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가톨릭농민회 이민수 씨와 두 딸 이안 · 이선

엄마 이민수 크레센시아 씨는 분주히 짐을 꾸린다. 밀양에서 송전탑 반대투쟁을 하던 가톨릭농민회 회원이 전날 새벽 경찰에 끌려갔기 때문이다. 가톨릭농민회에서 홍보를 담당하는 엄마는 회원의 석방을 촉구하는 미사를 위해 밀양 경찰서로 달려갈 준비를 하는 것이다. 엄마를 지켜보던 7살 둘째 딸이 서운함을 드러낸다.

“왜 엄마만 혼자 밀양 가는데? 같이 가야지. 만날 혼자 여행가구. 우리는 안 데려가고. 히잉~”

순간, 짐을 싸던 엄마는 긴장이 풀린다. 웃음이 난다. 딸은 엄마가 가는 밀양이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다. 이미 4번이나 다녀왔기 때문이다. 송전탑 공사를 위해 나무를 베어낸 산 위가 7살 아이에게 편하고 재미있는 여행지는 아니었을 텐데. 그래도 딸은 엄마가 여행을 간다고 생각한다.

딸의 이름은 가이선(니노). 어딜 가나 붙어다니는 두 살 위 언니의 이름은 가이안(클라우디아)이다. 아빠의 성 ‘가’와 엄마의 성 ‘이’를 함께 쓰고, ‘선’과 ‘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 (왼쪽부터) 가이안, 이민수, 가이선 ⓒ문양효숙 기자

주변 어른들은 이 자매를 ‘야니써니’라고 불렀다. 취재현장에서 종종 자매를 스치듯 만나곤 했다. 맨처음 눈에 들어온 건 서울광장에서 열린 탈핵 집회였다. 자매는 천주교에서 마련한 부스에서 열심히 배지를 만들고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있었다. 대한문 미사에서도 종종 보였다. 하물며 타는 듯 뜨거웠던 강정 생명평화대행진에서도 땀을 뻘뻘 흘리며 걷는 자매를 만날 수 있었다.

처음엔 티벳 아이들이라고 생각했다. 록빠(ROGPA, 티벳 난민을 돕는 활동을 하는 한국 단체) 사람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본 데다 까무잡잡한 피부, 게다가 이름도 ‘야니써니’라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국적을 착각한 건 이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자매는 기운이 남달랐다. 어디에 있든 자연스럽고 평화로웠다. 항상 다른 어른들과 손을 잡고 있어서 엄마가 누구인지도 아주 늦게야 알았다. 결정적으로 어른들과 함께 있을 때 자매는 ‘보호자와 어린이’가 아닌 ‘친구’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 모녀가 궁금했다.

자신보다 더 열심히 사는 엄마와 착한 아이들도 많다며, 인터뷰를 쑥스러워했던  민수 씨와 야니써니를, 구본주 작가의 전시회가 열리던 날 성곡미술관에서 만났다. 자매는 나름 진지하고도 즐겁게 이리저리 작품을 관람하고 있었다.

처음 시작은 두물머리였다. 아이쿱 생협에서 일하던 민수 씨는 팔당에서 농민들이 밀려난다는 뉴스를 접했다. 같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녹색당 SNS를 통해 두물머리에서 감자 심기 행사를 신청했다. 그때부터 매주 일요일, 두물머리 미사에 왔다. 민수 씨는 “처음엔 약속이 가장 컸다”고 말했다.

“록빠 친구들이 야니써니한테 ‘다음 주에도 만날까?’ 하면 애들이 ‘응’ 했어요. 애들이 약속을 지키게 해주고 싶었죠.”

그렇게 만난 두물머리는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공간이 됐다.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낭만적인 것 같아서 투쟁하셨던 농민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두물머리는 꿈의 동산이었어요. 차에서 내리면 두 아이는 사라졌어요. 제가 농사짓는 동안 애들은 록빠 언니 오빠들을 비롯해서 사람들이랑 놀았죠. 아마 그때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완전히 없어진 것 같아요. 언제나 가고 싶고, 갔다 오면 생각나고, 그런 곳이에요.”

민수 씨 옆에서 언니랑 놀던 야니가 서운하다는 듯 말한다.

“이제 두물머리 안 가는데.”
“엄마랑 일요일마다 두물머리 가는 거, 야니는 좋았어?”
“응.”
“뭐가 제일 재밌었는데?”
“토마토 심었어. 감자도 심어보고.”

▲ 작년 두물머리 미사에서 이민수 씨와 이선 (사진 제공 / 이민수)

두물머리에서 밀양 소식을 듣고 탈핵희망버스에 올랐다. 도시에 산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짓밟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많이 울었다”고 했다. 딸들과 함께 가는 ‘여행지’는 제주 강정마을로 이어졌다. 사람들을 만나고 친구가 됐다. ‘혼자서 정말 잘 노는 사람’이었다는 민수 씨는 “사람이 정말 소중하다는 걸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좋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고, 만나는 세상이 넓어지면서 세상을 보는 눈도 더 깊어졌다.

“어린 아이 둘을 데리고 몸을 움직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아요.”
“처음엔 아이들을 어디 맡길 데도 없고 해서 같이 움직였는데, 애들이 의외로 좋아하네요. 그리고 왠지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요.”

민수 씨는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순간이고 내일은 없다는 생각이 점점 커진다”고 말한다.

“내일 무슨 사고가 날지 모르잖아요. 탈핵운동하면서는 핵이 언제 터질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그러니 만남 하나하나가 소중해져요. 아이들도 지금 이 순간 가장 사랑해주고 싶고요. 현장도 마찬가지예요. 늘 ‘다음 기회는 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싶어요.”

지금은 귀농을 꿈꾸지만, 민수 씨는 도시에서 나고 자라 농사나 생태적인 삶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던 사람이었다. 지금은 두 아이의 엄마에게 금쪽과도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대한문 앞 미사에 달려오지만, 2년 전만해도 거리 미사를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나 자신도 이런 변화가 놀랍다”면서 “무엇보다 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예전에는 돈이나 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거든요. 지금은 믿음이 생겼다고나 할까요. ‘하느님께 맡기자’ 이렇게요. 예를 들면, 제주도에 애 둘을 데리고 가는데 방이 없잖아요. 그러면 ‘에이, 가면 해결되겠지’ 해요. 믿음이 생겼지요.”

▲ 제주 강정마을에서 이안(오른쪽)과 이선 (사진 제공 / 이민수)

엄마와 함께 다녔던 야니써니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지금은 엄마 없이도 어른들이랑 잘 지내고 누구에게나 거침없이 궁금한 걸 물어보지만, 사실 자매도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도시 아이들’이었다고.

“마중물연구소에서 하는 2박3일 에코 피정에 들어간 적이 있어요. 이선이만 데리고. 다른 조에 조원으로 들어가서 어른들이랑 똑같이 이야기를 나누더라고요. 지루해하지도 않고. 문규현 신부님은 이선이를 ‘내 친구’라고 불러주셨지요.”

야니써니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어른들의 미사에 끝까지 앉아있고 강론을 귀담아 들었다. 가끔 민수 씨가 무언가를 물어봤을 때, “그거 하느님이 주셔서 그러는 거야”라고 답하거나, 전혀 듣고 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평화가 뭐냐면”하고 강론 시간에 들은 이야기를 할 땐, 깜짝 놀라기도 한다고. 민수 씨는 “거리와 현장에서 배운 신앙은 좀 다른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 전, 민수 씨는 오래 전 지인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아이를 그렇게 키우면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메시지에는 ‘나도 진보에 많은 돈을 내고 있지만, 아이는 그렇게 편협하게 키우면 안 된다’고 적혀 있었다. 민수 씨는 ‘고맙다. 잘 살겠다’고 답을 보냈다.

“예전 같으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했을 텐데, 제가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내가 나를 정리하고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된다 싶었죠.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나는 진보인가? 정치적 색깔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그럼 나는 애들을 편협하게 키우나? 생각해보니 내가 한 건 의자에 앉던 애들을 바닥에 내려놓은 것밖에 없더라고요. 나머지는 애들이 자기 직관으로 보고 이야기하고 반응하는 거죠.”

민수 씨는 간혹 아이들이 학교 생활하면서 부딪힐 문제가 걱정될 때도 있지만. 결국 아이들이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만날 것이라고 믿는다.

“얼마 전에 애들이 ‘경찰, 나쁜 사람이야’라고 하더군요. 생각해보니 아이들은 ‘나쁜 경찰’을 많이 봤잖아요. 그러니 보이는 대로 말한 거죠. 나쁜 행동 많이 했고, 권력을 휘둘렀고. 그러니 애들이 느끼는 대로 반응하는 것 뿐이에요. 나중에 자기 생각과 부딪히는 부분이 생기면 스스로 풀어갈 거예요.”

그는 “그저 세상을 보여줄 뿐”이라고 말한다.

“저는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을 다 보여주고 싶어요. 풀밭에 살인 진드기가 많으니 애들 앉히지 말라고 할 때, 이선이는 그냥 철퍼덕 앉아요. 행진 할 때 ‘엄마, 쉬’ 하더니 풀 속에서 오줌을 누고, 땀에 흠뻑 젖은 어른들한테도 아무 거리낌 없이 달려가 안기지요. 아스팔트 위에 그냥 드러누워요. 아무렇지 않게. 이게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진짜 모습 아닌가요?”

“어떻게 살고 싶으세요?”
“가볍게, 자유롭게요. 다 내려놓고. 조금씩 조금씩 밑으로 내려와서 같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나가고 싶어요.”

▲ 밀양에 다녀온 엄마를 대한문 앞에 만났다. 오른쪽부터 이선, 이민수 씨 (사진 제공 / 이민수)

곧 9월이다. 아침저녁 공기는 이제 여름을 지나갔다고 말해준다. 지리산에서, 강정에서, 대한문 앞에서 뜨거운 여름을 누구보다도 뜨겁게 보낸 야니써니에게 올 여름 가장 즐거웠던 기억이 무엇인지 물었다. 자매는 약속이나 한 듯, “제주도 걸은 거”라고 답한다.

“난 무지 덥고 힘들던데, 야니써니는 힘들지 않았어?”
“안 힘들었어. 나 버스 한 번도 안 탔어.” (가이선)
“아! 나 또 재밌는 거 생각났다. 무대에서 강정댄스 춘 거.” (가이안)
“바닷가 간 것도 재밌었어.” (가이선)

짧은 만남이었다. 서로에게 허락된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아니, 실은 이 맑은 기운을 지닌 자매와 더 많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야니써니가 걸었던 곳에서 만난 것이 무엇인지, 그 투명한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것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인사를 나눈 뒤 엄마와 이모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궁금함과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아이들은 앞으로도 저렇게 누군가와 손을 잡고 세상을 만나며 평온하게 걸어 나갈 것 같았다.

딸들을 만나러 대한문으로 오는 지하철 안에서, 밀양에서 체포됐던 가톨릭농민회 회원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울었다. 아이들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대한문에서 딸들을 만나자 참았던 눈물이 다시 솟았다. 이틀 만에 엄마를 만난 야니써니가 말한다. “엄마. 다음에 밀양 같이 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