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황인수]

2013년은 이탈리아 몰페타(Molfetta)의 주교였던 돈 토니노 벨로(Don Tonino Bello)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되는 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가장 잘 살았던 이탈리아 주교라는 평을 받는 그는 생전에 ‘앞치마를 두른 교회’라는 말을 즐겨 하곤 했다. 권위의 중심으로서의 주교가 아니라 섬기는 직분을 살기 원했던 그가 자신을 ‘돈 토니노’라고 불러주기를 원한 탓에, 지금도 그는 ‘돈 토니노 벨로’(‘돈’은 성직자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이다)라는 애칭으로 기억된다. 토니노 벨로는 전례 때 사제들이 두르는 영대는 앞치마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고 여겼고, 성탄절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고 믿었다.

어느 해 그의 교구에 있는 기념 성당이 ‘소(小) 바실리카’로 지정되어 추기경이 교구를 방문하였다. 기념 성당의 저녁기도에 참여하면서 다음날 있을 바실리카 선포식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저녁 기도가 끝날 무렵 추기경이 회중에게 궁금한 것이 있는지 물었다. 한 젊은이가 손을 들었다. “그런데 왜 소 바실리카입니까?” 토니노 벨로는 “바실리카가 그리스말로 ‘왕의 집’이라는 뜻인데 우리 성당이 바실리카가 되었다는 것은 이곳이 하늘과 땅의 왕이신 주님의 집이 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사”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그 젊은이가 다시 물었다. “저도 학교에서 그리스말을 배워서 바실리카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왜 ‘소’ 바실리카인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집에 대소 구분이 무슨 의미냐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토니노 벨로가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한 사제가 나섰다. “소 바실리카는 벽돌로 지어진 하느님의 집이고 대 바실리카는 살로 된 하느님의 집이지. 이 성당이 벽돌로 된 하느님의 집이라면 너와 나, 저 어린이와 할머니는 살로 된 하느님의 집, 대 바실리카인 거야.” 재치있는 대답이었다.

그날 밤 행사가 끝나고 젊은이들과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토니노 벨로는 한 사람이 길바닥에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서른여섯의 생애 절반을 감옥에서 보내고 지금은 노숙자로 살아가는 주세뻬라는 사람이었다. 비 내리는 밤, 빈 술병을 옆에 두고 길바닥에 누워있는 그를 내려다보며 착잡해 하고 있을 때 젊은이 가운데 하나가 나지막이 물었다. “주교님, 대 바실리카입니까, 소 바실리카입니까?” 그날 밤 주세뻬를 주교관으로 옮긴 토니노 벨로는 새벽녘에 잠자리를 살피러 갔다가 평안히 잠든 그의 얼굴에서 ‘(하느님이) 천사들보다 조금 못하게 만드신’(시편 8,6) 인간의 품위를 보았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이 터지자 병중이던 토니노 벨로는 아픈 몸을 이끌고 ‘500인 행진’에 참여한다. 500명의 평화주의자들이 안코나(Ancona)에서 배를 타고 보스니아를 향했는데 그 항구는 700여 년 전에 성 프란치스코가 술탄을 만나 평화를 호소하기 위해 떠났던 곳이었다. 그들은 참혹한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까지 평화를 호소하면서 행진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사람들의 고통,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외면하면서도 군비에 막대한 지출을 하는 세상의 불의에 눈감지 않았다. 그것은 언제고 그를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교관을 개방해 두었던 정신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자리 인간의 현실 안에서 하느님의 얼굴을 찾으려는 노력이었다.

 ⓒ한수진 기자

국가정보원의 대통령선거 개입 사건을 제대로 규명하라는 전국 사제들의 시국선언이 줄을 잇고 있다. 남녀수도자들도 시국미사를 열어 이 대열에 동참했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사제들과 수도자들의 입장 표명에 불편해 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사제나 수도자라면 조용히 성당에서 기도에 전념하고 영적인 일에 전념할 것이지 왜 세상 일, 정치에 간섭하느냐는 것이다. 대한문 앞 분향소에서 매일 드려지는 거리 미사에서도 가끔 이런 신자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시대의 가현설이 아닐까?

그리스도교가 태동하던 당시, 전능하신 하느님이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이 찾아낸 해결책은 예수의 십자가 상 죽음이 그렇게 보였을 뿐(가현, 假顯) 실제는 아니었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육체가 없는 존재로서 수난과 죽음이 모두 환상이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가현설을 따르면 그리스도교는 껍데기만 남게 된다. 정신의 세계에 몸을 숨긴 교회, 현실에 눈을 감고 지상에서 발을 떼어 버린 교회는 끼리끼리 모이는 사교모임은 될지언정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라 말하기 어렵다. 구체적인 인간의 현실 앞에 앞치마를 두르고 무릎 꿇는 교회, 지금 여기 인간의 기쁨과 아픔에 귀 기울이는 교회, 그것이야말로 사람이 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바가 아니었던가.

“진실히 말하거니와 너희가 지극히 작은 내 형제 가운데 하나에게 해 주었을 때마다 그것은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


 
황인수 신부 (이냐시오)
성바오로수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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