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60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는 곳마다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다. 그리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예수께서 군중을 보았을 때 그들을 측은하게 여겼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처럼 학대받고 지쳤기 때문이다. 그때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추수할 것은 많습니다. 그러나 일꾼이 적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추수하는 주인께 추수할 일꾼을 보내달라고 청하십시오.” (마태 9,35-38)

▲ 스페인 화가 무리요의 작품 ‘착한 목자 그리스도’(1660)
첫 구절은 예수의 활동의 전반적인 모습을 요약한다. ‘가르치고 치유하는’ 예수의 모습이 그 핵심이다. 방랑자 예수의 면모가 강조된다(마르 6,6-). 자비로운 목자의 모습은 마르코 복음서 6,34을 대본으로 했다. 예수가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실제로 순회한 것은 물론 아니다. “그들의” 회당에서 예수와 유다교의 벌어진 서먹함을 암시한다.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내진 예수의 사명과 운명을 마태오는 소개하는 것이다.

“목자 없는 양”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제자들에 대한 가르침의 첫 부분에 나타난다. 그런 측은지심이 제자의 제1덕목이다. 제자 됨은 원래(eo ipso) 다른 사람과 근본적으로 연결됨을 뜻한다. 예수처럼 우리도 이웃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라는 뜻이다. 신약성서 전체에서 감명 받은 단 한 구절을 고르라면 나는 이 대목을 기꺼이 선택하겠다. “그들을 측은하게 여겼다.” 예수처럼 우리도 이웃을 측은지심으로 바라보자.

“하느님 앞에 죄인으로서 내가 어떻게 설 것인가”라는 루터식 질문은 “그들을 측은히 여겼다”는 예수와 그 출발점에서 크게 다르다. 가난한 사람을 먼저 주목하고 결국 자신을 성찰하는 방식이 그리스도교의 특징이다. 나를 알고 남에게 나가는 순서보다 남을 눈여겨보고 그래서 자기를 돌아보는 방식이겠다. 내 눈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정작 내 눈 자체를 볼 수 없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자비는 병자와 약자의 아픔에 동감하는 모습(14,14; 15,32; 20,34), 사람들에 대한 태도(18,27; 33장)로 소개된다. 오늘의 단락에서 예수의 자비는 우선 이스라엘 백성에게 향한다(10,6; 15,32). 로마 군대에게 식민지 지배를 당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예수에게 측은한 동족이다. 그런 로마 군대에 빌붙어 자기 이익을 유지하는 종교지배층이 예수에게 얼마나 미웠을까. 불의한 권력에 아부하여 이익을 챙기는 종교지배층이 어찌 남의 나라 일이요 과거만의 일일까.

“목자 없는 양”은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비유다(민수 27,17; 2역대 18,16; 에제 34,5).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당시 종교지배층을 비판하는데 예수는 그 비유를 사용했다. 예수의 이러한 종교비판을 그리스도교 설교에서 흔히 지나쳐 버린다.

목자 없는 양도 안타깝지만 ‘악한 목자’는 더 큰 문제다. “화를 입으리라! 양떼를 버리는 악한 목자야”(즈카 11,17)를 예수는 연상하는 것 같다. 착한 목자는 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지만 악한 목자는 자기 욕심을 채우려 양을 이용한다. 오늘 그리스도교에서 악한 목자들이 큰 골칫거리다. 예수가 오늘 악한 목자를 보면 뭐라 말씀하실까.

‘목자와 양’ 비유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 ‘지배와 복종’ 논리로 잘못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첫째, 목자는 양을 위해 희생하라는 것이지 양을 지배하라는 것이 아니다. 양을 지배하려는 목자는 악한 목자다.

둘째,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누구나 목자다. 성직자를 목자, 신자를 양이라고 구분할 필요는 없다. 신자가 목자, 성직자가 양일 수 있다. 성직자를 지배층으로 신자를 피지배층으로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예수를 따르는 사람 사이에 어떤 계급 차별도 있을 수 없다. 직분의 차이가 계급 차이를 뜻하진 않는다. 교회 안의 직분은 서로 봉사하고 희생하는 의무만 갖는다. 그 외 어떤 ‘지배와 복종의 구조’도 예수와 거리가 멀다. 사람들을 측은하게 보는 마음에서 어찌 지배와 복종의 논리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

그러나 슬프게도 가톨릭교회에서 목자를 성직자로, 양을 신자로 차별하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고대 왕조정치의 유물인 그런 모습은 영원히 간직할 모범이 아니라 어서 고쳐야 할 개혁 대상이다. 개신교에서 ‘주의 종’을 곧 목회자로 동일시하여 성도(聖徒)들과 차별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성도 역시 ‘주의 종’이다. 장로, 권사 등 직분을 ‘종신제’로 하는 성도 사이의 차별은 개신교 근본정신과 거리가 멀다. 예수를 따르는 모든 사람이 서로에게 목자요 또한 양이다.

제자들에게 행동하기 전에 기도하도록 요구하는 것은 예수의 특징이다. 기도하지 않고 행동하는 사람은 준비 없이 가르치는 교사와 비슷하다. 흔히 이른바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기도를 우습게 여기는 경향이 존재한다. 해방신학자들처럼 진지하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나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관심이 깊어질수록 기도는 더 절실해진다.

목자에서 자비라는 개념을 이끌어냈는데, 심판이라는 “추수”를(이사 9,2; 27,12; 호세 6,11) 마태오는 등장시킨다. 심판이라는 주제에 마태오는 익숙하다(마태 3,12; 13,39). 추수 일꾼은 ‘천사’를 가리킨다(마태 13,41; 24,31). ‘목자’에서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이 강조되었다. 그러나 ‘추수’에서 심판이라는 두려운 모습이 강조된다. 마태오는 그 둘 사이의 긴장된 모습을 해소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둔다.

자비로운 목자로서 하느님, 심판자로서 하느님의 아들―두 상반된 분위기가 복음서 전체에 흐른다. 우리 믿음 전체에도 역시 그러할 것이다. 자비를 강조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심판을 축소하지 말아야 한다. 개신교가 새길 말이다. 하느님의 심판을 강조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비를 잊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이 새길 말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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