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의 신학산책 - 25]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사용될 때는 실천 혹은 놀이라는 역사적 농도가 나타난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사전에 있는 수많은 단어들 중의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아버지’ 혹은 ‘어머니’라는 호칭을 사용할 때도, 그것은 사전에 있는 의미를 훨씬 능가하는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이라는 단어는 인간 안에 어떤 실천을 발생시킨다. 유대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는 종교였다. 그러나 유대교가 긍정하던 것은 대중 안에서도, 율사와 사제들 안에서도 실현되지 않았다. 유대교는 하느님이라는 호칭의 상징성을 충분히 살려내지 못하였다. 그 점을 지적하는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예언서들이다.

▲ 삼위일체의 하느님, 안드레이 류블레프(1370-1430)
너희의 시끄러운 노래를 내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희의 수금 소리도 나는 듣지 못하겠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 5,23-2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주님께서 야곱의 자만을 두고 맹세하셨다. “나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그 때문에 땅이 뒤흔들리고 온 주민이 통곡하지 않겠느냐? 온 땅이 나일 강처럼 불어 오르고 이집트의 나일 강처럼 부풀었다가 잦아들지 않겠느냐?”(아모 8,4-6)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그러나 내가 부를수록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은 바알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치고 우상들에게 향을 피워 올렸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나는 인정의 끈으로, 사랑의 줄로 그들을 끌어당겼으며 젖먹이처럼 들어 올려 볼을 비비고 몸을 굽혀 먹여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집트 땅으로 돌아가고 아시리아가 바로 그들의 임금이 되리니 그들이 나에게 돌아오기를 마다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계략 탓으로 칼이 그 성읍들에 들이닥쳐 성문 빗장들을 부수고 삼켜 버리리라. 내 백성은 나를 배반하려고만 한다. 그들이 위를 향해 부르짖어도 누구 하나 일으켜 세워 주지 않으리라.

에프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내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저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처럼 내버리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츠보임처럼 만들겠느냐?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그들이 주님을 따라오리라. 주님이 사자처럼 포효하리니 그가 포효하면 그의 자녀들이 떨면서 서쪽에서 오리라. 그들은 떨면서 이집트에서 새처럼 오고 아시리아 땅에서 비둘기처럼 오리라. 그리고 나는 그들을 다시 제집에 살게 하리라. 주님의 말씀이다.(호세 11)

주님은 만군의 하느님 그 이름 주님이시다! 그러니 너는 네 하느님께 돌아와 신의와 공정을 지키고 네 하느님께 늘 희망을 두어라.(호세 11; 12,6-7)

소돔의 지도자들아 주님의 말씀을 들어라. 고모라의 백성들아 우리 하느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라.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나는 싫다.

너희가 나의 얼굴을 보러 올 때 내 뜰을 짓밟으라고 누가 너희에게 시키더냐?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분향 연기도 나에게는 역겹다. 초하룻날과 안식일과 축제 소집 불의에 찬 축제 모임을 나는 견딜 수가 없다.

나의 영은 너희의 초하룻날 행사들과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그것들은 나에게 짐이 되어 짊어지기에 나는 지쳤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가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한다 할지라도 나는 들어 주지 않으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고아의 권리를 되찾아 주고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오너라, 우리 시비를 가려보자. 너희의 죄가 진홍빛 같아도 눈같이 희어지고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같이 되리라. 너희가 기꺼이 순종하면 이 땅의 좋은 소출을 먹게 되리라. 그러나 너희가 마다하고 거스르면 칼날에 먹히리라.”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이사 1,10-20)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쳐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살게 하겠다. ′이는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 주님의 성전이다!′ 하는 거짓된 말을 믿지 마라. 너희가 참으로 너희 길과 너희 행실을 고치고 이웃끼리 서로 올바른 일을 실천한다면, 너희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억누르지 않고 무죄한 이들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않으며 다른 신들을 따라가 스스로 재앙을 불러들이지 않는다면, 내가 너희를 이곳에, 예로부터 영원히 너희 조상들에게 준 이 땅에 살게 하겠다.

그런데 너희는 아무 쓸모도 없는 거짓된 말을 믿고 있다. 너희는 도둑질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거짓으로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고, 너희 자신도 모르는 다른 신들을 따라간다. 그러면서도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 안에 들어와 내 앞에 서서, ′우리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느냐? 이런 역겨운 짓들이나 하는 주제에! 너희에게는 내 이름으로 불리는 이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보이느냐? 나도 이제 그것을 지켜보고 있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7,3-11)

예수에게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올바로 사용될 수 있는 곳은 변화되는 인간의 삶, 곧 놀이 안에서였다. 놀이를 발생시키는 삶에는 하느님의 호칭이 실천을 부른다. 병자가 치유되는 것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이 접근하신다는 표지이다. 율법과 안식일은 하느님과 맺은 계약이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 계약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면서 발생시키는 원초의 놀이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예수가 현세적 메시아를 거부한 것은 하느님의 현존은 인간의 부재(不在)와 교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믿는 것은 사회와 우리 실존의 변혁은 하느님에게 맡기고, 우리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사명을 면제 받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이 전해진다는 말은 하느님이 강자(强者)들 혹은 권좌(權座)에 있는 이들과 제휴(提携)하고 계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형제적 용서와 화해를 요구하는 것은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삶을 시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용서와 화해는 복수(復讐)와 책벌(責罰)이라는 인간 세계의 악순환을 부셔버리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다. 하느님은 우리의 그런 노력을 통해서 인류역사 안에 살아계시며 개입하신다. 죽음은 회피할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하느님의 영은 마술적으로 우리 안에 개입하여,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게 하지 않는다. 하느님의 영은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지닌 한계가 우리 삶의 길에서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그런 해석은 오늘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감하는 바가 아니다. 예수와 동시대인들은 예수가 하는 일을 본 증인이지만, 예수가 행한 일들 안에 하느님을 연상하지 않는다. “그는 귀신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다.”(루가 11,15)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동이 그들이 가진 하느님의 의미와 일치하지 않기에 예수는 하느님 말씀의 충실한 해석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시며 복음을 전하고 계시는데,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이 원로들과 함께 다가와, 예수님께 말하였다. “당신이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또 당신에게 그러한 권한을 준 이가 누구인지 말해 보시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물을 터이니 대답해 보아라.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냐, 아니면 사람에게서 온 것이냐?” 그들은 저희끼리 서로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 하고 말할 것이오.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면, 온 백성이 요한을 예언자로 확신하고 있으니 그들이 돌을 던져 우리를 죽일 것이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루가 20,1-8).

또 일부는 예수의 예언자적 행위가 너무 상징적이라서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도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루가 12,54-56).

요한복음서는 유대인들의 그런 오해들을 조직적으로 부각시켜 보인다.

‘성전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

그때에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이런 일을 해도 된다는 무슨 표징을 보여 줄 수 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유다인들이 말하였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그분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게 되었다. (2,18-22),

‘다시 태어남에 대한 오해’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3,3-5),

‘마실 물에 대한 오해’

마침 사마리아 여자 하나가 물을 길으러 왔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고을에 가 있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은 어떻게 유다 사람이시면서 사마리아 여자인 저에게 마실 물을 청하십니까?” 사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대답하셨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고 또 ‘나에게 마실 물을 좀 다오.’ 하고 너에게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그에게 청하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두레박도 가지고 계시지 않고 우물도 깊은데, 어디에서 그 생수를 마련하시렵니까? 선생님이 저희 조상 야곱보다 더 훌륭한 분이시라는 말씀입니까? 그분께서 저희에게 이 우물을 주셨습니다. 그분은 물론 그분의 자녀들과 가축들도 이 우물물을 마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러자 그 여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이리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4,7-15)

‘빵과 몸에 대한 오해’(6장), 인간 자유에 대한 오해(8장), 안식일에 대한 오해(9장) 등도 요한복음서는 설명한다. 인간 체험의 직접적 대상이 되지 않는 문제들에 대한 인간의 오해는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인간의 체험은 자동적으로 하느님에게로 향하지 않는다. 인간 삶의 상징성과 하느님 호칭의 상징성 사이를 연결시켜 주는 것은 해석이다. 그 해석을 위한 종교 전승(傳承)이다. (계속)


서공석 신부
(부산교구 원로사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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