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로 읽는 헌법 - 13]

슬아, 혹시 주위에 자살을 했거나, 자살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친구가 있니? 혹시 너도,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이라도 해봤니? 아니면, 저 사람이 죽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해 봤니?

오빠는 요즘 이런 생각이 들어. 한국 사회에서 나이 30세가 될 때까지 ‘자살’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을까? 있다면, 얼마나 될까?

얼마 전, 2009년에 초 · 중 · 고생 자살이 47% 급증했다는 기사를 봤어. 최근에는 카이스트 학생들이 자꾸 자살을 해서 사회문제가 되었었지. 노인 자살율도 높아지고 있대. 20대 남성과 여성 자살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부장판사도 자살하고, 의사도 자살한대.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는 걸까? 50년 넘게 민주화투쟁을 거쳐 이룩한 ‘민주공화국’이 이제 ‘자살공화국’이 되었다면, 이건 너무나 억울한 일 아닐까?

앞에서 본 헌법 제10조를 다시 한번 보자꾸나.

헌법 제10조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져요.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집니다.

헌법은 우리 사회 구성원 누구나 인간의 존엄성을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해. 그러면 이렇게 자꾸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게 되고 자살률이 늘어나는 것에 대해서 국가도 뭔가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헌법 제10조 제2문을 보자. 국가는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보장할 의무가 있다고 하잖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국가가 기본적 인권 보장 의무를 잘 수행하고 있지 않는 것 아닐까?

여기에는 헌법재판소의 판시(* 헌법재판소 1997. 1. 16. 90헌마110등)가 있어.

“국가의 기본권보호의무의 이행은 입법자의 입법을 통하여 비로소 구체화되는 것이고 국가가 그 보호 의무를 어떻게 어느 정도로 이행할 것인지는 원칙적으로 한 나라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적인 제반 여건과 재정사정 등을 감안하여 입법 정책적으로 판단하여야 하는 입법재량의 범위에 속하는 것입니다.”

“국가의 보호 의무를 입법자가 어떻게 실현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입법자의 책임범위에 속하므로, 헌법재판소는 권력분립의 관점에서 소위 과소보호금지원칙을, 즉 국가가 국민의 법익보호를 위하여 적어도 적절하고 효율적인 최소한의 보호조치를 취했는가를 기준으로 심사하게 됩니다.”

이것은 곧, 보호의무의 이행과 관련하여 국가는 국민에게 최적의 보호를 제공할 의무를 지지만, 그 이행여부의 통제에 있어서는 통제기관인 헌법재판소는 필요한 보호의 최소한을 통제함에 그친다는 거야. 쉽게 말하면, 국가가 ‘사실상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기본권 보호의무를 위반한 것으로 판단되는 셈이야. 헌법재판소의 위 판결은 지금까지도 유지되고 있고, 유명한 소위 ‘미국산 광우병 쇠고기 수입 고시 헌법소원 사건’〔* 헌법재판소 2008. 12. 26, 2008헌마419 · 423 · 436 (병합)〕에서도 같은 논리로 국가의 고시상의 보호조치가 국민에 대한 기본권 보호의무를 명백히 위반한 것은 아니라고 판시했어.

그러면 결국 높아지는 자살률에 대한 국가의 책임은 없는 걸까? 슬아, 우선 자살 문제에 대해서 처음부터 차근차근 이야기해보자.

자살이 많은 사회. 그것은 반대로 이야기하면 생명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라는 말이 되지 않겠니? 생명은 등가성을 가진다고들 이야기하지만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도 해. 분명히 존재가치가 있는 생명과 존재가치 없는 생명을 구별하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오빠는 이런 질문을 던져 보고 싶어.

‘공부 못하는 초 · 중 · 고생’은 ‘존재가치’가 있니? 없니? 많은 초 · 중 · 고생들이 자살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그 자체로서 존재가치가 충분하다고 대우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기인한 것이 아닐까? 혹시 우리 사회는 ‘존재가치가 있는 생명만이 존재가치가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사회 구성원들이 ‘존재가치’를 갖게 되는 데 매우 심한 압박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범죄율과 자살률의 관계를 연구해온 미국 뉴욕대 정신의학자 제임스 길리건 교수에 따르면, ‘수치심’이야말로 범죄 유발과 자살 충동을 일으키는 중요한 동기라고 해. (* 제임스 길리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교양인, 2012)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은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의 문화가 구성원들에게 ‘수치심’을 많이 안기는 문화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아. 청소년 자살률이 높은 건, 당연하게도, 그 예민한 시기에 옆 친구보다 더 나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에 가라고 비인간적으로 강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요즘 부각되는 청소년 폭력 문제도 같은 맥락일 거고.

국가가 이런 문화를 바꾸기는 어렵지 않을까? 결국 구성원들이 조금씩 그 문화를 바꿔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슬아, 이 말은 꼭 하고 싶어. 국가가 헌법 제10조에서 보장하고자 하는 너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존엄성이, 이 사회 전체가 유지하고 있는 총 지적 역량과 사회체제와 GDP 같은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보다 훨씬 크단다. 정말이야. 헌법 제10조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이고. 너의 존엄성을 부정하려 드는 모든 사람들은 위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거란다. 정말로.

슬아, 약속해 줄래? 힘들 때 연락해 주기로. 오빠가 들어줄게, 정말로. 아무리 바쁘고 여유가 없어도. 왜냐하면 오빠가 하는 모든 일들보다 네가 더 중요하니까. 부탁해, 슬아.
 

 
차진태 (모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재학 중이며, 구속노동자후원회 자문위원, 대학원자치회 대표를 맡고 있다. 예수살이공동체에서 배동교육(청년교육)을 받은 회원이며, 서울대 가톨릭 기도 모임 ‘피아트(FIAT)’에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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