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5

9 예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시오” 하고 부르셨다.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예수를 따라 나섰다. 10 예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실 때 세리들과 죄인들도 많이 따라와서 예수와 그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게 되었다. 11 이것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당신네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합니까?” 하고 물었다. 12 예수께서 이 말을 듣고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합니다. 13 여러분은 가서 배우시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사가 아니요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나는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았고 죄인을 부르러 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9,9-13)

마태오를 부르심, 식사에서 바리사리파의 질문, 예수의 답변이란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2,13-17을 마태오는 크게 줄였다. “레위” 대신 “마태오”라는 이름, “바리사이파 율법학자” 대신 “바리사이파”로 바뀌었다. 세리(稅吏, 세금 공무원)와 죄인들이 예수께 다가오고 호세아서 6,6 인용이 덧붙여졌다.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의 구도는 마태오 복음서 4,18 이하와 일치한다(예수는 길을 걷다가 일상적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부르고 그 이름이 기록된다). 국경 마을 가파르나움에 세관 위치는 어울린다. 생선에도 관세가 붙었기에 세리들은 어부들에게 알려진 사람일 수 있다. 세금 걷는 과정에서 부패와 율법의 깨끗함 규정을 지키지 않았던 세리는 공식적으로 죄인이라 불렸다.

▲ ‘예수께서 세관을 떠나도록 마태오를 부르시다’, 산데르스 반 헤메센의 작품(1540년)

예수께 부르심 받은 사람은―마르코 복음처럼 레위로 나타나지 않고― 마태오로 등장한다. 마태오는 ‘하느님의 선물’이란 뜻이다(2열왕 24,17; 느헤 8,4). 초대교회부터 같은 사람에게 두 이름이 붙여졌다는 해설이 많았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두 아람어 이름이 붙은 사례를 거의 발견할 수 없다. 12 제자 명단에 레위는 없으므로 마태오로 바꾼 것이라는 해설이 요즘 우세하다. 즉, 레위와 마태오는 같은 사람이 아니다. 마태오 공동체에 마태오라는 사람이 알려졌기에 그렇게 이름을 바꾼 것이 아닐까. 마태오 복음에서 마테타이(mathetai)는 예수의 제자를 가리키는 데 65번, 12 제자를 가리키는데 9번 사용되었다. 마태오는 제자 개념을 폭넓게 생각한 것이다.

식사는 누구 집에서 열렸나. 세리가 초대한 식사(루카 5,29)라고 루카는 분명히 밝힌다. 우리말 공동번역 신약성서에는 “마태오의 집에서”라고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그 집이 예수의 집인지, 베드로의 집인지, 다른 사람의 집인지 마태오 복음에서 분명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죄인들이 예수께 다가왔다는 사실이다! 초대자의 호의로 열리는 식사는 보통 종교적 색채를 지니는 자리다. 그런 식사에 죄인들은 초대되거나 참석할 수 없다. 가파르나움처럼 작은 마을에서 그런 식사는 사람들 눈에 금방 보이겠다.

그러나 예수는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신다. 죄인들과 어울리는 예수는 율법 규정을 무시하고 다니는 셈이다. 그러니 유다교 지배층에게 예수는 미움의 대상이겠다. 유다교 지배층에게 예수가 미움 받는 두 가지 주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죄인들과 어울림, 둘째, 죄 사함.

바라사이파는 예수의 제자들에게 질문하는데 답변에 예수가 나선다. 바리사이파는 마태오 복음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예수의 적대자로 등장한다. 그리스 문화에 널리 퍼졌던 ‘의사’ 비유를 예수도 알고 있나 보다. 율법 규정을 지키지 못하고 부자들에게 가깝다는 이유로 의사는 당시 유다 사회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특정한 직업에 대한 선입견은 그리스도교 정신과 거리가 멀다. 자녀와 가족을 보살피기 위해 애쓰는 대부분 직업은 이미 ‘성직’이다. 성직은 종교적 직분에만 해당되는 단어가 아니다. 하느님을 의사로 표현한 구절도 있다(예레 8,2).

예수 말씀에서 의사가 아닌 병자가 주어로 등장하는 사실이 특히 중요하다. 병자는 객체로, 대상으로 취급당한 것이 아니라 당당히 주체로 존중되었다. ‘이웃’에 대한 예수의 말씀에서도 같은 논리가 적용되었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남을 그저 대상으로 여기지 않고 주체로 여기는 태도가 우리에게 중요하다.

“가서 배우시오”는 랍비 교육지침 중 하나다. “희생제사가 아니라 자비”(호세 6,6)는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성전에서 하느님께 제사 드리지 못함을 슬퍼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데 유다교 랍비 요하난 벤 자카이가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수는 그와 다른 의도로 호세아서 6,6을 인용하였다. 예수는 아주 강력한 종교비판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세상 모든 종교가 깊이 새겨도 좋은 말씀이다. 어느 종교에서나 종교인들은 그 무엇보다도 종교의식을 강조하려는 버릇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그렇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 비추어 예수는 특별히 종교적 인간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마태오 복음서 9,1-17에서 유다교 여러 그룹과 예수의 차이와 갈등이 드러난다. 율법학자들과 갈등, 바리사이파와 갈등, 세례자 요한 그룹과 갈등―세 가지 장면이 9,1-17에 차례로 소개된다. 그들과 다른 점에서 예수의 독창적인 면모가 점차 드러난다.

오늘의 단락에서 마태오는 제자를 부르심과 죄인들과의 식사를 곧바로 연결시켰다. 예수를 따름은 죄인들에 대한 태도 변화를 즉시 요구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신자 여부는 사회적 약자와 죄인을 바라보는 자세와 행동에서 폭로된다. 겉으로 아주 종교적 인간으로 보이는 사람이 사랑과 정의에서 거리가 먼 사람일 수도 있다. 종교적 직책을 맡은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마음으로 경멸하고 무시할 수도 있다.

사랑과 정의를 위해 교육용으로 만든 규칙들이 절대화되면 오히려 그런 규칙들이 사랑과 정의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변할 수 있다. 어떤 종교적 규칙도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진 않는다. 아무리 매일 미사와 새벽기도에 열심히 참석한다 하더라도 가난한 사람을 외면하거나 무시한다면 이미 헛짓이다. 목적과 방편을 구분하는 분별력이 그래서 중요한 것이다.

종교에서도 겉모습보다 속마음이 중요하다. “왜 당신네 신부와 목사는 부자와 어울려 식사를 합니까?”―그런 핀잔을 흔히 듣는 오늘이다. “왜 당신네 목사와 신부는 죄인들과 어울려 식사를 합니까?”―그런 소리를 자주 듣는 세상이 어서 오길 빈다.

사족 : 오늘 본 9장 9절을 근거로 세리 마태오가 마태오 복음서 저자라는 주장이 초대교회부터 있었다.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 저자는 예수를 직접 목격하고 같이 다녔다는 셈이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이 마르코 복음을 대본으로 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그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마태오 복음 저자가 누군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