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이야기 - 백동흠]

“우-웅.” 바지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이 울린다. 떨리는 살에 파고드는 진동음이 쌉쌀하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문자메시지가 떴다. “OO문예 공모처입니다. 좋은 소식 못 드려서 죄송합니다. 부디 건필하시길 빕니다.”

“으-음.” 문예 대상 공모전 낙선 소식! 결국 발표했구나. 떨어진 모든 이에게 일률적으로 보내는 메시지를 받고 말았다. 개인적인 소식이 아니다.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진 나뭇잎처럼 나둥그러지고 있다. 비명도 아니고 한탄도 아니다. 그저 “으-음” 맥없이 삼키는 체념음이다.

순간, 꽉 다물어진 입술과 딱 굳어진 턱 밑 근육이 화석처럼 경직되고 만다. 한 가닥 기대도 휩쓸려 날리는 낙엽으로 날아가고 말았다. 비 오는 날씨에 스산한 기운까지 겹치니 세상 풍경이 무겁고 우중충하다. 차창 밖으로 바라다 보이는 바깥세상도 다 젖어 들고 있다. 도무지 시선을 제대로 둘 곳이 없다. 모두들 상관없이 따로 제각각이다. 세상에 이쪽 편이 없다. 외로운 섬에 서있는 앙상한 벌거숭이 나무 한 그루다.

봄이 아직인가. 뜰 앞에 화사하게 피었던 자목련 꽃잎파리들이 땅바닥에 널브러져있다. 내가 괜스레 민망해지고 만다. 햇살 따뜻한 날씨에 한껏 춘정을 내뿜다가 앞 다투어 꽃봉오리를 터뜨렸던 요 며칠. 그때만 해도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발길과 시선들이 그리도 반가웠는데 지금은 아예 무덤덤하다. 찬바람이 쌩쌩 불고 잎이 다 떨어지자, 꽃샘추위라고 발길마저 총총걸음이다. 뭐, 글 좀 쓰는가 싶었다. 신바람이 들려 제법 열중해서 다듬고 또 다듬었다. 얼추 됐나 싶어 세상에 내보냈다. 단방에 떨어졌다.

ⓒ박홍기

무작정 핸들 꺾이는 대로 몸을 맡기니 얼마 전 한번 들렀던 새로운 카페로 향해진다. 아직껏 잎새 돋지 않은 맨몸뚱이 나무가 내다보이는 창가에 자리를 잡는다. 뽀얀 우유거품 머금은 라떼 커피 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자 손 안이 따뜻하다. 한 모금 넘기려니 입 천장이 벗겨질 듯 뜨겁다. 맛까지 생나물처럼 쓰다. 문예공모전에 보낸 글맛이 이랬을까. 깊은 맛이 없고 아직 날 것 그대로다.

커피 잔을 물끄러미 바라다본다. 이것마저 이쪽 편이 아닌가. 원래의 맛, 쓴맛으로 마시려다 날 설탕 한 스푼을 집어넣고 휘 젓는다. 젓고 또 젓는다. 또 한 숟갈 집어넣는다. 마구 젓는다. 내 속이 휘 둘려진다. 잠재우고 진정시켜야지.

이 카페 옆을 우연히 지나다가 들렀을 때는 처음 문을 연 날이라서 손님들이 북적대는 분위기였다. 오늘은 의외로 한산하다. 카페 안쪽엔 근사한 인테리어, 편안한 비품, 그리고 상냥한 서비스로 괜찮을 성 싶은데 분위기가 영 다르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일까. 가격이 비싼 것도 아니잖아. 왜 그럴까. 커피나 마실 것이지, 별 생각을 다 하고 있다. ‘The Coffee Cafe.’ 혹시 평범한 이 카페 이름이 관심을 확 끌지 못했나.

반쯤 비어진 유리 커피 잔 바깥 면에 멍하니 앉아있는 얼굴이 어린다. 낯선 얼굴이다. ‘남 걱정하고 있네요.’ 자기 코가 석자면서 남 걱정은 무슨……. 문장 구성과 개연성과 문체가 좋아도 절실함과 간절함 섞인 뜨거운 공감이 없으면? 유연한 글 흐름이라도 클라이맥스가 없는 글이라면?

마음과 몸이 헛헛하기에 매운맛 짬뽕이라도 채워 넣으려고 중화요리 집으로 발길을 옮긴다. 그 음식점이 눈앞에 가까워지자, 코끝에 땀방울이 송글송글하게 맺히도록 얼큰하고 매운 짬뽕이 눈에 선하다. ‘한 그릇 비우고, 뱃속에 채우고 나면 좀 괜찮지 않겠어?’ ‘그럼, 그렇게라도 해야지.’ 속으로 주고받고 달랜다. ‘이 참에 누가 내 속 타는 것을 알까?’ ‘매운 짬뽕이나 얼큰한 육개장 한 그릇 먹고 싶다고 언제까지 기다릴 수도 없잖아.’ ‘그냥 내가 내게 사주는 거야. 그리고 달래야지.’ 생각이 제 멋대로 돌고 돈다.

음식점과 좀 떨어진 곳이지만 주차하기 편한 곳에 차를 세우고 일부러 걷는다. 걷기도 부족한 편이니까. 육중한 건물을 돌아 음식점 앞에 서자 “Closed”라고 쓰인 아크릴판이 유리문 안에 딱 하니 걸려있다. 마음을 정하고 기대한 곳으로 나아가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은 줄은 알겠는데…….

좀 더 걸어서 근처 다른 음식점으로 자리를 바꾼다. 한식 음식점이다. 맵고 얼큰한 순두부찌개를 시키자 잠시 뒤에 눈앞에 보글보글 순두부찌개가 끓고 있다. 한 숟갈 떠서 맛을 보니 속이 뜨겁고 확 깬다. 후루룩 불어가며 속을 채우니 콧등에 이슬 같은 땀방울이 맺힌다.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따뜻한 흰 밥 한 그릇을 들고서 보니 밥알 한 알 한 알이 글자로 보인다. 꼭꼭 씹어서 천천히 삼킨다.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왈칵 뜨거운 기운이 눈썹 밑을 치밀고 올라온다. 코끝이 아리고 싸해지면서 목울대마저 깊이 잠긴다. 한 문장, 한 단락, 한 페이지, 통째로 다 삼킨다. 이제 좀 빈 속이 채워지고 속이 뜨겁다.

음식점을 나오자 가벼운 비바람이 아직도 날리고 있다. 저 멀리 구름 사이로 한줄기 가는 햇살이 고개를 빼꼼히 내민다. 비바람, 구름 너머에 설핏 엷은 무지개가 얼굴을 붉히고 있다.
 

백동흠 (프란치스코)
뉴질랜드에서 택시 기사로 일하며 틈틈이 글을 쓰고 있다.

* 이번 회로 백동흠 선생의 ‘사람 사는 이야기’ 연재를 마칩니다. 그동안 뉴질랜드에서 살아가며 겪는 소박하고 따듯한 삶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보내 주신 필자께 감사드립니다. ―편집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