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묵시록 이야기 - 1]

▲ ‘파트모스 섬의 성 요한 복음사가’, 보스(Hieronymus Bosch)의 1485년 작품
요한 묵시록의 이야기는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오래 되었기에 낯설고 불편하다. 그래서일까. 시대가 바뀔 때마다 요한 묵시록에 대한 오해와 왜곡이 생겨났고, 그것들은 대개 극단적 고립을 자처하는 사이비 종교로 귀결되었다.

‘신천지’가 그 대표적인 예다. 신천지 신도들은 144,000이라는 물리적 숫자 안에 들어가야만 소위 ‘구원’이란 것을 획득할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144,000 밖에 머무는 이들은 묵시록적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땅의 주민들”, 곧 짐승의 악함에 놀아나는 이들로 여겨진다(묵시 13 참조). 신천지의 행태에 대한 저잣거리의 해묵은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필자가 주목하는 신천지의 위험성은 ‘선민의식’을 기반으로 한 이원론적 세계관에 있다. 세상을 선민 대 비선민의 구도로 규정짓는 신천지는 2013년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요한 묵시록의 왜곡과 폄훼,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라는 말마디로 시작하는 요한 묵시록은 무엇보다 예수에 대한 계시다. 공관복음을 통해 역사적 예수에 대해서 미약하나마 대체적인 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다면, 요한 묵시록의 예수는 ‘부활’의 사건을 통해 새롭게 재조명되고 있다(1,17-18 참조). 부활은 쉽게 받아들여지는 사실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요한 묵시록은 많은 표징들을 통해 부활한 예수의 의미를 전해주고자 무던히도 애를 쓴다.

대표적인 표징이 “어린양”이다(5,6). 유다 민족에게 있어 어린양은 희생의 표징 그 자체였다(탈출 12; 이사 53 참조). 남을 위해 내가 쓰러져야 하는 어린양의 운명이 부활한 예수의 운명과 맞닿아 있다. 요한 묵시록은 부활한 예수를 빗대어 29번이나 어린양을 등장시킨다. 어린양은 천상과 지상을 잇고, 세상 모든 이를 엮어서 세상의 근원인 하느님께로 인도하기 때문에 ‘관계의 범주’를 모른다.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와 바다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어린양 덕택에 하나가 된다(5,13 참조).

어린양은 예수의 인물 됨됨이를 위해 박제된 표징이 아니라, 예수의 인물 안에 시공을 초월해 모든 이가 계속해서 모여드는 생명의 표징인 셈이다(21-22장의 천상 예루살렘 참조). ‘이쪽이다’ 혹은 ‘저쪽이다’라고 떠들며 선동적으로 구축하는 관계의 범주에 어린양은 자신의 피로 저항하고 있다(5,9).

그런데 어린양으로 그려진 부활한 예수는 ‘표징적’으로 소개되었다. ‘표징적이다’라는 말마디는 해석의 한계성에 대한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표징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저 깊숙이 숨겨져 가려내기 쉽지 않는 의미를 통해 표징은 비로소 그 존재 가치를 지닌다. 표징은 그래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 한계 위에서 우리는 소위 ‘성서학’을 공부하고 그 결과물을 체계화한다.

성서학을 매개로 우리가 가장 쉽게 범하는 실수는 표징들을 마치 계시 자체인 것인 양 숭배하는 것이다. 분명한 것 하나는 우리가 하느님의 계시 자체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요한 묵시록의 신학적 명제들은 대개 글과 말, 그리고 역사학적 지식을 습득한 주석학자들에 의해 걸러진 것들이다. 주석학자들의 전문성과 고단함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계시 자체의 ‘신비로움’을 주석학으로 대치하고자 하는 실수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 묵시록 스스로 우리에게 전해진 계시의 한계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하느님께서 … 그리스도께 알리셨고(δίδωμι, 주다), 그리스도께서 …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주신(σημαίνω, 표징화하다) 계시”(1,1).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계시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 요한 사이의 계시는 ‘표징화’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전해진 계시는 그 자체로 ‘어렴풋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만 한다.

표징의 의미는 그것을 받아 읽어내는 이의 해석 의지와 태도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오늘날 성경 읽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표징에 대한 해석을 엘리트적 전문성에 의존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표징을 아무리 전문적으로 해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표징의 한계성을 되짚는 일에 불과할 수 있다. 계시 자체에 대한 지속적 개방성이 결여되는 전문성은 그 자체로 엘리트주의, 혹은 선민의식을 불러오는 위험이 있다.

이 위험은 대개 지독한 계급주의적 사고를 동반한다. ‘너보다는 내가 이 성서 말씀의 의미를 더 잘 알거야’, ‘넌 잘 모르겠지만, 성서 말씀은 이러저러한 공부를 한 사람만이 알아들을 수 있어’라는 사고들 말이다.

요한 묵시록 안에서 스스로 저자라고 밝히는 요한은 이렇게 자기를 소개한다.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1,9). 형제요 동료로서 자신을 소개한 요한은 유다 묵시문학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계시 중재자의 계급적 우월의식을 과감히 벗어던진다. 공동체 안에 함께 머무는 이로 스스로를 한껏 낮추고 있다. 낮춘 사람 요한에게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부활의 예수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게 된다(묵시 2―3 참조).

요한 묵시록을 통해 부활한 예수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부활 안에 함께 살아갈 형제와 동료를 역시 만나야 한다. 부활이 관계의 범주를 무너뜨리는 초월적 사건이라면, 너와 나의 ‘편’을 나누기 전에, 너와 내가 만나 ‘우리’를 만들어가는 길을 읽어내어야 한다. 세상은 악이고 144,000은 선이라는 주장, 예수는 천당이고 불신은 지옥이라는 역전의 고함소리, 내 것이 맞고 네 것이 틀렸다는 학문적 교만, 이 모든 것이 내포하는 적대적 이원론의 횡포가 요한 묵시록을 왜곡하고 폄훼하는 또 다른 이단의 행태일 뿐이다.

<예수전>의 김규항은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신앙심을 이렇게 기술한다. “한 아들이 제 부모와 여러 형제자매 사이에 버티고 서선 아버지를 가리키며 ‘나만이 아버지의 자식이며 아버지 또한 나만 자식이라 여긴다. 아버지의 재산은 당연히 내 것이다’라고 떠들어대는 것이다.” 기억하겠지만, 예수는 스스로 똑똑하다는 사람이 아닌 철부지 어린아이들에게 하늘나라 신비를 계시하셨다(마태 11,25).
 

 
박병규 신부 (요한 보스코)
대구대교구 선남본당 주임
대구 정평위 소식지 <함께꿈>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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