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7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어느 유지가 와서 예수께 엎드려 말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오셔서 당신 손을 그 아이에게 얹어 주십시오. 그러면 그 아이가 살 것입니다.” 19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일어나 그를 따라가셨다. 20 그런데 보시오. 열두 해 동안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인이 다가와 뒤에서 예수의 옷단을 만졌다. 21 그녀가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22 예수께서 몸을 돌려 그녀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딸이여, 안심하시오. 당신 믿음이 당신을 도왔습니다.” 23 예수께서 그 유지 집에 가서 피리 부는 사람들과 애곡하는 사람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24 “물러가시오.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예수를 비웃었다. 25 사람들이 밖으로 나간 뒤 예수께서 방에 들어가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그 소녀가 일어났다. 26 이 소식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마태 9,18-26)

▲ ‘그리스도께서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산 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모자이크화 세부
식사중인 집(18), 길(19-22), 유지의 집앞(23-25), 집안(25) 등 4개의 장면이 이어져 있다. 대본인 마르코 복음서 5,21-43을 마태오는 무려 3분의 2나 축소했다. 자세한 상황 묘사가 대부분 사라졌다. ‘야이로’라는 이름, 동반하는 군중, 여인의 질병 역사, 제자들의 대화, 평화의 인사, 아람어 치유 단어, 소녀의 나이, 침묵 명령 등이 생략되었다. 믿음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부분은 남아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보셨다’(kai idon)가 22절과 23절에 두 번 나온다. 예수의 바라봄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는 고통 받는 사람을 눈 여겨 보신다. 관찰-판단-행동의 3단계 순서로 인간은 움직인다. 사람은 제일 먼저 무언가 ‘보아야’ 한다. 세상을, 가난한 사람을, 예수를 ‘보아야’ 한다.

마태오는 회당장(마르 5,22)이라는 호칭을 생략하였다. 고위 관리를 뜻할 수도 있으나 동네 유지를 가리키는 것 같다. 우리말 공동번역 성서에 “회당장”이라 번역된 것에 나는 찬성하기 어렵다. 엎드려 간청함은 그 유지의 간절함을 나타낸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누군들 남 앞에 엎드리지 않으리오.

19절에서 예수가 유지를 “따라가셨다”고 표현한 것이 특이하다. 고통 받는 사람의 뒤를 예수가 따른다는 것을 마태오는 강조하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서 5,23에서 죽어가는 소녀가 마태오 복음에서는 이미 사망한 상태로 보도된다. 간청하는 유지의 믿음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적을 행하는 사람을 모셔가는 모습은 거의 모든 소생 이야기에서 보인다(요한 11,3-, 사도 9,36-; 2열왕 4,25-).

유지의 집으로 가는 길에 어느 여인이 예수께 다가선다. 12년 동안 하혈병을 앓았다니 사회적 · 종교적으로 오래 소외된 여인이겠다. 소외된 여인은 가난한 여인이기도 하다. 그런 여인이 예수를 따라오는 것은 현실적으로 아주 힘든 일이겠다.

믿음이란 이 여인처럼 용기를 내어 예수께 다가서는 것이다. ‘실수와 오류가 섞인 이 여인의 믿음을 예수는 책망하지 않고 감싸주셨다’고 칼빈은 아름답게 말한다. ‘기도 없는 믿음은 존재할 수 없다’고 루터는 적절히 말한다.

이 여인을 예수는 “딸”이라 부르며 그녀의 믿음으로 인정하였다. 우리가 하느님께 다가서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우리 가까이에 오셨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려고 애쓰기 전에 이미 하느님은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보여주셨다. 하느님은 행동(action)을 취하시지만 인간은 반응(re-action)에도 서투르다.

질병 탓에 종교적으로 소외된 하혈병 여인에서 그리스도교의 여성 차별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생리 중인 여성은 파스카 축제 참여가 금지되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같은 이유로 여성사제품을 반대하는 사람들―특히 성직자들―이 많다. 생리 중인 여성이 어떻게 거룩한 미사를 집전하느냐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어이없는 그 이유에 말문이 막힌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세족례에서 여성의 발을 씻겨준 소식이 최근 화제가 되었다. 역대 교황 중 그렇게 한 사람은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새 교황에 대한 칭송에 앞서 그동안 부끄러운 관행을 이어온 가톨릭교회의 역사에 대한 뉘우침이 먼저 순서다.

가톨릭교회가 여성사제품을 계속 거부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지금 여성사제품을 시행한다 해도 지난 2000년의 죄과는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가톨릭 성직자들이 일상에서 여성을 평등한 존재로 대하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마음 속에서 남녀평등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깨닫고 있는지 더 큰 의문이다.

이스라엘에서 가난한 사람의 장례식에도 두 명의 피리 부는 남자와 한 명의 애곡하는 여인이 꼭 있었다. ‘잠’은 죽음의 비유로 사용되었다. 소녀의 죽음은 ‘가짜 죽음’이라고 계몽주의 시대에 잘못 해석되기도 했다. 예수의 부활 이후 공동체에서 예수 활동기에 부활의 예시(例示)로 지어낸 이야기일까?

고대와 중세교회에서 오늘의 단락은 주로 구원사적 비유로 해설되었다. 하혈병은 ‘우상숭배’로, 여인의 병을 그동안 고치지 못한 가짜 의사는 ‘철학’으로, 피리 부는 사람은 유다 백성을 오류로 이끄는 ‘율법학자’로 비유되곤 하였다. “피로 가득한 유다인들의 손을 깨끗이 하지 않으면 그들의 죽은 회당은 다시 살아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예로니모는 무섭게 말했다. 반(反) 유다 풍조에 갇힌 잘못된 해설들이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소녀의 이야기는 현대인들에게 설명하기 난감한 주제다. 경험 가능한 영역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부활을 꿈꾸라는 가르침일까? 예수의 능력에 대한 우리의 신뢰를 촉구하는 것일까? 적절한 맥락의 말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논리철학논고(Tractatus)>에서 한 말이 떠오른다. “말할 수 없는 분야에 대해 인간은 침묵해야 한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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