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8

27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는데 맹인 두 사람이 따라오면서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28 예수께서 집안으로 들어가시자 그들은 거기까지 따라 들어왔다. 그래서 예수께서 “제가 여러분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고 믿습니까?”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예, 주님” 하고 대답하였다. 29 예수께서는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여러분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30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렸다. 31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 두셨지만 그들은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지방에 널리 퍼뜨렸다. (마태 9,27-31)

오늘의 단락은 ‘믿음’이라는 주제와 예수의 소문이 멀리 퍼진다는 ‘사실’을 다루는 점에서 앞 단락과 연결된다. 마태오 복음서 20,29-34와 내용상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마치 그 복사판처럼 보인다. 맹인을 한 사람이 아니라 둘을 등장시킨 것은 그들이 고통을 서로 나누고 또한 믿음의 동지임을 마태오가 강조하려는 뜻이다.

마태오 복음서 9,9-13처럼 예수를 집안까지 따라 들어가는 모습이 반복된다. 두 맹인은 귀신 들린 두 사람을 연상시킨다(마태 8,27-). 마르코 복음서 10,46과 달리 그들의 이름은 여기서 나타나지는 않았다.

‘못 봄’은 마태오에게 비유적인 뜻이다. 유다교 지배층이 앞을 보지 못한다고 마태오는 다섯 차례나 지적한다(마태 23,16-26). 마태오 복음서 13,13-15에서 예수는 이스라엘이 눈멀고 귀먹었다고 말한다. 맹인과 벙어리 치유(마태 12,23; 15,22; 21,14)에서 그 주제는 이어지고 마태오 복음서 23장에서 사람들을 눈뜨게 하는 예수와 눈먼 이스라엘 지배층의 대조가 절정을 이룬다.

▲ ‘그리스도께서 눈먼 사람을 고치시다’, 엘 그레코(1578년)

‘다윗의 아들’은 마태오 복음에서 자주 보이는 예수의 호칭이다. 예수 이전 유다교에서 드물게 나타나고 예수 이후 ‘왕-메시아’를 가리키는 이 호칭이 자주 나타난다. 유다교에서 다윗은 치유와 연결되어 있다. 마태오 복음 1장 예수의 족보에서 예수는 다윗의 아들로 소개된다. 8-20장에서 다윗은 치유하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소개된다. 마태오 복음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는 이스라엘 메시아 이상의 분으로, 즉 온 세상의 주님으로 소개된다(마태 20,31-33). 반대로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눈먼 사람들로 계속 묘사된다(마태 23,16-26).

예수는 길에서 맹인들의 부탁을 즉시 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예수를 집안에까지 따라가는 수고를 해야 하고 자신들의 믿음과 의지를 예수에게 질문 받는다. 그들처럼 우리도 언젠가 예수에게 질문 받을 것이다. 예수에게 대답할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는가.

믿음이 치유에 앞서야 한다고 마태오는 계속 강조한다(마태 8,8-10,13; 9,20-22). 힐라리오의 말처럼 “그들의 믿음 덕분에 그들이 보게 된 것이지, 보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믿은 것은 아니다(Quia crediderant viderunt, non quia viderant crediderunt)”.

‘내가 하느님을 믿을 수 있도록 무언가 화끈하게 한번 내게 보내주시라’ 하고 하느님과 협상하는 사람들이 있다. 루터의 말처럼 믿음은 ‘주저 없이 적극적이고 끈질겨야’ 한다. 믿음은 교리에 동의하는 것을 넘어 삶 전체에 걸친 신뢰다(야고 2,19). 우리도 믿음의 길에서 자주 넘어지겠지만,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는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훌륭한 사람이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선다.

느닷없이 마태오는 예수의 함구령을 수록하였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소문이 널리 퍼져간다고 강조하려는 것일까. 예수에게 도움을 청하는 불쌍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암시하는 구절이다. 마르코 복음에서 자주 쓰이던, 그러나 마태오에 거의 언급되지 않던 ‘메시아 비밀’ 주제가 여기서 나타난다.

오늘 방식으로 말하면, 마태오는 자기 컴퓨터 휴지통에 버렸던 주제를 다시 꺼내어 되살리는 듯하다. 마태오는 전승된 자료를 그저 반복하는 사람이 아니다. 마태오는 신학자다. 이름을 감추고 역사 속에 자신을 숨긴 겸손한 신학자들―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을 이제 우리가 복원할 시간이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 과분하게 각광 받아온 바울에 견주어 신학적 깊이에서 전혀 뒤지지 않는 그들이다. 예수의 역사를 드러내고 자신을 숨긴 그들을 나는 흠모한다.

눈먼 사람들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자주 비유적으로 해설되었다. 그러나 먼저 신체적 맹인의 아픔을 주목해야 하겠다. 중풍과 더불어 맹인은 고대 아시아 지역에서도 가혹한 아픔에 속했다.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맹인 치유는 구원의 때를 상징한다(이사 29,18; 35,5; 42,7). 이사야서 35,5 단락에서 메시아의 치유는 메시아 구원 활동의 1번으로 언급된다. 불쌍한 환자를 치유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다. 아들 얼굴 한번 보는 것이 평생 소원이라는 이태리 성악가 안드레아 보첼리가 생각난다. 언어가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음악은 시작된다 하던가.

마태오 복음에서 맹인과 유다교 지배층이 대조되었다면 우리 시대에 맹인과 누가 대조될 수 있을까. 눈 떴다고 자신하지만 실제로 눈먼 사람들은 우리 시대에 누구인가.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는 종교 지배층이 혹시 아닐까.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그 누구나 이미 눈먼 사람이다. 맹인도 예수를 따르는데 눈뜬 우리는 어떤가. 누가 진짜 눈뜬 사람인가. 예수가 우리 눈을 뜨게 해 주시지만, 예수에게 눈뜬 사람이 진짜 눈뜬 사람이다. 예수와 우리 사이에 가난한 맹인이 서 있다. 눈떴다는 우리를 앞 못 보는 맹인이 예수에게 안내해준다.

가난한 사람은 예수와 우리 사이의 중재자다. 가난한 사람을 모르면 예수를 알기 어렵다. 지나치게 말하자면, 성서를 버리고라도 먼저 가난한 사람에게 달려가야 한다. 전례에 갇히지 말고, 종교의식에 몰두하지 말고, 우선 가난한 사람을 찾아야 한다. 예수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이다. 신앙심 강하다 자부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별 관심이 없다면, 그는 아직 예수를 잘 모른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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