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17] 마르 6,17-29

▲ ‘십자가에 못 박히는 그리스도’, 윌리엄 블레이크(1803년)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청운의 꿈을 품고 광야로 나갔다. 당대의 식민지배의 설움을 겪으면서도,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을 잊지 않았던 젊은이들이 뜻을 세우기 위해 찾은 곳은 광야였다고 한다. 광야를 다녀온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나라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상상할 수도 없다고 한다. 그 적막함은 거의 공포의 수준이란다. 유다 젊은이들이 광야로 나갔음은 그만큼 그 품은 뜻이 컸음을 의미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유혹하는 자’의 ‘유혹’을 겪으신 것은 자연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두려움만큼 마음을 어지럽히는 것이 또 있을까. 그곳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하느님의 뜻을 세웠으니, 그 뜻은 쉽게 흐트러질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그토록 엄숙하게 세운 뜻에 비하면 그 뜻을 펼칠 시간은 짧아도 너무 짧았다.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도 요절하셨다. 자연사도 아니었고 사고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갑자기 불치의 병을 앓다 돌아가신 것도 아니고, 불가항력의 자연재해에 의한 죽음도 아니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황망할 터인데….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죽음은 분명히 타살이었다. 그렇다고 합법적으로 사형(死刑) 당한 것도 아니다. 다른 사람, 그것도 어떤 한 사람의 원한에 의한 것이 아니라, 몇몇 사람이, 곧 특정 집단이 집요하고도 치밀한 계획을 세워 죽인 사형(私刑)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겉으로는 사형의 형식을 취했지만, 분명히 특정 집단이 ‘떼법’을 써서 살해한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죽음은 춤 잘 춘 포상(?)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요한을 거추장스럽게 여긴 ‘고관들과 무관들과 유지들’의 뜻이었다.

그렇게 예수님 시대에도 권력에 대한 욕망과 소유욕에 사로잡힌 이들은 하느님의 뜻과 사람의 선익은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 힘을 모아 ‘폐쇄적 지배집단’을 형성하고, 사람과 세상을 어지럽히고 고통스럽게 했다. 세례자 요한이 등장했을 때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예수님이 가는 곳마다 군중이 모인 것도 폐쇄적 지배집단 빼고 대부분의 시민의 삶이 피폐했음을 의미한다.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임으로써 희망을 주기보다는 절망과 고통을 안겼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는 그 폐쇄적 지배집단의 전횡에 침묵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셨다.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광야에 머물며 관상의 삶에 머물 수 있었음에도 예수님도, 세례자 요한도 세상에 등장했다. 세상에 나와서도 조용히 지낼 수 있었음에도 그분들은 험한 길을 나섰다. 험한 길에서 위험을 지혜롭게 피할 수 있었음에도 피하지 않았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공개적으로, 그리고 아무런 주저함도 없이 사람을 살리는 길을 걸었다. 그리고 살해당하였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죽음을 신학적으로만, 그것도 일방적으로만 이해하려 한다. 즉, 그 죽음으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것, 그 죽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화의 축복이 내렸다는 것에만 마음을 둔다. 이를 신학의 용어로는 ‘대속(代贖)’이라 한다. ‘일방적’이라 한 것은 대속의 의미만 헤아리지 ‘악’의 실체에 대해서는 너무 무심하다는 의미에서다.

우리가 그 죽음이 갖는 대속의 의미에만 머무는 사이, 그분들을 죽인 이들의 악에 대해서는 외면하거나, 침묵하거나, 과소평가하게 된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이들, 곧 헤로디아와 헤로데와 그 딸, 그리고 헤로데의 생일잔치에 와서 즐긴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의 악행에 대해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는다. 예수님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분을 죽이려 음모를 꾸미고, 여론재판을 열었던 바리사이, 율법학자, 원로, 대사제들의 악행과 그에 협조한 빌라도의 무책임, 그리고 제자들의 동상이몽에 대해서 우리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이들이나 예수님을 죽인 이들은 아마 같은 집단이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의 주검을 수습함으로써 그 죽음을 일단락 짓자 그들은 그 칼을 예수님에게 들이대는 것이 더 이상 유별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쇄적 지배집단이 된 그들에게 도전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실한 본보기를 보인 셈이다. 노예사회로 유지되었던 로마 제국이 반란을 도모하거나 도망친 노예에게 십자가형을 가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리가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죽음의 고차원적이고 영적이며 관념적인 의미와 가치에 몰두하는 사이, 그 악의 세력은 평범함이 되어 위세를 확장시킨다. 그 위세에 눌려 생명과 평화와 자유는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의 태도도 어쩌면 악의 확장을 방조하거나, 조장하거나, 더 나아가 부역한 것인지도 모른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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