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3

그리고 예수는 호수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왔다. 그때 무덤에서 나온 두 명의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다. 그들은 아주 사나워서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 없었다. 그런데 보시오. 그들이 소리 질러 말했다. “하느님의 아들이여, 당신과 우리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때가 되기 전에 우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 방목하는 돼지 떼가 많이 있었다. 귀신들이 예수께 간청하여 말했다. “당신이 우리를 쫓아내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가 말했다. “가시오.” 그러자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는 온통 비탈을 내리달려 바다에 떨어져 물속에 빠져 죽었다. 돼지 기르던 자들이 마을로 달려가 이 모든 일과 귀신들린 사람들에 대한 일을 알렸다. 그러자 보시오. 온 동네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러 와서 그들 지방에서 떠나가 달라고 예수께 청했다. (마태 8,28-34)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서 5,1-20을 마태오는 많이 축소했다. 우선 지명 ‘게라사’를 마태오는 ‘가다라’로 바꾸었다. 게라사는 겟네사렛(갈릴래아) 호수에서 이틀을 걸어야 도착하는 먼 곳임을 마태오는 알았다. 그래서 마르코의 부정확한 지리적 정보를 마태오는 고쳤다. 가다라는 겟네사렛 호수에서 남동쪽으로 약 10㎞ 떨어진 산등성이에 위치한 이방인 마을로 폼페이우스가 그 마을의 재건을 지시한 이래 데카폴리스(10개 도시)에 속했다. 가다라 유적은 오늘도 남아 있다.

마르코 복음에 나오는 귀신들린 사람 한 명을 마태오는 두 명으로 바꾸었다. 사건의 중요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마태오가 손질한 것 같다. 같은 사건을 두고 약간 다르게 표현하는 복음서 저자들의 의도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오늘의 단락이 실제 일어난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메시지를 놓치지 말자.

▲ 산 타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의 모자이크화

그리스 문화의 영향으로 당시 팔레스타인 유다인에게 귀신 문화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귀신과 무덤 등 우리 현대인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설명이 고대 문화의 바탕에서 설명되고 있다. 이전 시대 사람들은 이 단락을 우리보다 더 생생히 이해하리라.

무덤은 귀신들이 좋아하는 장소다. 무덤에서 자는 사람은 유다교에서 미친 사람으로 여겨졌다. “굴무덤 속에 들어가 살며 으슥한 곳에서 밤을 지내며 돼지고기를 먹는 것들”(이사 65,4)이 연상된다. 유다인은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도록 율법이 규정했음은 물론이고 돼지 사육도 유다인에게 금지되었다. 예수는 삼겹살 맛을 모르는 불쌍한 분이다. (1990년 여름 독일 동료 30여 명과 이스라엘을 순례 중 갈릴래아 호수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나 혼자 돼지고기 요리를 주문하였다. 독일 친구들이 내게 “너는 영락없이 이방인이다”라고 농담했다. 나는 “예수는 아시아 사람이다. 너희 유럽인이 사실 이방인이지”라고 말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돼지는 더럽고 불결함의 대명사지만 제사 고기로 바쳐지는 비싼 고기였다.

귀신들은 본래 사막으로 쫓겨나는 것이 보통이나 귀신들은 예수께 돼지 떼로 보내 달라 청한다. 돼지는 유다인이 로마 군인을 비꼬아 비유한 말이기도 하다. 돼지 떼처럼 계속 이스라엘 땅에 머물고 싶다는 귀신들(로마 군대)의 속셈이다.

마태오 복음에 드물게 나오는 라틴어인 레기오(legio, 군단)는 ‘많은 귀신’을 가리킨다. 그 단어는 마태오 복음에서 생략되었다. 유다 전쟁에서 로마군에게 패해한 지 겨우 10년 정도 지난 시점에 마태오 복음은 쓰였다. 로마 군대가 예수를 싫어하는 모습이 암시되어 있다. 예수가 로마 군대를 이스라엘 땅에서 쫓아내려 한다고 마귀들이 항의하는 모습이다. 이스라엘에 계속 주둔하고 싶다는 귀신(로마 군대)의 간청은 결국 물에 빠져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귀신들은 자기 활동의 ‘때’(kairos)와 기한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안다. 귀신들이 물러갈 시간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로마 군대의 통치도 물러갈 때가 있음을 로마인도 알고 두려워하는 것이다. 오늘의 단락에서 유다인들은 식민지 지배자인 로마 군대가 몰살되는 통쾌함을 느꼈을 것이다.

돼지 기르던 사람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이다. 예수가 이방인에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그리려는 것이 오늘 단락의 주제다. 마태오는 예수가 천상 유다인임을 돋보이려는 것이다. 예수는 우선 유다인을 구원하려 한다.

귀신으로 상징되는 악에 대해 오늘 단락은 또한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 악은 선을 끈질기게 싫어한다. 둘째, 악은 스스로 물러가기 싫어한다.

예수는 유다인이다. 예수를 알려면 유다인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우리 한국인에게 유다인은 경제, 자녀 교육, 그리스도교와 관련하여 주로 소개되고 있다. 모두 흥미로운 분야겠지만 그 중 그리스도교와 비교되어 유다인이 가장 많이 설명되고 있다. 유다인은 경제, 자녀 교육보다 우선 종교로서 이해되어야 올바른 순서다. 유다인의 뿌리가 유다교라면 경제나 자녀 교육은 가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다교는 한국의 그리스도교에 의해 적절하게 소개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유다인 대부분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십자가에 처형된 메시아 상을 유다인은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유다인과 그리스도인이 율법 때문에 갈라선 것이 아니다. 율법에 대한 의견 차이로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분열되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율법에 대한 의견차 때문이 아니라 메시아 상에 대한 생각 차이로 갈라선 것이다. 이방인에 대한 선교전략 차원에서 바울은 율법의 가능성과 한계를 고뇌했을 뿐이다.

유다인 대부분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유다인은 여전히 하느님의 사랑받는 맏아들이요 큰 딸이다. 유다인이 예수를 거부한 덕택에 온 세상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유다인 덕택에 우리는 하느님을 알게 되었고, 우리의 믿음 덕분에 유다인은 자기 종교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이 얼마나 놀라운 하느님의 지혜요 섭리인가. 그리스도교는 새삼 유다인에게 감사할 일이다. 유다교 없이 그리스도교 없다.

그런데 여전히 그리스도교 신자 대부분 유다인에 대해 균형 있는 시각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대부분 책임은 설교자들에게 있다. 그들은 예수를 돋보이기 위해 유다인을 부정적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스도교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유다교에 대한 근거 없는 설교를 하기도 한다. 교황은 유다교에 대해 두 팔을 벌리지만 일선 교회나 성당에서 여전히 유다인은 대부분 나쁘게 해설되는 실정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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