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9

그들이 나갔을 때, 보시오, 사람들이 귀신 들린 벙어리 한 사람을 예수께 데려왔다. 예수께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그 벙어리는 곧 말을 하게 되었다. 군중은 놀라서 말했다. “이 같은 일은 이스라엘에서 결코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저 사람은 귀신 두목과 함께 귀신을 쫓아낸다”고 말했다. (마태 9,32-34)

마태오 복음서 9,2-8에 나타난 치유 이적을 떠올리게 하는 단락이다. 이적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의 반응에 마태오는 더 초점을 맞추었다. 〔기적이라는 단어 대신 ‘이적(異蹟)’이라는 표현을 나는 선택하였다. ‘기적’은 자연과학적 법칙과 대응하는 것으로 오해될 여지가 큰 단어다. 제주도에 ‘신비의 도로’라는 곳이 여러 군데 있다. 신비와 수수께끼, 속임수가 서로 같은 뜻은 아닌데 말이다. 신비라는 단어가 우리 시대에 인플레된 것도 또 하나의 이유다. 모르는 것을 일단 신비라고 이름붙이는 유행도 또 다른 이유다.〕

코포스(kopos)는 ‘벙어리, 귀머거리, 벙어리와 귀머거리’ 세 가지 경우를 가리키는 단어다. 태어나면서 귀머거리인 사람을 가리키진 않는다. 맹인과 벙어리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자주 보이고(이사 29,18; 35,5; 42,18), 마태오 복음서에서도 함께 나타난다(12,22; 15,30-). 예수는 치유행위를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성취한다(11,5-). 오늘 단락에 결정적인 것은 예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다.

▲ ‘그리스도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시다’, 엘 그레코(1578년)

군중과 바리사이는 예수에 대해 엇갈리게 반응한다. 군중은 예수에게 호감을 갖지만 관망하는 자세다. 그들의 태도를 곧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이라고 여길 수는 없다. 바리사이는 예수의 노골적인 적대자로 등장한다. 바리사이는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핵심 논쟁 상대다. 종교적 의견이 여러 면에서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 주변에 등장하는 여러 그룹이 있다. 로마 군대, 율법학자, 바리사이, 사두가이는 예수 반대편에 있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 곁에 있고 군중은 중간 지대에 서 있다.

로마 군대와 사두가이는 정치적 이해관계로 예수에 적대적이다. 로마 군대, 군중 그리고 제자들이 예수와 갈등하는 장면이 성서에는 적게 소개되어 있다. 로마 군대가 예수를 처형했지만 복음서에서 그들에 대한 보도는 극도로 자제되어 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 중에도 예수에게 호감을 가진 경우가 꽤 소개된다. 아쉽게도 복음서는 유다 지배층에 대한 예수의 갈등만 주로 묘사하였다.

예수를 보는 의견에서 군중은 여럿으로 분열된다.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 호감을 갖지만 따르기 주저하는 사람, 예수를 따르게 된 사람, 예수의 반대편에 가담한 사람으로 나뉜다.

제자들과 예수의 갈등도 무시할 수 없다. 예수의 노선(路線)을 놓고 베드로와 유다는 예수와 여러 차례 충돌한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에게서 혼란을 자주 느꼈을 것이다. 복음서를 신학 드라마로 비유한다면 여러 배우들이 연기하는 셈이다. 배우 중심으로 예수 드라마를 시청한다고 상상하면 성서 이해에 크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과 군중에 대한 연구는 아직 초보 상태다.

복음서에 소개된 이적의 신학적 의미를 종합할 때가 되었다. 첫째, 이적의 대상은 자연과학 법칙이 아니라 악의 세력이다. 자연과학 법칙을 무너뜨리기 위해 예수가 이적을 행한 것이 아니라 악의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이적을 행한 것이다. 자연과학 관점에서 예수의 이적을 분석하거나 해명하는 노력은 모두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보다 예수의 이적을 사회학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둘째, 이적을 행할 때 악의 세력들이 세상에 폭로된다. 질병, 가난, 식민지 세력, 부패한 종교 지배층 등 세상을 어지럽히는 세력의 정체가 자세히 드러난다.

셋째, 이적은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사랑하는 하느님의 표현이다. 악의 세력을 극복하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가 예수의 이적에서 나타난다.

예수는 당시 악의 세력 모두를 극복하진 않았다. 예수가 모든 환자를 고치진 않았다. 세상의 가난 문제를 예수가 해결한 것도 아니다. 우리가 예수의 뒤를 따라 이적을 행하라는 숙제를 넘겨받은 셈이다. 다양한 모습의 악의 세력과 싸우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성서에 나타난 이적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렇다.

세례 받았다고 해서 곧바로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오해다. 성직자, 목회자라고 해서 곧 예수의 제자라고 착각할 필요도 없다. 그리스도교 신자 중에도 악의 세력에 속하는 사람이 많다. 오히려 자기도 모르게 예수를 찾아 걷는 사람이 교회 밖에 많이 있다. 누가 진짜 예수를 따르고 있는지 오직 하느님만 아신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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