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6]

하느님의 무상성(無償性)

▲ ‘그리스도와 사마리아 여인’(세부), 두초의 작품(1311년)
하느님에서 출발하여 인간을 이야기할 수도 있고, 인간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을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계속해서 다투는 문제이다. 예수는 그 문제 앞에 양자택일하는 식으로 해답을 제공하지 않았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에게 이르는 수직적 관점을 요구하지 않고, 인간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을 생각하는 수평적인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하는 일이다. 하느님이 인간 안에 함께 계신다.

하느님이 인간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은 두 가지 해석을 요구한다. 율법과 같이 하느님에서 시작하는 인간 삶에 대한 해석이 있고, 또 한편으로, 야훼, 아버지와 같은 호칭과 같이 인간에서 시작하는 하느님에 대한 해석이 있다.

예수는 그 두 가지 해석 중에서 하나를 택하지 않고,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유지한다. 한편으로는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고,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주신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안다면”(요한 4,10).

하느님은 베푸심이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을 찾아 헤매는 목자와 같고, 잃어버린 은전을 찾는 여인과 같고,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와 같다. 하느님은 사람들을 잔치에 초대하는 사람과 같고(루카 14,16-24), 보수를 많이 주는 선한 포도원 주인과 같으며(마태 20,1-16), 종들에게 자기 재산을 맡기는 사람과 같다(마태 25,14-30).

그러나 또 한편, 예수는 그런 하느님 앞에 사람들이 피동적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람이 하느님의 나라를 찾아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루카 11,9).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야 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루카 13,24). 사람은 자기가 받은 것을 활용하여(내어주어서) 값지게 만들어야 한다(마태 25,14-30). 사람은 주인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는 종(루카 12,41-46)과 같이 하느님을 기다리는 자세로 살아야 하며, 혼인 잔치에 들어갈 것을 기다리는 처녀들과 같이 슬기롭게 살아야 한다(마태 25,1-13). 슬기로운 처녀들(마태 25,4)은 말씀을 듣고 실천하여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마태 7,24)들이다.

모든 예언자들이 하였듯이, 예수는 하느님의 주도권을 강조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맺은 계약(탈출 3,12; 15; 33,19)에서 이해된다. 성서의 하느님은 인간이 정복하여 소원 성취하는 대상이 아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자유로 사람을 찾아오고 교섭하신다. 하느님이 베푸신 것을 강조하는 예수의 말씀은 예언자들의 것과 같은 맥락 안에 있다.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오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그만큼, 또한 인간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놀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혹은 무엇을 마실까 혹은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시오. 이런 것은 다 이방인들이 힘써 찾는 것입니다. (마태 6,31-32)

복음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베푸셨다는 사실을 긍정하면서, 동시에 인간 체험의 어떤 순간에 실현되어야 하는 구체적 의미를 보여주려 한다.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추상적으로 말하고, 그 하느님이 인간의 삶을 위해 지니는 의미를 잊어버리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이 움직이고 변할 때, 그 중요함의 뜻이 구체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무상성에 입각한 놀이

하느님은 놀이를 발생시키는 분이다. 놀이가 발생하지 않으면,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서 그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우리의 생활에서도 삶이 지닌 놀이들이 사라지거나 뒤바뀌면, 삶의 의미가 함께 사라진다. 예를 들어 며느리 된 사람이 시댁에서 하는 놀이가 있고, 그 며느리가 친정에 가서 하는 놀이가 있다. 그 두 놀이가 혼동되거나 뒤바뀌면, 삶이 혼란스러워지고 많은 의미들이 상실된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놀이가 발생하면, 우리가 평소에 소홀히 하던 무상성(無償性)이 나타난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의 선물을 안다면”(요한 4,10).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말씀이다. 하느님이 베푸신 성령으로 말미암은 생명이 있다는 말씀이다. “선하신 선생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서 접근하는 사람에게 예수는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마르 10,8)라고 말씀하신다. 선하신 하느님으로부터 시작된 무상성의 놀이, 곧 선한 놀이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이 무상성의 연장선상에 하느님을 본다. 하느님이 베푸시는 분으로 보이고, 우리의 생존이 그 베푸심의 결과로 보이면,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놀이가 시작한 것이다. 루카 복음서(17,11-19)는 나병에서 치유된 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중 한 사람만 돌아와서 예수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린 사실을 지적한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병이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느님을 찬양하며 돌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감사를 드렸다”(15-16). 열 사람이 베풂을 받았지만, 그 무상성을 하느님과 연결시켜 놀이를 발생시키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라는 것이다.

그 놀이가 발생할 때, 우리 삶의 여백(餘白)에 있던 무상성이 재평가되어 우리 삶의 본문 안으로 들어온다. 그것이 이 세상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실재(實在)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실존의 무상성을 경험하고, 그 무상성에 입각하여 우리의 놀이를 발생시킬 때, 우리가 발견하고 체험하는 상징적 무상의 실재이다. 유교가 중요시하는 효(孝)는 설득력 있게 그 무상성을 알리는 표현의 하나이다.

상징은 우리 삶에 놀이를 발생시키는 실재이다. 불교의 용어인 갈애(渴愛)가 의미하는, 우리 일상의 애착에서 벗어나, 우리가 자유로울 때, 비로소 체험할 수 있는 실재이다. 예수는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시오, 작은 양떼여! 사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는 여러분에게 기꺼이 나라를 주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여러분의 재산을 팔아 자선을 베푸시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해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시오. … 사실 여러분의 보물이 있는 곳, 거기에 여러분의 마음도 있습니다. (루카 12,32-34)

성서가 하느님을 이해하는 방식은 하느님이라는 단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방식이 아니다. 많은 사람에게 우리 삶의 여백에 밀려나 있는 무상성은 하느님을 상기시키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선택이다. 유대교가 한 선택이며 또한 예수가 한 선택이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먼저 무상성이다. 하느님은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은 무상성이고, 새로운 놀이를 발생시키는 분이다.

사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자로서, 사도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몸입니다. 하느님의 교회를 박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보다도 애를 많이 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있는 하느님의 은총이 한 것입니다. (1코린 15,9-10)

성서의 신앙은 놀이를 발생시키는 실천적인 것이다. 우리가 지향하는 통속적 질서, 곧 인과응보, 상선벌악, 입신양명, 명철보신(明哲保身) 등을 넘어서 나타나는 가능성이다. 그 놀이는 공로와 보상을 모른다. 그 놀이에는 무상성이 보인다.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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