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과 교회]12월 14일자 998호 <평화신문>과 2627호 <가톨릭신문>

‣ 영적예물이라는 외상

교회 안의 좋은 풍습 중 하나가 ‘영적예물’이란 것이다. 풀어서 얘기하자면 ‘당신을 위해 드리는 정성’을 물질이 아닌 ‘영적’으로 주겠다는 것이다. 이 풍습이 언제부터 있어 온 것인지,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풍습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아름다움도 과하면 아니한 만 못한 법이다.

이번 주 교계신문에는 영적선물을 받는 세 사람의 동정이 보도되었다. <평화신문>은 19면에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의 영명축일을 보도했고,  <가톨릭신문>은 21면에 수원 이주민공동체를 방문한 교황대사 오스발도 파딜랴 대주교와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 소식을 전했다. 먼저 서울교구민들은 정 추기경에게 미사참례 134만 5949번, 묵주기도 451만 9830단, 주모경 903만 9660번 등을, 이주민공동체는 파딜랴 대주교와 최덕기 주교에게 미사와 영성체 200회, 묵주기도 1천 단, 십자가의 길 50회, 화살기도 5천 회, 희생 200회 등을 전했다.

이미 특정한 지향을 가지고 기도나 미사를 하고 난 다음 그것을 선물로 줄 수도 있지만 영적선물의 태반은 불특정 미래에 대한 ‘예정’ 또는 누군가에 따른 ‘지시’일 때가 수두룩하다. 한마디로 ‘외상’이란 말이다. 정 추기경에게는 여러 경로로 들어온 영적예물을 취합한 형태이고, 교황대사와 최 주교에게는 영적선물 크기를 미리 정하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할당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외상으로 받는 선물은 주는 사람도 그렇고 받는 사람도 벅찬 감동일 수는 없다. 잘못하면 부도나기 십상인 것이 외상으로 하는 영적선물이란 것이다.

교구나 공동체의 인원이 많을수록 선물의 크기는 정비례하겠지만 무턱대고 많다고 좋은 일은 아니다. 다다익선은 세상의 논리이지 하느님의 논리는 그런 것이 아닐 터. 받는 사람 입장에서 헤아린다면 선물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부채를 쌓아놓는 것이다. 무슨 내용이든 1백만 번은 한 개인에게는 갚을 수 없는 죄송스러움이다. 하물며 9백만이라는 숫자 앞에서는 더욱더...

‣ 아라비아 숫자에 그대는 감동하는가?

현대인의 삶을 판단하는 대부분은 수량화, 숫자화되어 있다. 하기는 그런 것을 ‘디지털화’라고 애써 포장하기도 한다. 사람 사는 집을 나타내는 것, 아이들의 학교생활을 규정짓는 것, 사람의 사고력을 드러내는 것도 숫자화되어 있지 않은가?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복잡하지 않고 빠르고 쉽게 판단하는 동시대인들의 습성이기도 하다. 과연 우리 주변에 셀 수 없는 것이 존재 하고 있는가?

그러다보니 종교인들마저 기도를 ‘수량화’하고 있다. 하나둘 소리 내어 ‘세고’ 있다는 말이다. 묵주기도를 하면서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를 염하는 것이 아니라 ‘셈’을 위한 기도를 하고 있다.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로, 보이지 않는 존재에게 열어 보이는 ‘자기 비움’으로서가 아니라, 특정한 목표달성의 도구로서 보험회사 그래프로 되어간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누군가를 위한 영적선물! 참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적어놓은 미사와 영성체, 묵주기도, 희생봉사 등의 단어 옆에 놓여있는 숫자들을 보면, 마치 선물 앞에 붙은 가격표 같은 느낌이 든다. 선물을 주면서 가격표를 붙이고 주는 사람도 있는가? “내가 당신을 위해 기도 했습니다.”란 말 한 마디면 충분하고 넘칠 것을 100번 기도했다고 해야 상대방이 감격하는 것은 아니다. 어딘가에서 기도를 얼마나 했는지 말할 일이 있다면 ‘가난한 과부’(마르 12, 42)의 낮은 목소리로 한 마디만 하자. 내가 하느님과 얼마나 만났는지, 나와 하느님과의 사랑을 공개하는 것은 좀 그렇지 않은가? 세상에는 셀 수 있는 것보다 셀 수 없는 것이 훨씬 더 많다. 모든 것을 수량화해도 우리를 생명이게 하는 공기와 물, 흙과 바람을 어찌 셀 것인가? 하물며 그 분의 사랑을, 하느님과의 대화를 숫자화하는 어리석은 일은 없어져야 한다.

요즘은 개인이나 회사들도 좋은 날 하객들이 가져오는 선물을 미리 사양하는 공지를 낸다. 그리고 그런 정성을 가급적이면 다른 곳으로 보내달라고 양해를 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많은 좋은 날들, 성직자, 수도자들의 영명축일들, 서품행사들, 기념일들, 출판기념회 때 수많은 이들이 주는 물적 영적예물에 대해 그런 겸양의 덕을 보이는 것을 찾아보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물적 예물은 노숙자에게, 영적예물은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보내달라는 고위성직자를 상상하는 것은 불경스러움일까? 외상으로 이루어진 아라비아 숫자에 그대는 감동하는가? 교계신문이 새해에 한 번 나서 보시라.

 

김유철/경남민언련 이사, 경남도민일보 지면평가위원,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운영위원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