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비평 - 김홍락]

선배님.

가을을 재촉하는 반가운 단비가 대지를 짙게 덮고 난 후, 바람에 실려 오는 계절 내음에 이른 가을을 흠뻑 느끼는 요즘입니다. 선배님 덕분에 맑은 하늘이 더욱 청아해 보입니다.

며칠 전 사석에서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로부터 ‘교회비평’ 칼럼을 다시 써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한동안 손 놓았던 글에 대한 부담이 앞섰지만, 또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돌멩이들이 두렵기도 했지만, 교회와 세상에 다 갚지 못한 밥값 생각에 흔쾌히 승낙하고 말았습니다.

선배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요즘 세상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논란으로 아주 시끄럽습니다. 흡사 우리 사회의 모든 현안들을 되삼켜 버린 형국입니다. 더욱 가관인 것은 지금까지의 모든 시국사건이 그랬듯, 사건의 중심을 가득 채운 것은 사건의 내용과 진의가 아니라, ‘종북’ ‘좌파’라는 단어였습니다. 더 하여 지난 대선 국면에서 정치개입으로 개혁의 위기에 빠진 국정원, 그리고 그 덕을 톡톡히 보았던 ‘보수’ 진영은 이 사건을 호재 삼아, 매번 그래왔듯 ‘종북’ ‘좌파’의 테두리에 ‘진보’라는 말도 슬며시 끼워 넣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향유하고 이를 지키려는 이들은 ‘종북’과 ‘좌파’ 그리고 ‘진보’에 대한 구별 없이 이 모두를 아울러 ‘빨갱이’라는 말로 뭉뚱그립니다. 그리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가합니다. 그들에게는 선배님께서 강조하신 ‘합리적 보수’ ‘합리적 진보’라는 개념은 애당초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 ‘합리적 진보’도, 심지어 자신들과 생각이 조금만 다르다 치면 ‘합리적’인 보수마저도 ‘빨갱이’라는 허울로 덧씌울 뿐입니다.

해방 이후, 정치가 야만적 집단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그 야만성이 정점을 향해 내달리던 이승만, 박정희 시절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배한 권력은 대부분 이 ‘빨갱이’라는 단어로 그 세력을 유지해왔습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지금도, ‘분단’이라는 우리 현실과 맞닿아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 불의한 권력에 눈감지 않는 이들에게 붙이는 이 ‘빨갱이’라는 딱지는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언제, 누가 어떤 방법으로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을까 사람들은 스스로를 검열하고 불안에 떨고 있는 지경입니다.

▲ ‘이단심문 장면’, 프란치스코 고야(1819년)

선배님. 그런데 이러한 우리의 사회 현실이, 교회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한국 사회의 ‘빨갱이’라는 단어만큼이나, 교회 안에는 ‘다른 생각’ ‘다른 신학’을 단숨에 평정해 버리는 개념이 있습니다. 바로 ‘이단’입니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선배님께서 ‘이단’에 대해 좀 더 깊이 공부해 보고 싶다고 하신 말씀이 떠오르네요. 당시 몇 가지 신학 서적을 추천해 드린 기억이 납니다.

교회가 교의를 정립하기 시작한 교부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교회 안에는 수많은 이단들이 존재했고 또한 단죄 받았습니다. 물론 그 가운데는 아무리 앞뒤를 재어 보아도 이단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이단으로 단죄된 이들 가운데는 당시 교회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 권력을 등에 업고 ‘이단’이라는 주홍 글씨를 붙인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 권력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교회의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중심 사회에서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기란 거의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빨갱이’ 꼬리표를 달고서는 분단국가의 현실에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권력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빨갱이’나 ‘이단’이라는 ‘낙인’의 쓰임새는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 당국이 붙여놓은 ‘이단’이라는 꼬리표를 떼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신념을 포기해야 하는 ‘신앙고백’이 요구되었습니다. 여기서 신앙은 ‘정통’이 되어버린 교회 권력의 입맛을 의미했습니다. 이 신앙고백은 권력의 입맛에 맞갖은 자질을 새롭게 갖추겠다는 신앙적 ‘사상전향’을 뜻합니다. 흡사 과거 우리 사회에서 ‘빨갱이’ 꼬리표를 떼기 위해, 그리고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요되었던 ‘사상전향서’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선배님. 선배님께서 잘 아시다시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21차례 열린 보편 공의회 가운데 유일하게 ‘이단 단죄’를 하지 않은 공의회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요구와 시대의 변화를 과감하게 교회 안으로, 또한 세상의 문제를 교회의 문제로 받아들인 유일한 공의회이기도 합니다. ‘다름’에 대한 단죄가 아닌, 교회와 세상, 성(聖)과 속(俗)의 구별이 아닌 일치로 나아가려는 교회의 정신이 새롭게 펼쳐진 장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이 전세계 교회로 퍼져나가던 시기에도 교회는 다시 ‘이단’ 단속에 나섰습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해방신학’에 대한 단죄였지요.

해방신학에 대한 ‘이단’ 규정이 과거의 그것과 사뭇 다른 점은 교회가 그동안 이단을 향해 견지해 온 기준을 벗어나, 새로운 도구를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바로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주의’입니다. 우리 사회의 표현으로 하자면, 해방신학은 ‘빨갱이 신학’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에 넘어와서도 교회는 세상 권력의 힘을 빌려 해방신학에 ‘이단’이라는 낙인을 아로새겼습니다. 지극히 정치적인 개념인 ‘빨갱이’라는 단어가 교회의 이단 단죄 도구로 등장한 것입니다.

선배님께서도 이미 읽어 보셨겠지만, 지난 8월 6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는 <바티칸 인사이더>(Vatican Insider)를 인용한 ‘해방신학과 교황청의 전쟁이 종식되었다’는 제하의 보도에서, 작년 7월 임명된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게르하르드 루드비크 뮐러 대주교의 해방신학에 대한 평가를 실었습니다.

뮐러 대주교는 페루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의 신학이 “완전히 정통신앙과 부합한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해방신학의 가치는 라틴아메리카 가톨릭교회의 범위를 넘어선 … 모든 참된 신학적 조류들이 향해 있는 하나의 이미지, 즉 구세주이시자 해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향해 왔다”고 강조했습니다.

<바티칸 인사이더>는 이전에 교황청이 해방신학을 단죄한 것은 교회의 사도적 신앙을 보존하고자 하는 열의가 아닌 “특정한 교회 내 분파들”에 의한 “정치적인 동기”에서 비롯되었다고 꼬집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난 30년 동안 교회 안에서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해방신학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것”이라고 명토 박았습니다.

교부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교회 권력을 향유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이단’ 딱지는 매우 유용한 도구임에는 틀림없어 보입니다. 물론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 시절부터 해방신학에 대한 단죄를 결정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후광을 입었던 교회의 주류 보수권력은 여전히 해방신학에 대한 ‘이단’의 낙인을 거두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빨갱이’ 시선을 거두게 되면 결국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격이 될 것이며, 자신들의 자리를 만들어 준 기반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선배님. 그러고 보니, 빨갱이 운운하는 한국 사회와 이단 운운하는 교회 사이에 몇 가지 공통점이 엿보입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대화 거부’입니다. 상대방의 의견은 전적으로 무시하고, 설령 들었다 치더라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단하고 재해석합니다. 이들에게 타협이나 양보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타협이나 양보는 자신의 권위에 대한 손상이며, 또한 자신이 가진 권력을 내어놓게 만드는 함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신학자는 세계의 거대 종교 가운데 유독 그리스도교에 ‘이단 논쟁’이 많은 이유를 그리스도교의 중심에 ‘삶’이 아닌 ‘교의’가 자리 잡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 바 있습니다. 일면 수긍이 가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교리나 교의 중심의 종교에서,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삶을 잃어버린 우리 교회에서는 권력 유지를 위해 반대자들에게 ‘이단’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만큼 더 손쉬운 방법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단 가운데는 그리스도교를 박해했던 로마 제국을 오히려 닮아가는 교회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경우도 많았습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점점 빛을 잃어가는 ‘복음’ 정신을 세상 안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삶 안에서 제대로 구현하려는 열망 때문에 교도권의 눈 밖에 나기도 했다는 말입니다.

선배님. 이렇게 두서없이 긴 편지를 드리는 이유는, 교회가 여전히 삶 안에서 복음을 읽어내고, 그 복음을 현실에서 구현하려는 이들을 단죄하는 모습을 보이기 때문입니다. 삶을 잃어버린 교회는 교리와 교의, 그리고 교회의 보존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고,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여전히 어떤 이들을 이단으로 낙인찍고 싶어 하는 유혹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불의한 상황이 벌어지는데도 가난한 이들 편에서 사회적 투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교회 분열’을 일으키지 말고 그저 잠자코 기도나 하라고 강요하는 현실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이야기를 건네고, 함께 고민하며 교회 안에 건강하게 남아있는 선배님과 같은 신앙인들이 있어 고맙습니다. 또한 사제로서 깊이 반성합니다. 오늘의 제 말들이 또 다른 빚을 남기는 것은 아닌가, 염려됩니다. 삶 안에서 그리고 복음 안에서 언제나 함께 하기를 빕니다. 모쪼록 평안하시길.
 

 
 

김홍락 신부 (프란치스코)
교부학과 전례학을 전공했고, 현재 필리핀 나보타스시 빈민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의 종 공동체’를 설립하여 도시빈민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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