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4

1 예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 자기 동네로 돌아오셨다. 2 사람들이 침대에 누워 있는 한 중풍 병자를 데려왔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 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아가야, 안심하여라. 네 죄가 용서 받았다”하고 말씀하셨다. 3 그러자 율법학자 몇 사람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이 사람이 하느님을 모독하는구나.” 4 그러자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여러분은 마음속에 악한 생각을 품고 있습니까? 5 ‘당신이 죄를 용서 받았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쉽습니까, 아니면 ‘일어나서 걸어가시오’하고 말하는 것이 더 쉽습니까? 6 사람의 아들이 땅 위의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갖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당신 침대를 들고 집으로 가시오.” 7 그러자 그는 일어나서 그 집으로 돌아갔다. 8 군중이 이것을 보고 두려워하며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마태 9,1-8)

▲ ‘그리스도께서 중풍 병자를 고치시다’, 산 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모자이크화 세부
‘이스라엘 지배층과 예수의 갈등’(마태 9,1-17)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부분에 속하는 단락이다. 병자와 만남, 율법학자들과 만남, 군중과 만남 등 각기 다른 사람과 세 만남으로 이루어졌다. 마태오는 다시 마르코 복음서의 부분을 크게 줄였다. 집, 예수 설교, 네 사람이 병자를 데려옴, 지붕을 통해서 병자를 내려옴이 생략되었다. 치유가 집이 아니라 길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특이하다.

마태오는 치유 사건 자체보다 병자와 예수의 대화에 더 중심을 둔다. 독자에게 그 대화에 집중하라는 마태오의 깊은 배려다. “하느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마르 2,7)가 빠진 것이 두드러진다. 예수의 죄 사하는 능력을 강조하려는 마태오의 의도다. 편집자의 의도를 알아야 독자는 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동네다. 국경 마을로서 이방인들이 많이 산 곳이다. 예수가 열두 달 이상 그곳에 살아서 주민으로서 권리를 얻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자세한 내용에 마태오는 관심이 없다.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후 예수는 나자렛에 머물지 않고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산다(마태 4,13). 마태오는 거기서 예언자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이방인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이사 9,1). “그때부터 예수는 전도를 시작하여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마태 4,17). 가파르나움은 예수의 복음 선포가 시작된 신학적 의미가 있는 땅이다. 의미 없는 땅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 그 어디에 있으랴만.

예수는 수도권 출신이 아니라 변두리 지방에서 경계인으로 살았다. 예수는 어릴 때부터 외국인과 접촉이 잦았을 것이다. 세상 중심이 아니라 변방에서 사는 사람들을 두루 알았을 것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은 크게 바뀐다. 나는 살면서 누구를 만났는가.

오늘 중풍 병자는 침대(kline)에 누운 채 예수를 만났다. 클리네(kline)는 가난한 사람들의 침대(krabbatos)와 다른, 푹신한 깔개가 있는 고급 침대를 가리킨다. “아가”는 마태오 복음에서 여기에만 나타나는 표현으로, “안심하여라”(마태 9,22; 14,27)로 더욱 위로받는다. 그러한 표현은 공동성서(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연결되어 자주 나타난다(탈출 14,13; 요엘 2,21; 즈카 8,15). 예수는 그런 맥락에서 병자를 위로하는 것이다.

병자에게 죄 사함을 말하는 뜻은 무엇일까. 병과 죄의 의학적 관계를 말하는가. 병은 죄와 깊이 이어져 있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병을 죄에 대한 하느님의 벌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선한 사람도 언제가 병에 걸리고 죽는다. 오늘 단락에서 병 고침은 죄 사함의 차원으로 드러난다. 전인적(全人的) 구원은 병과 죄에서 해방을 모두 포함한다.

유다인이 고대하던 메시아도 죄를 사할 수는 없다고 유다인들은 생각했다. 죄 사함을 운운하는 사람은 하느님 모독죄로 사형감이다(민수 15,30; 레위 24,11). 병자 치유 사건은 어느새 뒤로 물러나고 예수와 율법학자들과 죄 사함에 대한 논쟁이 등장한다. 유다교 지배층과 갈등을 일으키는 중요한 주제인 ‘죄 사함’ 부분이 오늘 등장한다. 마태오 공동체에서 이미 널리 실행되던 죄 사함 관행이 8절 “사람에게 이런 권한을 주신 하느님”에 반영된 것 같다. 당시 유다교 지배층은 그런 관행을 당연히 비판했을 것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죄 사함은 오직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오늘의 단락에서 잘 파악하였다. 선하고 정의롭게 살려는 인간의 노력은 죄 사함을 획득하기 위한 자료로 하느님께 제출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노력은 죄 사함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하는 것이다. 가톨릭 신자들은 인간의 선행과 노력으로 구원을 획득할 수 있다는 잘못된 통념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개신교 성도들은 선행을 게을리 하지 말고 하느님의 은총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능력 안에서 죄 사함이 공동체(교회)에서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은 오늘 군중의 환호를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군중이 부정적으로 나타나는 곳도 있지만(마태 10,17.33), 군중이 언제나 부정적으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마태 15,31; 27,54). “군중이 두려워서”(마태 14,5), “예수를 잡으려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워서 손대지 못하였다. 군중이 예수를 예언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마태 21,46)처럼 유다교 지배층과 군중이 정면으로 맞서는 곳도 있다.

성서에 등장하는 다양한 모습의 군중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활발하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군중에 대한 믿음과 배신감 때문에 예수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괴롭다.

군중을 그저 예수를 바라보는 구경꾼 정도로 여기는 설교자들이 많다. 군중의 눈으로 예수를 보는 신학 책은 많지 않다. 성서에서 두 주인공이라면 곧 예수와 제자들이라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한다. 그러나 성서의 두 주연 배우는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이다.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 도구에 불과하다.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가난한 사람들이 제자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런 기초적인 사실을 혼동하는 종교인들이 수두룩하다. 제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 생긴 것은 전혀 아니다. 제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종이다. 교황은 그래서 ‘종들의 종’(servus servi)이라 불린다. 호칭만 그렇게 하지 말고 행동으로 그렇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사람의 눈으로 예수를 보려는 노력은 아직 걸음마 수준이다. <슬픈 예수>는 그 작은 시도에 속한다.

우리가 하느님을 알기 전에 하느님은 스스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알려주셨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모셔왔다고 전임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적절히 말했다. 오늘 단락에서 병자를 예수에게 데려다준 사람들의 공적을 잊지 말자. 그들은 예수에 대한 믿음, 병자에 대한 애틋한 마음에서 무거운 침대를 들고 예수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내 삶에서 누군가 나를 예수께 데려다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 얼마나 고마운 분인가.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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