한 교회’를 외면하는 길을 걷지 않을까 걱정된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신자 수가 늘고 돈이 풍부해지면서 이미 그런 길로 들어선 것 같다. 돈 문제로 인해 신뢰도를 크게 상실한 한국 개신교는 점차 내리막길에 접어든 것 같아 안타깝다.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모두 돈 문제로 인해 추락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난한 교회는 거의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의 말씀을 우습게 아는가. ‘가난한 교회’는 인류에게도 그리스도교에도 그저 헛된 꿈일까. 가난하지 않은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가난한 교회’는 인류에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희망을 준다. 지금 이 세상에 누가 가난한 사람을 편드는가. 그리스도교라도 가난한 사람을 편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가 그렇게 가르쳤고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