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종교의 향기 - 13] <우리의학 이야기> 펴낸 생명누리 대표 정호진 목사

▲ <우리의학 이야기> 출간한 정호진 목사 ⓒ문양효숙 기자

“우리의학은 동양의학에 포함되지만 전통 한의학과 똑같지 않아요. 음양오행론에 기반한 전통 한의학에 건강도인술(몸이 안 좋았던 퇴계 이황 선생이 많이 쓰던 체조법), 기공술, 신체교정술 등의 생활건강법, 그리고 손침, 귀침 등의 민간요법 두 가지를 합쳐서 우리의학이라 부를 수 있겠네요.”

테이블 건너편에 앉아 우리의학에 관한 설명을 술술 풀어놓는 이는 한의사가 아니라 목사다. 정호진 목사는 지난 7월, 오랫동안 연구하고 강의해 온 내용을 쉽게 정리해 <우리의학 이야기>(2013, 생명누리 출판부)라는 책을 출간했다.

자신의 몸을 치료하기 위해 배우기 시작한 우리 의학,
농촌에서 ‘명의’로 소문나며 강의 시작해

정 목사가 ‘우리의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단순히 지적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신학대에 다니던 시절부터 몸이 좋지 않았다. 넉넉지 못한 형편에 잘 먹지도 못했거니와 신문 배달을 하며 중졸 · 고졸 검정고시를 치르는 동안 몸은 이미 망가져 있던 터였다.

요가 지도자를 만나 호흡과 명상, 단식과 식사법 등을 배워나갔다. 이후 박사과정에 들어가 공부와 강의를 병행하던 그에게 류머티스성 관절염이 찾아왔다. 양방병원과 한방병원을 다 찾아다녔지만 증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개를 받고 찾아간 침술사에게 부항과 침뜸 치료를 받으며 상황이 나아졌다. 침술사는 정 목사가 스스로 치료할 수 있도록 차근차근 방법을 알려줬다.

1990년대 초, 정 목사는 서울을 떠나 거창에 자리를 잡았다. “내 신학이 현장과 결합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농촌에서 필요하리란 생각에 손침을 비롯한 의학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거창에서 농사지으며 지인들이 아플 때 손침과 뜸으로 치료하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명의’로 소문이 났다.

“사람들이 저한테 뭘 가르쳐 달라는 거예요. 당시엔 제가 뭘 가르칠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거절했거든요. 그런데 요청이 반복되면서 ‘아는 만큼만 하자’ 하는 마음이 들었어요. 커리큘럼을 만들어서 강의를 시작했는데 결국엔 그게 저한테도 많은 도움이 됐죠. 서로 배우면서 가르쳤거든요. 누가 증상을 호소하면 며칠씩 끙끙대면서 책을 찾고 공부하곤 했어요.”

‘명의’의 소문은 금세 퍼졌다. 정 목사는 전국으로 강의를 하러 다녔다. 농촌에서의 10년이 “한편으로는 생명농업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학을 더 많이 공부하게 된 시간”이라 했다.

농사를 지으며 의학 공부를 하는 동안, 정 목사는 아픈 사람에게는 병원이 얼마나 큰 권력자가 되는지 뼈저리게 경험했다. 아픈 이들은 병원과 약, 혹은 수술 외에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의료 공급자인 의사의 이야기는 곧 법이었고, 의료 소비자는 언제나 주눅 든 ‘을(乙)’이었다.

“사법시험이 있을 때는 누구나 그 시험을 패스하면 됐지만, 지금은 특정인들에게 그 시험이 한정되어 있어요. 계급화되는 거예요. 시험 관리를 엄격하게 해서 의대를 나오지 않았어도, 누구나 고칠 수 있는 자격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떨까요? 의술이 누군가의 특권이 되지 않고도 전문적일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 목사는 현재 ‘의료주권’을 회복하는 활동을 중점적으로 하는 한국건강연대의 공동대표다. 뿐만 아니라 올해 3월, 우리의학 대학원과정을 개설했다. 의술이 더 많은 이들에게 자연스럽게 퍼져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음양오행론, 침뜸론, 경락론, 장상론 같은 전통 한의학부터 단식, 요가, 교정학, 니시 건강법 등 민간요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과목을 개설했다. 한 학기 동안 10명의 학생과 5명의 교수는 격주로 모여 수업을 했다. 열정은 뜨거웠다.

▲ 아프리카 말라위에서 600개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마을 만들기 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정호진 목사 (사진 제공 / 생명누리)

생명농업 기술을 전하기 위해 가벼운 마음으로 향했던 인도에서 10년을 보내고

정 목사가 우리의학 연구와 전파에 매진한 지 20여 년. 책이 이제야 나온 건 그가 2001년 2월, 훌쩍 인도로 떠났기 때문이다. 그가 속한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던 남인도 교단은 인도의 가난한 지역 농민들에게 그의 생명농업기술을 나눠주길 원했다. 한 달간의 짧은 초청이었다.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해 본적이 없어요. 잠깐 인도 여행을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곳에서 현장 지도를 하고 워크숍을 하는 사이에 한 달로는 안 되겠으니 5년간 있어달라는 거예요.”

정 목사는 5년 동안 인도 농촌을 순회하며 오무(五無) 농법(무경운, 무제초, 무비료, 무농약, 무비닐), 순환 농법 등을 알렸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그를 초청한 남인도 교단은 지원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는 교육을 하러간 지역의 허름한 학교나 지역 농민의 집에서 지냈다. 가끔 송아지나 염소가 들어와 함께 자기도 했지만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순회교육을 하는 동안, ‘수맥탐사 전문가’가 됐다고도 자랑했다.

“인도는 상하수도 시설이 잘 안 되어 있어서 마을에 우물이 있어야 하거든요. 제 수맥탐사 성공률이 98%예요. 인도 정부나 민간 전문가도 50% 넘지 않거든요. 어디에서든 철사 두 개만 있으면 인기 있는 사람이 돼요. 하하.”

그렇게 인도에서 5년을 보낸 뒤, 시범 농장 하나를 만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다.

“노력하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데 공들여 어느 정도 농장을 만들어 놓아도 교구장이 바뀌며(남인도 교단은 개신교도 교구장 시스템이다) 물거품이 되는 거예요. 추진하던 일의 연속성을 기대하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시범 농장이 한 군데 있어야 누구나 와서 배울 수 있거든요.”

5년을 더 남기로 결정했다. 교단으로부터 독립해 인도 남부 마넴빨리 마을에서 ‘행복한 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지하수를 개발하고 생태적 화장실을 만들고, 어린이집과 직업훈련센터를 만들었다. 교단 배경이 사라져 안전의 문제가 생겼다. 선교사라는 게 알려지면 마을에 들어가기도 어려웠다.

정 목사는 2006년 국제활동을 전담하는 NGO 생명누리를 만들었다. 현재는 아프리카 말라위의 600개 마을 주민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 중이다. 각 마을 대표 3인이 참여하는 이 교육에서 말라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이 어떤 마을이 되었으면 좋겠는지, 그림을 그리고 토론하며 꿈을 키운다.

어디 그뿐인가. 생명누리는 한국 청소년들과 50일에서 100일, 혹은 1년 동안 긴 해외여행을 떠나는 ‘지구촌 인디고 여행학교’도 진행하고 있다. 이 여행학교의 경험을 기반으로 정호진 목사는 2011년 3월 ‘샨티학교’라는 기숙형 대안학교를 세워 지난 4월까지 교장을 역임했다.

▲ 정호진 목사 ⓒ문양효숙 기자

우리 의학, 해외 지역 개발, NGO 대표…
한 사람이 다양한 일을 동시에 해낸다는 것

우리의학 연구와 교육, 생명농업을 포함한 해외 지역사회 개발, NGO와 대안학교 대표까지. 어찌 보면 큰 개연성 없어 보이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한 사람이 어떻게 동시에 해낼 수 있을까.

제주 해군기지 반대 투쟁으로 구속 중인 송강호 박사는 올해 초 정호진 목사와 생명평화공동단식을 함께하며 정 목사를 “관심분야가 다양하고 각 분야마다 탐구자의 욕심으로 이미 깊은 연구를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사실 분”이라고 설명했다. 송 박사는 “처음엔 인도에서 지역 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만났는데 어느 날 갑자기 <우리의학 이야기>라는 책을 주시더라”며, “각 분야가 상관없는 듯 하지만 실은 하나로 통일 돼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전파하고 교육하고 치유하시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결국 정 목사는 몸과 영혼, 그리고 세상을 품는 총체적인 치유를 향해 한 생애에 여러 갈래 길을 걸으며 열심히 탐구하고 있다.

정 목사는 “대부분의 질병 속에는 관계가 있다”고 말한다. 관계로 마음이 뒤틀려 몸의 질병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그런 것까지 함께 보는 게 중의(中醫)”라고 설명한다.

“닥터 노먼 베쑨이 그랬죠. 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이는 소의(小醫), 사람을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이는 중의(中醫),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해 그 모두를 고치는 이가 대의(大醫)라고요.”

인도 시골 마을에 우물과 화장실을 만들고, 주민들을 교육하며, 동시에 우리의학을 끊임없이 연구하는 정호진 목사. 그는 대의(大醫)를 지향하고 있는 듯했다.

정 목사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아무래도 한 사람의 역량은 한계가 있으니까요. 저보다 더 잘할 수 있는 사람들을 키우는 게 지금 제 역할인 듯해요. 우리의학도, 생명누리도요. 제가 없어도 되도록 말이에요.”
“당분간 교육자로 살아가시겠네요.”
“네. 그럴 것 같아요. 아, 그래도 앞으로 하고 싶은 건 있어요. 한국에 농장을 만드는 거예요.”
“뭔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려고요?”
“아프리카에서, 인도에서 의욕이 있는 청년들을 한국에 데리고 와서 교육할 수 있는 농장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예전에 농사 공부를 한창 할 때 그렇게 일본에 가고 싶었거든요. 일본은 땅이 어떻게 생겼을까. 어떤 작물이 자랄까. 농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하면서요. 그래서 알아서 찾아가서 배웠어요. 많이 배웠죠. 그 청년들도 자기 나라를 떠나야만 배울 수 있는 게 분명히 있거든요. 그런 시범 농장 겸 교육센터가 한국에 있었으면 좋겠어요.”

정 목사는 자신의 삶이 “참 변화무쌍하고 항상 신비롭다”며 웃었다. 농장 이야기를 할 때, 내일모레 환갑인 그의 눈이 열정으로 빛났다.

 

* 인터뷰를 마치며

이야기를 끝내고, 조심스럽게 진맥을 부탁했다. 근래 들어 계속되는 불면과 위통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정 목사는 “맥진보단 문진이 훨씬 중요하다”며 한참동안 이런저런 질문을 던진다.

“진단법 중 제일 중요한 건 묻는 거예요. 본인보다 더 정확하게 자기 몸을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아픈 사람에게는 되도록 많이 묻고 많이 들어야 해요. 문진을 하면 어느 정도 잡혀요. 그걸 확인하는 게 맥진(맥을 짚는 진료)이나 복진(배를 눌러 진단하는 법)이죠.”

복진까지 마친 후 정 목사가 알려준 치료법은 어렵지 않았다. 밥을 꼭꼭 씹어 천천히 먹을 것, 심장이 약하니 자기 전 몇 가지 운동을 할 것, 커피를 줄일 것 등이었다. 너무 쉬운 방법이라 처음 들었을 때는 김이 빠졌다. ‘비밀의 치료법’을 기대했었나 보다.

그날 밤, 위가 아파오자 나는 ‘약’을 찾았다. 약봉지의 약을 입에 털어 넣고 물을 마시는 건 아주 간편하고 쉬운 처방이었다. 얼마 뒤 위장은 또 아팠다. 여전히 밥을 빨리 먹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신경 써서 천천히 밥을 먹었다. 위장은 괜찮았다. 결국, 몸에 밴 어떤 습관을 고치는 것이 치료의 핵심이 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정 목사의 처방은 결코 쉬운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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