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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민주화 이후 한국교회의 진단 4.통일: ‘민족화해 사목’에 대한 비판적 성찰
1. 1987년 이후 한국천주교의 민족화해 사목 개괄

한국교회는 1984년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행사’를 준비하는 가운데 북한 교회에 대한 관심을 새롭게 하여 기념사업부 안에 ‘북한선교부’를 설치하고, 행사 후에도 이 기구를 주교회의 상설 기구로 존속시켰다. ‘북한선교부’는 1985년에 그 명칭을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로 바꾸고 주교회의 전국 위원회로서의 위상을 갖추게 되어, 그 후 지속적으로 기도 운동과 계몽 운동을 전개하면서 한국교회의 대북선교 및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준비 작업에 착수하게 된다.

한편 북한에서는 1988년 6월에 ‘조선천주교인협회’(2000년 1월부터 명칭을 조선카톨릭교협회로 변경함)를 창립하여 대외적인 창구 역할을 맡게 하고, 같은 해 10월에 평양 ‘장충 성당’을 건립하는 등 커다란 변화를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평양을 방문하는 남한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평양 장충 성당을 찾아 미사를 봉헌하고, 북한 신자들과 교류를 갖기 시작하여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남북한 교회의 접근과 교류 가능성이 모색되기에 이른다.

1995년 4월 예수 부활 대축일에 한국교회의 교회법으로 공포된 ‘한국 천주교 사목 지침서’ 제200조에 따르면 “북한 선교는 분단된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형제적 나눔을 실현하면서 민족의 평화통일에 대비하여 북한 교회의 부흥과 북한 동포의 복음화를 위한 사목적 역량을 갖추는 교회의 활동”임을 밝히고, “매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에 특별히 신자들에게 북한 교회에 관한 관심을 촉구하고, 각종 행사를 통해 북한선교의 필요성과 그 성과를 알린다.”(202조), “각 교구의 형편에 따라 북한선교위원회를 두어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와의 유기적 연관 속에 활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203조 1항)하며, “모든 신자들은 북한선교위원회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사목자는 이를 본당 사목의 차원에서 뒷받침할 수 있는 참여 방안을 강구토록 한다.”(203조 2항)는 점을 밝혔다.

또한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는 1995년 추계정기총회에 상정했던 통일문제에 관한 한국교회의 입장을 총회 후 ‘민족의 화해와 평화통일을 위하여’라는 지침서로 발표하여 민족화해에 관한 사목적 방향을 전향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광복 50주년을 맞이하여 한국 천주교 주교단이 발표한 지침서란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이 지침서는 ‘분단 고착과 민족 사회 분열에 대한 참회’,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교회의 노력’, ‘북한 교회에 대한 인식’, ‘통일의 복음적 원리와 실천적 지표’ 등을 담았으며, 특히 북한 교회와 관련하여 “1988년 6월에 평양에서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되고 같은 해 10월에 평양 장충성당이 건립된 사실에 주목하고, 우리 한국천주교회 역시 분단의 역사 속에서 북한 사회의 특수성과 역사성을 겸허히 수용한다는 측면에서 이에 대한 깊은 관심과 사목적 기대”(13항)를 가지고 있음을 밝히고, “북한에 실존하는 신앙 공동체가 한국천주교회와 참된 일치를 이루며, 하루빨리 교황청과 일치를 이루어 세계 가톨릭교회 공동체에 몸담고 교계 체제를 갖춘 교회로 회복될 수 있기를 간절히 염원”(15항)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이와 더불어 1995년에 접어들면서 서울대교구는 민족화해위원회(이하 민화위)를 설치하여 남북한 교회의 화해와 교류를 시도하는 전기를 마련하기에 이른다. 민화위는 당시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를 함께 맡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의 방북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조선천주교인협회 관계자들과의 공식 접촉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3년 후인 1998년 5월에 교구장을 대신한 최창무 주교 일행의 방북을 성사시켜 남북한 교회 간 교류·협력의 가능성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이후 민화위는 교회 내에서 민족화해에 대한 신자들의 의식을 계발하고 교육하기 위해 민족화해 학교를 개설하는 한편, 민족화해를 위한 미사를 매주 봉헌했으며, 수재로 고통 받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대북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새터민들을 위한 사목활동을 활발히 진행하고 있다.

한편 주교회의는 1997년 10월에 개최된 추계정기총회에서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는 한국교회가 남북한 화해와 대북지원 사업 등 북한 문제를 전체 교회의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다루기 위해 주교들로 구성되는 특별 기구를 설치한 것이란 점에서 당시 교회안팎의 관심을 모았다. 당시에 민족화해주교특위는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이문희 대주교, 장익 주교, 최창무 주교, 이동호 아빠스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12월 4일 첫 회의를 개최하여 김수환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교회 안팎의 대북관련 정보를 수집 정리하여 대북 정책수립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특위는 IMF로 어려운 상황이더라도 북한동포돕기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분기별로 모임을 갖기로 했지만, 이후 특위 나름의 구체적인 사업전개 노력을 보이지는 못하고 있다.

서울대교구 민화위는 1999년 7월 15일 북한선교를 지향하는 차원에서 대북지원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교회 내 기구들의 상호정보 교환을 목적으로 네트워크 구성 모임을 마련하였다. 첫 번째 이 네트워크모임에는 서울, 광주, 수원, 안동, 인천, 춘천, 마산 교구와 15개 수도회, 그리고 정의구현전국사제단과 미국 뉴저지 오렌지성당 박창득 신부 등이 참가했다. 이 모임에 참가한 교회 내 관련기구들은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앞으로 교회 내에서도 대북지원의 일관성과 효율성을 기하도록 의견을 교환하고 협력 체제를 구성키로 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교회 내 민족화해 운동의 결집된 통합력을 이루려 했다. 이후 이 네트워크모임은 주교회의 민화위 주관하에 매년 개최되고 있다.

1999년 10월에 개최된 주교회의 추계정기총회는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의 명칭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로 변경했다. 이와 함께 주교회의 민화위는 전국 교구와 수도 단체 대표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각 교구에 민족화해 담당사제들을 두도록 요청하고, 이들 간의 협력 시스템을 구축하여 주교회의 차원의 민화위 운영 기능을 강화하는 한편, 민족화해 운동 전개와 대북지원 및 대북선교 관련 정보를 서로 공유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각 교구와 본당에서 민족화해에 관련된 제도적 장치 마련과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다. 또한 2000년 춘계 주교회의는 민족화해위원회의 활동방향을 논의하면서 특히 “남녘 14교구와 북녘 시·도와의 자매결연”할 것을 재확인하고 결연지역을 위한 기도와 후원을 강화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대한 후속작업은 현재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그 후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는 대북지원 사업의 효율성 제고를 위하여 통일부에 대북지원 사업자(독자 창구)로 지정하여 줄 것을 신청하였고, 이에 통일부에서 2002년 6월 10일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를 “인도적 대북지원 사업 처리에 관한 규정” 제3조(대북지원 사업자의 지정)에 따라 대북지원 사업자 지정하였으며, 이로써 각 교구 민족화해위원회는 물론 남녀수도회장상연합회 차원에서 대북 지원을 할 때에 주교회의 민화위를 창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현재 통일부에서 승인한 천주교 대북지원 사업자는 주교회의 민화위 외에 서울교구 민화위가 있다. 이를 통해 한국교회는 대북 지원 활동 방향을 긴급구호의 차원에서 지속적인 영농구조 개선으로 전환하는 등 보다 중장기적인 목표를 앞세워 대북지원 활동의 내실을 기해 나가는 방향으로 접근하려 하고 있다.

한편 한국천주교회는 새터민들에 대해서 적극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98년 민족화해주교특별위원회 위원 주교들은 2차 회의에서 정보가치가 있는 탈북자들에게만 관심을 갖고 입국하게 하는 우리 정부의 태도에 우려를 표하고, 모든 탈북자에 대한 적극적이고 폭넓은 정부의 노력을 촉구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교회는 이들에 대하여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이기로 결정하였다. 1999년 5월부터 천주교 북선위는 ‘탈북 난민 보호를 위한 유엔 청원 서명 운동’을 전개하여 전국 각 본당, 수도단체, 학교, 병원, 기관 등에 동참을 호소했다. 그 해 7월부터 이선중, 오혜정 수녀(영원한 도움) 등이 하나원 종교실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0년 6월에는 주교회의 민화위에 ‘북한 이탈주민(현재 새터민)지원 소위원회’가 구성되어, ‘대북지원 소위원회’와 함께 민화위의 두 가지 주요 사업을 진행하게 된다. 새터민 지원 소위회의에서는 새터민을 위한 각 교구 활동, 새터민 현황, 각 교구 연결 현황, 새터민지원소위원회 활동 계획 등을 공유하며, 교회 안팎의 새터민 지원 활동과 그 문제점을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있다. 2000년 11월부터는 위의 두 수녀가 대성공사에서 새터민을 위한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 후 두 차례 새터민 지원 사목에 관한 심포지움을 거쳐, 새터민 지원 사목은 전국 교구로 지속적으로 확대되어 현재는 전국 교구 민화위와 수도회 민족화해 사목의 대표적인 사업으로 자리 잡고 있다.

2. 한국천주교 민족화해 사목에 대한 분석·평가틀

위에서 개괄적으로 살펴 본 1987년 이후 한국교회 민족화해 사목을 제대로 분석·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그러한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분석·평가틀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한신대 강인철 교수가 제시한 통일 운동 유형 분석틀을 소개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국교회 민족화해 사목에 대한 평가 작업을 시도하고자 한다. 강인철 교수는 그의 논문 ‘북한 복음화를 위한 방안’ 등에서 한국천주교 통일운동의 네 가지 이념형적 유형들을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 민족교회운동적 접근: 교회재통합에 대한 관심과 준비의 정도 그리고 민족재통합에 기여하려는 의지의 정도가 모두 높은 운동 방식이다.

(2) 정교분리적 교회재일치운동: 교회재통합에 대한 관심은 강하나 민족재통합에 기여하려는 의지는 약한 운동 방식이다.

(3) 단계론적 통일지상주의운동: 교회재통합에 대한 관심은 약하나 민족재통합에 기여하려는 의지는 강한 경우이다.

(4) 행동의 결여 혹은 무관심: 교회재통합에 대한 관심과 민족재통합에 기여하려는 실제적인 의지 모두가 약한 경우이다.

강 교수는 위의 네 유형에 두 가지 새로운 변수들을 도입하여 위의 분석틀을 좀 더 정밀하게 제시하는데, 그 핵심적인 변수는 ‘북한의 신자공동체에 대한 태도’, 그리고 ‘북한 당국에 대한 태도’의 두 가지이다. 다시 말해 북한교회에 대한 태도가 배제적 혹은 포용적인가, 그리고 북한 당국의 존재에 대해 승인 혹은 불승인의 태도를 취하는가에 따라 남한교회가 선택하는 교회 및 민족 재통합 전략 내지 운동 방향에서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북한의 천주교 신자 혹은 교회에 대한 태도가 배제적이냐 혹은 포용적이냐에 따라 교회의 재통합을 위한 전략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1) (남한교회 주도의) 재건주의: 교회의 재통합에 대한 관심과 준비의 정도는 높으면서도 북한의 천주교 신자 혹은 교회에 대한 태도는 ‘배제적인’ 경우, 교회 재통합의 노선은 북한 교회 및 신자들의 정통성(orthodoxy)과 진실성(authenticity)을 무시하고 남한교회가 일방적으로 주도하는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교회 재통합 전략은 일단 ‘재건주의’로 명명될 수 있을 것이다.

(2) (북한교회와의) 협력주의: 반면 북한교회에 대한 태도가 ‘포용적인’ 경우, 교회 재통합 노선은 북한교회와의 평등한 협력을 강조하고 상대적으로 소규모이고 자생력이 약한 북한교회를 남한교회가 지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 전략은 ‘협력주의’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북한 당국에 대한 태도에 따라서도 신자와 교회가 민족 재통합에 기여하고자 하는 방식은 크게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 북한 당국에 대한 태도라 함은 북한 당국의 통치권이라는 기존 현실을 인정하고, 민족통일의 과정에서 부단히 접촉하고 대화해야 할 파트너로 그들을 인정하는가의 여부를 가리킨다.

(3) 멸공 혹은 흡수통일 노선: 북한 당국에 대해 ‘불승인’의 태도를 취하는 경우, 남한교회의 민족재통합 노선은 주로 ‘멸공통일’ 혹은 ‘흡수통일’의 방향으로 나타날 것이다.

(4) 평화 혹은 점진적 통일노선: 반면에 북한 당국에 대해 ‘승인’의 태도를 취할 경우, 민족 재통합에 대한 남한교회의 개입방식은 ‘평화통일’ 혹은 ‘점진적 통일’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다.

강인철 교수는 이와 같은 분석틀을 제시하는 가운데 지난 반세기 동안 교회 및 신자들의 분단체제에 대한 대응방식과 통일방식의 시대별 특성을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첫째, ‘대체로 1960년대까지는 천주교의 통일운동은 어떤 것이든 분단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970∼1980년대의 20년 동안은 분단체제의 공고화에 기여하는 통일운동과 그것의 해체에 기여하는 통일운동이 혼재했던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는 천주교 통일운동은 어느 것이든 분단체제의 해체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둘째, 또한 현재 우리 교회에서 민족 및 교회의 재통합 과제를 균형 있게 추구하는 ‘민족교회운동’이 대세를 이루고 있음은 분명하다고 보며, 민족의 재통합을 위해서도 ‘평화통일’ 혹은 ‘점진적 통일’의 관점이 비교적 확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본다. 특히 ‘민족교회운동’이 확고한 대세로 자리 잡은 것은 서울대교구 민화위가 정식으로 출범하고 주교회의 북한선교위원회가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위하여”라는 선언문을 발표한 시점이자, 해방 50주년이 되는 1995년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고 본다.

셋째, 교회의 재통합을 위한 전략 면에서는 남한교회의 일방적 주도성을 강조하는 ‘재건주의’ 노선과 북한 신자들과의 수평적 ‘협력주의’ 노선이 아직도 혼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3. 한국교회 민족화해 사목에 대한 비판적 성찰

필자는 상기한 강 교수의 평가에 대해 대체로 동의하나, 두 가지 점은 더욱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첫째는 한국교회 내에서 과연 ‘평화통일’ 노선이 확고하게 자리 잡았는가하는 것이고, 둘째는 1990년대 이후 천주교 통일운동이 과연 어느 것이든 분단체제의 해체에 기여하고 있는가하는 것이다.

3.1.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평화통일 노선

우선 한국교회 내에서 ‘평화통일’ 노선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는가하는 문제이다. 강 교수가 언급했듯이, ‘평화통일’의 노선이란 ‘북한당국의 통치권이라는 기존 현실을 인정하고, 민족통일의 과정에서 부단히 접촉하고 대화해야 할 파트너로 그들을 인정’하는 자세 내지 태도를 가리킨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아 보인다. 2005년 주교회의 민화위에서 평신도·수도자·성직자들을 대상으로 <북한과 통일에 대한 인식>에 관한 설문조사가 있었다. 그 중 “통일이 이루어져야 한다면 통일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물음에 대해, 평신도들은 ‘남한의 점진적 흡수통일’(53.5%), ‘남북한이 대등한 형태로 통일’(39.1%), ‘남한의 신속한 흡수통일’(5.4%), ‘기타’(1.1%), ‘무력이나 전쟁을 통해서라도 통일’(0.8%) 등의 순으로 답하였다. 이 질문에 대해 수도·성직자들은 ‘남북한이 대등한 형태로 통일이 되어야 한다’(성직자: 52.8%, 수도자: 52.6%)는 것과 ‘남한의 점진적인 흡수통일’(성직자: 41.5%, 수도자: 40.3%)에 비슷한 수준으로 응답하였다. 이 조사에 의하면, ‘평화통일’ 노선과 ‘흡수통일’ 노선의 비율은 평신도의 경우 40:60이며, 수도·성직자의 경우 50:40의 수준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한국교회 내에서 ‘평화통일’ 노선이 아직 확고하게 자리 잡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증명하는 것이다.

“교회의 재통합을 위한 전략 면에서는 교회 안에 ‘재건주의’ 노선과 ‘협력주의’ 노선이 혼재하고 있다.”는 강 교수의 평가는 다름 아닌 위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 여겨진다. 재건주의 노선과 협력주의 노선의 혼재는 다름 아닌 우리 교회 안에 양자 간의 갈등과 대립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주지하듯이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는 북한 실상에 대한 이해와 관련해 이른바 수구와 진보 사이에 대립의 각이 보다 더 심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이를 테면 북한 사회의 변화, 북한 인권문제, 대북지원 문제, 북한 핵문제 등과 관련해 양측은 의견을 달리하고 있으며 사안에 따라서는 극한 대립과 갈등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또한 이러한 추세에 있어 우리 교회도 예외가 아님은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와 같은 현실을 초래한 원인은 여러 가지로 설명될 수 있으며, 주요 원인들 가운데 하나가 ‘성직자·수도자의 대북인식 및 태도’이다. 다시 말해서 평신도들의 북한에 대한 올바른 인식 및 이해를 도모하는 데 있어서는 성직자·수도자의 역할이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성직자·수도자들 사이에서도 대북인식 및 태도에 있어 대립적 양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대북인식에 있어 평신도들 사이에 혼란이 빚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북한복음화와 관련해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성직자·수도자들 사이에서 가능한 한 대립적 양상을 지양하며 평신도들로 하여금 북한실상에 대한 인식 및 이해에 있어 객관적이고도 균형 있는 시각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위의 설문조사에서 보면, 평신도들은 “우리 교회내의 일치”를 북한복음화 준비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 수도·성직자들은 우선적으로 한국교회의 주교들의 북한 복음화에 대한 관심제고와 주교들 사이에서 이 문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작업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민족화해 사목에 있어서 교회 주교들의 관심과 태도는 실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위의 설문 조사는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3.2. ‘재건주의’로 회귀하고 있는 민족화해 사목

강 교수는 1995년 이후 한국교회의 민족화해 사목의 대세는 ‘평화통일’론에 기초한 ‘민족교회운동’이라고 보면서 1990년대 이후는 천주교 통일운동은 ‘어느 것이든 분단체제의 해체에 기여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고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게 보인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 몇몇 주교들과 한국 평협 등의 평신도 지도자들은 ‘흡수통일론’에 기초한 ‘재건주의운동’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세는 민족화해 사목의 시대적 흐름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교회 평신도·수도자·성직자들의 요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위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평신도의 약 73%가 교회의 대북지원에 대해 긍정적이며, 주교회의에 대해 선교물품을 비롯한 대북 인도적 지원 강화, 대북지원 현황 및 향후 계획 관련 정보·자료 제공 등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남북 천주교회간의 교류와 협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성직자와 수도자의 응답을 보면, ‘북한 복음화의 씨앗을 뿌린다는 차원에서 점진적으로 교류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는 응답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성직자: 60.4%, 수도자: 59.7%), ‘우리가 판단하지 말고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노력’해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응답자가 뒤를 이었다(성직자: 32.9%, 수도자: 34.7%). 반면에 북한의 천주교회는 북한정부의 일군에 불과하므로 교류협력이 의미가 없다는 의견은 거의 없는 것(성직자: 1%, 수도자: 0.4%)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교회 구성원 다수는 남북 천주교회간의 교류와 협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반해, 주교회의 뿐만 아니라 각 교구의 민족화해 사목의 방향과 정책은 이와 역행하고 있는 표징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한 예로, 남·북 천주교회간의 교류와 협력은 점점 축소되고 이에 따라 교회의 대북 지원 사업의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반면 새터민 지원을 위한 사목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25) 위의 설문조사의 응답 가운데 ‘북한의 천주교회는 북한정부의 일군에 불과하므로 교류협력이 의미가 없다’는 의견은 응답한 전체 성직자의 1%를 차지하고 있는데, 아래의 몇몇 사례를 통해 볼 때, 여러 주교들과 평신도 지도자들은 이런 의견을 견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2-1. 허용되지 않은 북한신자 영성체

2007년 5월초에 KCRP와 함께 평양을 방문했던 남측 천주교 대표단(배영호신부, 변진흥, 양덕창 등)은 5월6일 주일에 평양 장충성당을 방문했다. 그런데 이 날 남측 대표단은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지 못했다. 그 당시 현장에 있었던 남·북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남한 교회의 사제가 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신자들과 함께 평양 장충성당을 방문했는데, 방문한 남측 사제가 주일미사에 참석한 북한 신자들에게 ‘안타깝게도 영성체를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고 한다. 배영호 신부는 주교회의 사무처장 신부(2006년 5월 임명)로써 당시 북한 방문이 그의 첫 번째 방문임을 고려해 볼 때, 또한 당시 그러한 입장을 표명하면서 대단히 유감스러워 했다는 점에서, 배 신부의 위와 같은 태도는 정진석 추기경을 비롯한 남측 주교들의 대북관 내지 북한 교회관을 대변한 것이라 보여 진다. 이러한 남한교회 관계자들의 입장과 태도에 대해 평양 장충성당 관계자들은(김영일 장충성당회장, 이산옥 여성회장 등) 강력히 이의를 제기했다. 김영일 회장은 평소 유순하고 인자한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그의 강력한 항의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며 특히 남측 천주교회 여러 인사들과 1995년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이산옥 여성회장은 이날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자신의 아픈 심정을 드러냈다. 즉 남측 교회의 이러한 태도는 북측 교회의 현실적 상황과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일방적인 결정이라는 것이다. 장충성당 건립이래로, 바티칸 국무원의 성직자들이 여러 차례 장충성당을 방문하고 물적 지원까지 했으며, 남쪽에서 장익, 최창무 주교 등과 수많은 신부들이 와서 미사를 봉헌하고, 북측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주는 것에 아무런 장애도 문제도 없었는데, 왜 이제 와서 문제를 제기하느냐는 것이다. 남측 사제들이 북측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 주지 않겠다면 당신들이 장충성당에 와서까지 미사를 드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결국 양자는 합의를 보지 못해 남측 대표단은 장충성당 김영일 회장이 진행하는 공소예절에 참례하는 것에 그쳤다.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갈등의 이유와 원인에 대해서 남한 천주교회는 실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하고 반성해야 한다. 이러한 갈등은 실로 북한 내에서의 변화로 인한 것이 아니라 북한교회에 대한 외부 즉 남쪽 제도교회의 평가가 달라진 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북한교회 관계자들은 이를 이해하고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변화와 갈등 표출은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고 있는 서울 대교구 교구장의 현실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제도교회의 속성상 다른 교구의 성직자들도 이를 존중하는 것이 제도교회의 관행임을 보여준 결과이다.

3-2-2. 의심받는 북한 신자들의 진실성

남측 교회에서 북한 신자들에게 영성체를 허용하지 않은 이유는 남측 교회의 주교들이 북측 교회 신자들의 진실성을 의심하기 때문이다. 서울교구 민화위(당시 위원장 오태순 신부 등)는 1995년 북경에서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를 함께 맡고 있던 김수환 추기경의 방북을 성사시키기 위해 북한 조선천주교인협회 관계자들과의 공식 접촉을 시도했으며, 그 결과 3년 후인 1998년 5월에 교구장을 대신한 최창무 주교 일행의 방북을 성사시켜 남북한 교회 간 교류협력의 가능성을 본격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1998년 6월 18일(목)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제2소회의실에서 열린 제3차 민족화해 주교특별위원회 회의에는 위원장 김수환 추기경, 위원 윤공희 대주교, 장익 주교, 최창무 주교, 이동호 아빠스, 사무총장 김종수 신부가 참석한 가운데, 최창무 주교가 5월 방북에 대해 보고하였다. 최창무 주교는 우선 “김수환 추기경이 평양교구장을 맡고 있는 만큼, 이번 방문은 추기경을 대신한 사목 방문의 성격을 지녔다는 것”을 언급했다. 최 주교 일행은 미사는 장충성당에서 세 차례 봉헌했는데, “거기에 참석한 신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매번 다른 사람들이었고 동원된 사람들인 것 같았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영성체를 하였다.”고 진술했다. 북한 측은 김 추기경의 방문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최 주교는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김 추기경님이 오시면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또한 북측 천주교인들이 최 주교에게 견진성사도 요청하였는데, 최 주교는 “영세 문서를 확인해야 줄 수 있다고 하고 영세 문서가 있는지 확인하려 하였으나 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잠겨 있는 사무실의 열쇠가 없어 열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나도 견진성사를 줄 수 없다고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들은 어떻게든 신자 수를 늘리려고 한다. 차성근이 강지형(42세)이라는 사람에게 바오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데, 그들은 간부 양성 차원에서 세례를 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교우 가족들의 생사 확인을 요청하기도 하였으나 확인할 수 없었다.”고 보고했다. 이러한 최창무 주교의 보고로부터, 당시 서울교구 민화위 담당 주교이자 주교회의 민족화해 주교 특별위원인 최창무 주교의 대북관 내지 북한 교회관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신자는 동원된 것 같다.’ ‘간부 양성 차원에서 차성근(장충성당 당시 평신도 회장)이 강지영(현부위원장)에게 세례를 준 것 같다.’ ‘영세 문서를 확인할 수 없으니 견진성사를 줄 수 없다.’는 등의 보고를 통해 볼 때, 최 주교는 북한 교회에 대해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북한에는 현재 약 3,000여명의 천주교인이 존재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은 1989년부터 신자 찾기 운동 사업을 전개하였다. 1989년 1월 ‘조선천주교인협회’가 결성된 후 천주교인협회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사업은 지방조직을 확대하면서 전국에 산재한 천주교 신자들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또한 1992년 장충성당 건립 후 일본의 소마 주교와 중국 지상교회 종화이더(宗懷德) 주교가 방북하여 세례를 주었으며, 그리고 미국에 거주하는 박창득 신부 등의 남측 사제들이 북한을 왕래하며 세례를 준 적이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북한 천주교인의 정체성과 진실성에 관한 태도 표명은 실로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주교회의 민화위가 주최한 2005년 제 8차 민족화해 가톨릭 네트워크 심포지움에서 민화위 전문위원들(임순희, 임강택, 윤여상 등)은 장충성당 미사 집전 문제를 ‘북한 천주교회를 어떻게 관리해 나가야 할 것인가?’하는 큰 틀 속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음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이들은 우선 장충성당 미사집전 문제를 비롯한 북한 교회문제에 대해 남측 교회가 구체적으로 논의하고 고민하고 있는가? 더 나아가 북측 종교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남측교회의 진정한 노력이 있었는가하는 것들을 먼저 반성할 필요가 있음을 지적했다. 즉 북측은 그동안 보편교회와의 연계를 위해 나름대로 천주교를 공부하며 준비해 왔으며, 일정 제약 안에서도 나름대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반면 그동안 남한 천주교회는 장충성당 신자들에 대해 그들이 신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공식적으로 요청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세례주장에 대한 인정여부를 논의하는 공론과정도 없었고, 미사집전 외에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지도하거나 제공하지도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별다른 문제제기도 없다가 갑자기, 방북한 남측사제가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지 않는다고 할 때, 북측의 반발은 물론 남측 내에서도 많은 논란꺼리가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남측 천주교회는 자기 성찰과 북측의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북한 교회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도록 장기적인 관점에서 설득력 있는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장충성당 신자들에 대해 신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 즉, 예비자 교육과 관련된 자료들(교육내용, 시간, 강사), 세례대장, 견진대장, 판공성사, 교적 등을 장충성당 측에 요청하여 신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선행 작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또한 장충성당의 각종 전례 및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위해 명확한 지침과 규정을 제시하여 그들을 지도해 나가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해서, 남·북 천주교회가 함께 대화하고 교류를 진행하여야 하며 또한 남측 교회는 북측의 예비자 교리교육 수준·절차·내용, 그리고 세례대장의 관리 수준, 대장의 신뢰성 등에 대한 종합적 판단을 기초로 미사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본다.

이러한 민화위 평신도 전문위원들의 제안은 비록 남측 교회가 주도하여 북한 교회를 재건하려는 ‘재건주의’의 입장과 흡사하고, 또한 북한 헌법에서 규정한 ‘외세 불간섭’ 방침에도 어긋나지만, 무조건 남측사제들이 장충성당에서 미사를 하지 못하게 하거나, 방북한 남측사제들이 북한 신자들에게 성체를 영해주지 않게 하는 한국 몇몇 주교들의 일방적 처사보다는 더욱 복음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북측과 대화하고 타협하는 가운데 양자 간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3-2-3. 북측 신자들과의 만남을 거부한 ‘사목적 배려’

민족화해 사목에 있어서, 몇몇 주교들의 재건주의적 태도는 다음과 같은 모습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2003년 3월 1일 분단 이후 처음으로 서울에서 남과 북의 종교인들이 주관하는 3.1 민족대회를 열었다. 특히 이 행사를 통해서 북측 종교인들이 남측의 종교행사에 참관하는 기회를 민족 분단이래 처음 갖게 되었다. 3.1 민족대회에 참석하는 북측대표단은 장재언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겸 북한적십자 위원장, 조선 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장)을 단장으로 총 105명이 방남하였고, 특히 북측대표단에는 한일선 조선종교인협의회 사무국장을 비롯해 강지영 조선카톨릭교협회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황명준 조선불교도연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리문환 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오경우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중앙위원회 서기장 등 북한 종교계의 주요인물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3월 2일 오전에 천주교, 불교, 개신교 등 남측의 각 종단이 집전하는 종교행사에 북측 종교인사들이 참관하였다. 장재언 위원장, 강지영 부위원장, 김유철 부회장 등 조선 카톨릭교 협의회 및 평양 장충성당 소속 17명의 대표단은 명동성당을 방문하여 서울 교구장 정진석 대주교(당시)를 대신해 나온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 위원장 김운회 주교, 한정관 총무신부, 각 교구 민화위 대표 신부 등과 함께 인사를 나눴고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짧은 환영 인사 및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만남의 시간에 이어 북측 대표단은 바로 명동성당 신자들과 함께 미사에 참여했고, 미사기도 중에 민족 통일에 대한 남·북천주교인들의 염원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그런데 남북 공동행사를 마치고 워커힐로 돌아온 북측 천주교 대표단은 남측 천주교 대표단에게 서울교구 교구장이자 평양교구 교구장인 정진석 대주교가 주교좌성당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측 대표단을 만나주지 않은 것에 대해 항의하였고 교구장이 만나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두 차례에 걸쳐 공식적으로 남측 대표단에게 질의하였다. 이에 대한 것은 당시 촬영한 동영상에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당시 정진석 대주교는 북측 대표단을 만나지 않은 이유를 ‘북한에 현재 남아있는 지하교회 신자들을 위한 사목적 배려 때문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는 북한에 남아있는 숨어 있는 지하교회 신자야 말로 진실성과 가톨릭교회 정통성을 지닌 신자이며, 공산당 체제 하에 있는 조선 카톨릭교 협회의 신자들은 정통성을 지니지 못했거나 ‘사이비 신자’일 것이라는 정 추기경의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다.

위의 세 사례를 통해 볼 때, 한국교회의 민족화해 사목정책을 책임지는 몇몇 주요 주교들의 대북 교회관은 전형적인 재건주의적 사고방식이다. 재건주의적 사고방식은 북한의 신자공동체를 지상의 ‘어용교회’와 지하의 ‘진실한 교회’로 구분하고, 남한교회 주도로 지하의 신자공동체를 육성하려는 사목 태도를 의미한다. 달리 말해 재건주의적 접근방식은 북한 신자가 북한 선교의 주역이자 1차적 책임자임을 인정하지 않고 남한교회가 직접 선교의 주역으로 나서는 자세를 의미한다. 과연 이러한 사목 태도 내지 접근 방법이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가? 과연 이러한 자세가 ‘아죠르나멘또’라는 ‘현실적응’ 사목 원칙에 충실한 것이며 또한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기여할 수 있는 사목 방법론인가? 오히려 지난 80년대 홍콩과 대만 교회가 중국 반체제 교회 인사를 주교로 서임하려는 사목노선을 취함으로써 중국 교회를 지상과 지하로 분열시킨 분리주의적 태도와 흡사한 것은 아닌가? 교회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하느님의 눈’으로 성찰하고 ‘하느님의 입’으로 응답해야 한다.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기획위원회 2007.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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