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선교 일기]

프놈뻰의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3년째 가르친다. 지난 학기에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근현대 세계교회사와 캄보디아 교회사를 강의했다. 청강생 한 명을 제외하면 정식 수강생은 신학 과정에 있는 신학생 네 명, 베트남에서 온 유기서원 수녀 한 명이다. 캄보디아 교회사 교재는 캄보디아를 90년간 식민통치했던 나라의 선교사가 쓴 책 한 권뿐이라 교재 선택에 여지가 없었다.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1863년 이후 식민통치를 해왔다. 독립운동을 하던 크마애 반군 ‘이사락’은 1950년대 들어 프랑스 신부들을 포함해 프랑스인들과 관계를 맺고 도와주며 그들의 종교를 믿는 가톨릭 신자들을 공격했다. 1955년 9월 20일 캄보디아 독립을 향한 열기를 파악한 바티칸은 그 전까지 하나의 교구였던 코친차이나 교구(현재의 베트남 남부 메콩 강 삼각주 지역)와 캄보디아를 분리시켰다. 얼마 되지 않아 13명의 캄보디아 소재 베트남 사제들은 베트남으로 돌아갔고, 새로 부임한 교구장은 캄보디아 미션(선교)이 국경의 분리에 근거해 좀 더 구체적으로 캄보디아 사람들을 향할 거라 공표했다.

1970년 3월 론놀 장군이 쿠테타로 정권을 장악하자 미국은 론놀을 비호하고 지원하였다. 캄보디아 땅에서 북베트남 사람들과 남베트남 공산주의자(베트공)들을 몰아내는 일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였다. 많은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이 학살당하거나 베트남으로 돌아갔다.

1975년부터 79년까지 폴폿이 주도한 붉은 크마애 공산정권은 종교를 말살했으며 캄보디아 내의 친베트남계를 학살했다. 많은 신자들이 순교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앙을 숨기고 흩어졌다. 1979년 1월 7일(쁘람삐 마까라) 친베트남 정권이 붉은 크마애 공산정권을 종식시키고 캄보디아를 통치하게 되자 베트남 군인들, 그리고 함께 들어온 베트남 신자들이 캄보디아 땅에 정착했다. 대부분 노동자들로, 전부터 캄보디아에 정착해 살고 있던 베트남계 신자들과 합세했다.

▲ 프놈뻰 남쪽 강변의 베트남 공동체 (2007년, 프놈뻰) ⓒ김태진

교회사의 내용이 여기에 이르자 토론이 뜨거웠다. 베트남계인 N 신학생과 Y 수녀에게 캄보디아 교회 내의 베트남 신자의 존재는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현실이며, 베트남 신자들의 캄보디아 교회 기여도와 정당성을 주장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크마애 신학생들에게는 과거에 수없이 침략해왔고, 1979년 이후 근 10년 동안 캄보디아를 지배했던 베트남 사람들, 그리고 그 안의 가톨릭 신자들을 어떻게 끌어안을지를 묻는 도전이다.

크마애는 인도 문화, 베트남은 중국 문화권이라 문화적 이질감도 크게 작용하지만 근대사의 소용돌이로 인한 두 민족 사이의 감정의 골은 뿌리가 깊다. 2001년 처음 캄보디아에 파견 왔을 때, 내게 크마애 말을 가르쳐주던 크마애 선생은 내전 동안 태국 난민촌에서 세례를 받았지만, 1992년 고향으로 돌아오고 나서는 성당에서 베트남 사람들을 보면 울화가 치밀어 더 이상 성당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친베트남 정권이 붉은 크마애 공산정권을 종식시킨 날인 쁘람삐 마까라는 정치적으로 해방인지 또 다른 종속인지 아직도 해석이 분분하고, 베트남 신자들이 대거 유입되는 시점이기에 교회 안에서도 무시 못할 사건이다. 토론이 전에 볼 수 없었던 감정들로 불꽃이 튀었다. 결국 우리 모두 캄보디아 교회 안에서 함께 힘을 모아 그리스도를 알리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크마애이건 베트남인이건, 신자건 비신자건) 봉사하기 위해 공부하는 중임을 잊지 말자고 환기시켜야 했다. 학생들은 감정과 표현을 자제하는 눈치였지만 여전히 자기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1997년부터 베트남계 가톨릭 공동체는 특히 프놈뻰 강변을 따라 우후죽순 생겨났다. 베트남계 신자들은 자주 프놈펜 교구장에게 통보하지 않고 돈을 모아 성당을 짓고 베트남 성직자, 수도자들이 들어와 베트남 공동체만을 위해 사목을 하기도 해 교회 내에서 긴장을 불러일으켰다.

특별 사목지침이 내려져 베트남 공동체도 캄보디아 교회의 한 부분으로 간주되었고, 크마애식으로 베트남 공동체를 위한 사목을 하게 되었다. 주일 미사는 크마애 말로 봉헌되며, 독서는 베트남 말로 한 번 더 읽는 것이 허락되었다. 크마애 교회는 이전처럼 베트남 공동체가 독립적인 베트남 학교를 세우는 걸 거부하고, 베트남 아이들이 캄보디아 학교에서 교육받도록 조치를 취했다. 이는 크마애, 베트남 두 공동체 사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한 조치였지만 베트남 신자들은 여전히 교회에서 배척받는다고 느낀다.

수업을 마치고 공동체로 돌아와, 두 패로 나뉘어 벌겋게 상기되어 토론을 벌였던 학생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그리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자민족을 옹호하는 주장을 폈을까 하는 생각은 그들의 출신 공동체 역사로 이어졌다.

B 신학생은 크마애로 끄돌 출신이다. 메콩강 남쪽의 동쪽 강변의 끄돌에는 크마애와 짬족 사람들뿐 아니라 라오족, 베트남의 훼에서 온 베트남인 등 일곱 개 이상의 민족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 있었다. 1898년 라잘드(Lazard) 신부가 사목을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각자 자기 민족 말을 했지만 전례 때 기도는 모두 크마애 말로 했다.

그들 중 대부분은 말레이 노예 상인들에게 속한 노예였다. 마침내 1897년 노예제도가 폐지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라자 신부가 이들에게 이제는 자유라고 말했지만 처음에 그들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2~3일이 지나자 150여 명의 남녀노소 노예들은 주인에게 옷을 빼앗긴 채 거의 알몸으로 신부 앞에 나타났다.

라자 신부는 그들을 입히고 먹이고 살 거처를 짓도록 도와주어 마을을 이루었다. 그리고 근처의 큰 도시에 가서 학교 선생을 모셔와 아이들에게 교육을 하기 시작했고 영세 준비 교리교육을 시작했다. 지금의 끄돌 신자들은 100여 년 전 복음을 통해 영적 자유의 체험뿐 아니라 실제로 신분제도 안에서 현실적 자유를 체험한 노비들의 후손들인 셈이다.

1970년대에 끄돌 성당 주변으로는 이미 수천 명의 베트남 신자들이 살고 있었다. 라핀 신부가 부임해 베트남 부제 삐에르 르 반 둥과 함께 사목을 할 때, 베트공이 진격해 온다는 소식이 들렸다. 두 사목자는 피신하지 않고 신자들과 남아 운명을 함께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끄돌 성당은 베트공이 아니라 캄보디아 군인들의 폭격을 받았다. 적군의 전초기지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성당과 사제관은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신부는 그 근처에 다시 움막을 짓고 닭을 키우고 농사지으면서 전례를 계속했다. 1972년 초 갑자기 상황이 악화되어 붉은 크마애군과 베트공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시작되었고, 이미 서품을 받고 끄돌에서 사목하던 둥 신부는 1972년 1월 25일, 같은 민족인 베트공에게 잡혀가 며칠 뒤 처형당했다.

N은 스바이빠 공동체 출신이다. 프놈뻰 시내에서 삽 강을 오른편으로 하고 5번 국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11킬로미터 쯤 되는 곳에 위치한 베트남 마을이다. 스바이빠는 크마애들 사이에서는 매음굴로 악명이 높았던 곳이고 지금도 마약 밀매가 성행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가끔 주일 미사를 가는 내게는 그저 강변에 위치한 수많은 베트남 공동체들 중 하나인 듯 보인다. 아마도 반베트남 감정이 부풀린 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N의 부모 형제들은 여전히 스바이빠에서 살고 있고, N은 스스로 베트남 사람임을 강조하고 자부심을 갖고 캄보디아 교회에서 사제가 되려고 공부를 하고 있다.

R은 크마애로 꼼뽕톰 출신이다. 꼼뽕톰 공동체는 지금의 꼼뽕톰 도청 소재지에서 서쪽 똔레삽 쪽으로 사앤 강을 따라 뱃길로 한 시간 가량 들어가는 꼼뽕꼬에서 시작되었다. 꼼뽕꼬는 캄보디아 신자들 사이에서 순수 크마애 공동체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1870년대부터 베트남의 훼(Hue) 정권으로부터 피신해온 베트남 신자들이 깊은 숲속에 살고 있었다.

1910년 즈음에 삐에르 기스돈 신부가 파견되어 사목을 했고 크마애로는 쫌 아온이라는 여자 아이가 처음으로 영세를 받았다. 주교와 다른 동료 선교사들이 크마애들은 절대 가톨릭 신자가 될 수 없다며 만류했음에도 기스돈 신부는 굴하지 않고 열심히 사목해 마침내 크마애 다섯 가구가 영세를 받고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다. 그 뒤 첫 다섯 가구의 친척들이 더불어 영세를 받고 당시 캄보디아에서 가장 큰 크마애 공동체로 성장했다.

1946년부터 ‘이사락’, ‘베트민’ 두 독립운동 단체가 캄보디아 전역에서 민족독립, 그리고 공산주의를 기치로 베트남 가톨릭 신자들을 공격했다. 그 여파로 꼼뽕꼬 지역 사앤 강 주변의 40여 명의 신자들도 프랑스 식민정부의 앞잡이로 몰려 산 채로 화장을 당했다. 신자들은 전쟁을 피해 프놈뻰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베트남 신자들과 합류하였으나 베트남 사람들은 론놀 장군에 의해 모두 베트남으로 추방되었다. 1970년 이전에 꼼뽕꼬에는 800여 명의 신자가 살았으나 내전 이후 1992년 고향으로 돌아온 신자 수는 절반으로 줄었고, 더구나 사앤 강을 따라 꼼뽕톰 지역 여기저기에 흩어져 정착을 했다.

▲ 교회사 기말고사. 한 학생이 답안지에 “(크마애와 베트남 사람들이)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며 살기 위해 먼저 화해하도록 힘써야 한다”고 썼다. (2013년, 프놈뻰) ⓒ김태진

Y 수녀는 베트남에서 온 섭리회의 유기서원자다.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프랑스의 식민통치 하에 있을 1876년 1월 12일 여섯 명의 섭리회 수녀가 지금은 깜뿌찌어 끄라옴이라고 부르는 메콩 강 남부 삼각주 지역, 당시의 코친차이나에 정착해 고아원, 학교, 보건소 등을 운영했다. 이후 급속도로 발전해 1880년부터 1925년까지 333명의 베트남 수련자를 양성했다.

1881년 두 명의 수녀가 프놈뻰에 진출했다. 노로돔 국왕은 수녀들을 만나 프놈뻰에서 자선사업을 해주길 바란다고 말하며 사도직에 적당한 곳의 땅을 선택할 수 있는 특혜를 베풀었다. 당시 프랑스 식민정부가 설립한 ‘환자 시술소’에서 수녀들의 도움을 필요로 해 의료 봉사를 했고, 동시에 유럽인들과 현지인들 사이에 태어나 버려진 혼혈아들을 위한 기숙사 사업을 시작했다.

또 일부는 주교의 요청에 따라 받담봉으로 가서 고아원과 병원을 열였다. 1955년 9월 20일 코친차이나 교구와 캄보디아 교구가 분리되자 그전까지 453여 명의 회원을 가졌던 섭리회도 캄보디아 관구가 분리되었다. 현재 캄보디아의 섭리회 수녀들은 대부분 베트남 출신이거나 베트남과 캄보디아의 국경지대 출신인데 2011년 꼼뽕짬 출신 크마애 수녀 한 명이 첫 서원을 했다. 베트남의 호치민에서 프놈뻰까지 버스로 다섯 시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이지만 Y 수녀는 평생 크마애들의 냉대 속에서 살아갈 비장한 각오로 선교를 왔다.

S 신학생은 쩜락 공동체 출신이다. 쩜락은 캄보디아 동부 꼼뽕짬 도의 오랑어으 군에 있는 마을이다. 예전에는 쩜락에 가톨릭 공동체가 없었다. 태국 국경의 난민촌에 피신해 있다가 전쟁이 끝나고 1992년 고향으로 돌아온 교리교사 치엉씨로부터 시작되었고 파리 외방 선교회의 퐁쇼 신부가 열정적으로 공동체를 일군 곳이다. 워낙 가톨릭의 존재가 없던 곳이라 신자들이 모이고 전례를 시작할 때 신자들은 주변의 불교 신자들로부터 오해와 핍박을 많이 받았다. 민족종교인 불교를 버리고 서양의 종교를 믿어 크마애를 져버린 매국노라 멸시를 받아온 곳이다.

이들 공동체의 기원과 역사는 캄보디아 근대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가톨릭 신앙 위로 프랑스 식민통치, 민족주의 해방운동, 공산주의, 친베트남 정권 등이 지나가며 상처를 남기고 신자들을 갈라놓았다. 지금은 식민통치도 끝났고 공산 이념도 끝났지만, 민족과 문화의 잣대가 신자들을 갈라놓는다. 2011년의 통계로는 10만 명 정도의 베트남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살고 있고 그 중 20퍼센트 정도인 2만 명 정도의 가톨릭 신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크마애들은 폴폿이 주도했던 붉은 크마애 정권에 대해서는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았던 개인적인 회고담을 나누어도, 가해자에 대한 격렬한 분노나 적개심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쁘람삐 마까라 이후 10년 넘게 통치했던 헹 삼린의 친베트남 정권에 대해서는 개개인의 고통과 체험보다는 베트남 전체에 대한 적개심이 앞선다. 붉은 크마애 공산 정권은 이념은 달라도 같은 민족이고, 쁘람삐 마까라 이후의 베트남 정권은 이민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지나친 민족적 이분법일까? 이런 경향들은 크마애 가톨릭 신자들 사이에도 은연 중 드러난다.

토론이 있은 다음 주, 학기말 고사에 “캄보디아 교회에 베트남 신자들의 유입 과정과 존재 의미, 그리고 그에 대한 교회의 자세에 대해 논하시오”라고 시험문제를 냈다. 학생들이 진솔하게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신학적 성찰을 했으면 하는 취지였다. 답안지 위로 지금 여기의 교회 현실과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 대안 등이 글자가 되어 시간에 쫓겨 급하게 달렸다.

하지만 글은 솔직하고 진지했다. 학점에 연연하거나 외국인 신부가 읽을 글을 쓴다는 느낌은 없었다. 베트남계이건 크마애이건 학생들 모두 그간의 식민통치, 이념, 종교, 민족 등의 흘러가는 기준으로 묶이고 갈라지며 받은 아픔을 토로하면서도 교회라는 더 큰 가치 안에서 화해하고 함께 더불어 살기를 바랐다. 그들의 염원이 그들 스스로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김태진 신부 (프란치스코)
예수회, 캄보디아 선교사

* 이번 회로 김태진 신부의 ‘캄보디아 선교 일기’ 연재를 마칩니다. 선교사로서의 생활과 성찰을 담은 따듯한 글을 보내 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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