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6

14 그때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와서 “우리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자주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는 이렇게 답했다. “잔치에 온 신랑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 어떻게 슬퍼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에게서 곧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때 그들도 단식할 것입니다. 16 낡은 옷에 새 천 조각을 대고 깁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 천 조각이 낡은 옷을 찢어서 그 옷은 못쓰게 찢어지기 때문입니다. 17 또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그 부대는 터져서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습니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됩니다.” (마태 9,14-17)

단식(금식) 주제를 다루는 오늘의 단락은 14절 “그때(tote)”라는 낱말로 앞부분 ‘죄인들과 식사’ 부분에 내용상 이어져 있다. 단식을 죄인들과의 식사와 연결해서 생각하라는 마태오의 치밀한 배려다. 단식 질문, 천조각과 포도주 비유,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2,18-22 부분을 마태오가 손질하여 줄인 논쟁 대화다.

공식 단식과 개인 단식, 의무 단식과 자발적 단식이 당시 유다교에 유행했다. 바리사이는 월요일과 목요일에 규칙적으로 자발적 단식을 실천했다. 초대교회 문헌 디다케에는 그렇게 단식하는 사람을 ‘위선자’라 불렀다(디다케 10,1). 부끄러운 구절이다.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바리사이파의 관심을 대변하여 예수에게 질문한다. 세례자 요한은 금욕주의자(마태 3,4; 11,18)이며 바리사이파에게 제자들이 없다는 것을 당시 마태오 독자들은 이미 알겠다. 바리사이파에 제자 양성 제도는 없었다.

세례자 요한은 언제나 예수와 같은 편으로 마태오 복음에서 나타나는데 오직 여기에서 그 제자들이 예수의 적대자 편에 가담하는 모습이 특이하다. 유다교 내 여러 그룹과 예수가 갈등하는 모습을 소개하려는 마태오의 의도다. 예수는 탄생 때부터 처형될 때까지 갈등 속에서 살았다. 예수는 평생을 유유자적하던 윤리교사가 전혀 아니다.

▲ ‘율법학자들 가운데 선 예수’,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1506년)

“신랑”이 예수를 암시하는 비유다(마태 22,2; 25,1 이하). 단식과 슬픔이 15절에 나란히 이어져 있다. 마태오 복음서 5,4에서 이사야서 61,2를 인용한 것처럼, 여기서 ‘슬픔’은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자들의 반응이다(아모 1,2; 요엘 1,9 이하; 이사 16,8). 예언자는 불의한 역사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다. 단식 여부가 아니라 어떤 의도로 단식하느냐가 중요한 주제다. 마태오 공동체 일부 사람들도 이미 수요일과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단식하였다. 유다인에게 단식은 하느님 앞의 겸손, 회개, 기도라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예수의 제자들에게 단식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한다는 또 다른 특징이 여기에 추가되었다. 마태오에게 단식은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점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하느님 나라를 기다린다는 점에서 또한 미래 지향적이다. 죄인들과 식사를 재현하고 실천한다는 점에서 단식은 아주 현재적이다. 그런 세 특징이 바로 예수가 가르치는 진정한 단식이다.

단식은 그리스도교에서 특히 수도자들에 의해 큰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수도원 제도에 대한 개신교의 전반적인 의심 탓에 단식이 외면되던 시대도 있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가톨릭에서도 마찬가지로― 단식은 거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단식은 제3세계 가난한 사람들의 운명과 연결하여 생생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단식은 자본주의의 단점을 깨닫는 기회일 수 있다. 단식은 가난한 교회를 다짐하는 계기이기도 하다. 단식은 여전히 그리스도교에서 중요한 몫을 할 수 있다. 예수의 죽음 이후 공동체의 모든 시대는 사실 신학적으로 단식의 시대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습니다.” 새 포도주가 오래된 포도주보다 품질이 뛰어나다는 뜻은 아니다. 정치 신인을 위해 마련된 격언도 아니고 인용하는 사람에게 무조건 유리한 것도 아니다.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언제나 극복하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포도주가 새 포도주보다 더 높이 평가되기도 한다. 오늘의 단락에 ‘종교적 업적에서의 자유’라는 제목을 붙인 독일 개신교 성서학자 슈바이처(E. Schweizer)의 주장은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 은총이냐 행업이냐에 대한 논쟁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단락은 새 포도주(예수)와 새 부대(예수 공동체)를 둘 다 보존하려는 지혜를 가리킬 뿐이다. 새 술과 새 부대가 ‘보존’된다고 마태오만 유독 강조한다. 그런데 ‘새 포도주와 새 부대’를 놓고 갖가지 해설이 그리스도교 역사에 등장하였다. 초대교회의 이단아 마르치온은 공동성서(구약성서)와 복음을 대조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적 인간과 새로운 인간으로, 오리제네스는 율법과 은총으로, 루터는 율법의 의로움와 믿음의 의로움으로 대조시켰다.

본문에 근거한 적절한 해설에서 모두 상당히 벗어난 해설이겠다. 문맥이나 배경을 모르면 본문을 이해하기 어렵다. 성서에서도 콘텍스트(문맥, 배경)를 모르면 텍스트를 알기 어렵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에 대한 예수의 말을 유다교(오래된 포도주)와 그리스도교(새 포도주)의 품질 차이로 해석하려는 것은 지나치다. 예수가 유다교와 결별 선언하는 것처럼 과장하는 것도 역시 지나치다. 그런 잘못된 성서 이해는 마태오 복음 이후 1900년간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사이를 안타깝게 만든 가해자 역할을 하였다. 그런 영향에서 아직도 그리스도교는 자유롭지 못하다.

잘못된 성서 이해가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 오늘도 예수를 팔아먹는 장사꾼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유다교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비극적 역사―잘못된 성서 이해를 바탕으로 생긴 역사―를 오늘의 단락에서 되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철학자 산타야나의 명언처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과거를 반복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개인도 민족도 교회도 마찬가지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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