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인생사]


그다지 인덕이 많은 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몇 친구와 후배들이 나를 좋아해 주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 중의 한 사람이 나보다 세 살 아래인 안토니오다. (안토니오는 누구나 선망해 마지않는 직장, KT의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얼마 전 그 인간한테서 전화가 왔던 거다.

“형. 아무 달 아무 시에 신부님 모시고 남자 세 명이 강원도 한 바퀴 돌고 옵시다.”
(여기서의 신부님은 박 모 신부님인데 우리랑 무지하게 친한 신부님이시고, 당신이 한 번 얻어먹으면 기어코 그 두 배를 사야 직성이 풀리는 까칠한(?) 신부님이시다. 그 뿐인가. 우리 어머님 돌아가셨을 때, 그리고 얼마 전 운태형이 돌아가셨을 때 끝끝내 시간을 내서 장지까지 따라와 주신 참으로 고집 센 신부님이시기도 하다.)
“나야 괜찮지. 그런데 자네 알다시피 내가 시종이 여일하게 프롤레타리아 아닌가. 그거 돈이 꽤 들 텐데 어떻게...”
“됐으니까 아무튼 알았지?”

전제 하건데 안토니오는 좋은 직장에 다니고는 있지만 사정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 말하자면 보증을 잘못 섰는지 어쨌는지 한 번 된통 금전적 생벼락을 맞은 바가 있고 지금도 그것을 갚느라 생활비를 쪼개는 입장인 것이다. 직장의 부하 직원은 모두 번듯한 아파트를 가지고 있는데 전세를 살고 있는 자신이 초라하다고 술만 먹으면 허허롭게 웃곤 한다. 그 모든 것을 참아주는 마누라가 너무 고맙다고 그런다. 그랬거나 저랬거나 아무튼 내 어디가 그리 좋은지 40대 중반을 넘긴 인간이 간혹 재롱을 떨면서 나한테 많은 것을 얘기한다. 난 그 인간이 너무 귀엽다. 좋다.

그리하여 며칠 전 우리는 안토니오의 꽤 오래된 누비라를 몰고 길을 떠났다. 그리고 안토니오는 끝까지 핸들을 놓지 않았다. (자기 말로는 남에게 핸들을 맡긴 적이 없다고 하지만, 신부님과 내가 편히 여행하기 바라는 배려라는 것은 어린 아이라도 알 일이다.)

거창한 술자리

첫날 저녁은 거창했다. 신부님의 대학 선배(신부님은 신학을 하기 전 경상도의 어느 대학을 졸업하셨단다)가 삼척의 공무원이며 꽤 부자였던 관계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부님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엄청난 안주(그것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닌 생선들로 이루어진 ‘회’였다)를 바탕으로 하여 쐬주를 빨아대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서비스라고 내어 놓은 그 희귀하다던 고래 고기는 별로 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고래 고기 애호가님들께서는 나를 비웃거나 조롱하지 마시기 바란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나는 고래 고기보다 소주가 더 맛있는 인간이니까...)

그 신부님의 선배님은 대리운전 기사까지 불러 주었다. 말이 대리 운전이지 삼척에서 우리의 숙소가 있는 고개 넘어 정선 스키장까지 가야 하는 거리였다. 대리운전비는 칠만원이었고 나는 너무 미안해서 취한 척 하기 시작했다.

“음냐 음냐... 신부님... 여기가 어디입니꺄?”
“이름은 모르겠지만 정선으로 가는 고개를 넘고 있는데요.”
“야 안토니오.. 대리운전비는 어떻게 된 거야?”
“음냐 음냐... 나도 몰라.... ”
“엉? 이거 혹시 그 선배님이... 신부님. 그런 겁니꺄?”
“맞아요.”
“아니 이거 미안해서... 저는 기억이 나지 않는 관계로... 알았으면 제가...”
“괜찮습니다.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요 뭐. 오히려 우리 선배가 오랜만에 좋은 분들 만나서 즐거웠다고 고마웠다고 하던걸요.”
“아 이거 인생은 가오와 의리이거늘 참... 음냐음냐.”

내 주머니에 돈이 별로 없다는 것을 신부님이 모르실 리가 있을까. 개그 프로그램 같은 취중 만담을 한 차례 즐기고 우리는 안토니오가 잡아 놓은 숙소에서 일박을 했다. (하... 그러고 보니 참 몸만 왔다는 일종 미안함이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의 사전에 미안함이 어디 있는가. 대자로 누워서 자알 잤다.)

하지만 벼룩도 낯이 있고 자이로 드롭도 스톱 하면서 떨어지는 법, 다음날 나는 일행을 채근하여 묵호의 곰칫국 집에서 밥을 샀다. (한번들 드셔 보시길 바란다. 그 부드러운 곰치 살과 시원한 국물이 온 몸을 휘감는 해장의 짜릿함이라니... ) 그리고는 그 날 유일하게 장이 선다는 철암으로 강원도의 장 구경을 하기 위해 떠났다. 그리고는 아... 탄광을 보았다.

철암 채탄장에서, 그 사내

철암 장이라고 해서 간 철암 역 앞의 작은 시장에는 몇 대의 1톤 트럭이 옷가지 등을 팔고 있었고 거의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런데 바로 옆의 석탄 공사 작업장이 담벼락의 길이만 보더라도 엄청난 규모인 듯 하여 맞은편의 언덕에서 그 곳을 구경하리라 마음먹고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나 어렸을 때 신설동이나 청계천, 혹은 돈암동이나 청량리 등지에서 봤던 판잣집들이 그 곳에 있었다. 버려진 연탄재며 노랗게 시들어 버린 파, 상추 이파리, 이리저리 구불대는 판자 울타리 하며 우리를 비켜 한 곳에 서는 초로의 병약한 사내... 을씨년스럽다 못해 서럽기 까지 한 그 풍경들은 그러나 나의 어린 시절을 엮어대던 바로 그 광경들이었다.

참으로 시대에 역행하는 생각이지만 나는 그 풍경들이 지독하게 반가웠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 채탄장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온통 검은 색이었던 그 곳에서는 쉭쉭하는 스팀 소리와 덤프트럭의 엔진이 기를 쓰는 소리, 간헐적인 해머 소리가 멀게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은 작업하고 있었고 나는 구경하고 있었다. 그리고 난데없이 프랑스의 명배우 제라르 드 빠르디외가 주연했던 ‘제르미날’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커먼 광산을 배경으로, 얼굴에 검정을 묻힌 일단의 노동자들이 당당하게 걸어오는 그 장면과 철암 채탄장의 (전혀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기계들이 지들끼리 속삭이는 듯한) 모습이 대비 되면서 불현듯, 지금껏 큰 죄를 짓고 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독사처럼 대가리를 치켜들고 있음을 느꼈다.

병약한 초로의 사내에게 물었다.
“저 공장 덕분에 지역 경제가 그래도 돌아가겠습니다.”
“... 그럴 것 같으면 왜 동네가 이렇게 비어 있겠소?”
“그렇다면...”

나는 그 사내가 턱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그 곳에는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브랜드의 고층 아파트가 우람하게 서 있었다.
“공장 사람들은 저기 살걸요 아마...”

그 말을 끝내고 사내는 내려갔다.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일행은 입을 다물었다.
정선 카지노 때문에 정선 시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저 채탄장 때문에 철암 군민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대기업 때문에 국민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대기업에 다닌다고 해서 그 사람이 행복한 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우리 노동자들은 언제 쯤 행복해질 수 있을까...

김장철이 되면 서로 제 집 김치를 맛 보여주려고 이 집 저 집 뛰어다니던 내 어렸을 때의 그 허름한 골목들이 진정 그립다.

변영국/ 토마스 아퀴나스, 서울 수송국민학교를 졸업했으며 희곡 쓰고 연출하는 연극인인 동시에 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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