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로 흘러가는 노래 - 6]

70년대 초 다닥다닥 붙은 벽돌집과 루핑으로 지붕을 씌운 판잣집에는 담조차 없는 집이 대부분이었다. 대문이 있거나 문패가 걸린 집은 그래도 모양새를 갖춘 집이었다. 잦은 단수로 인해 물차를 기다리며 줄을 서야했고, 아침 출근 시간에는 공동변소 앞에서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그나마 자기 집에서 사는 사람들은 목에 힘을 주고 살았지만 그곳에서도 셋방을 살던 사람들은 6개월에 한 번씩 이사를 다녀야 하는 유목민 생활이었다.

정경 유착과 권력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대통령은 안가에서, 정치인과 사업가는 요정에서 향응을 즐겼으며, 전 국토는 투기와 개발로 임자가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보따리 짐을 싸서 정든 고향을 떠나 의지할 곳 없는 서울로, 서울로 꾸역꾸역 들어왔다. 가난한 서민들은 공장바닥에서 하루를 보냈고, 그렇게 번 돈을 자식들을 위한 교육에 쏟아 부었다. 허전한 마음은 교회나 절을 찾아가 하늘에 하소연하고 위로 받았다. 안내양이 배치기로 밀어 넣어야 문이 닫히던 시내버스, 소매치기와 폭력배를 경계해야 했던 시장바닥, 주점 벽에 붙어 있던 신문지에는 정권 홍보물이 넘쳐나고 스포츠와 세계뉴스 그리고 연재소설 외에는 읽을거리가 없던 어두운 세월이었다.

▲ 울란바토르의 양극화 ⓒ이장섭

몽골의 울란바토르는 1970년대와 지금의 서울을 모두 보여주고 있었다. 인구 300만 명의 몽골은 그중 절반인 150만 명이 수도 울란바토르에 몰려 있다. 일부 특권층은 정치권력과 광산개발 덕에 벌어들인 재물로 4~5억 원하는 고급 주택가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는 선진국의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어 가난한 나라 몽골을 상상한 자들에게 충격을 준다. 토요타의 고급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SUV)인 랜드크루져로 교통체증을 이루고, 최고급 레스토랑과 커피전문점이 깨끗한 길가에 즐비하다. 게다가 무상교육을 받는 일반 몽골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1년 학비 7,500달러의 미국 국제학교가 있어, 졸업 후 미국 유학을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울란바토르의 강남 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은 나무 울타리를 둘러친 판잣집과 한 채에 100만 원이면 살 수 있는 게르(몽골식 이동 천막)로 꽃동네를 이루고 있다. 몽골인들은 5평 남짓한 게르에서 일가족이 모여 산다. 울란바토르에 단 두 곳 밖에 없는 화력발전소에서 생산한 난방열은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철에도 부자들이 반팔 옷을 입고 살 수 있도록 따뜻함을 제공하지만, 전기도, 난방열도 공급받지 못하는 빈곤층은 동상에 걸리거나 얼어 죽는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폐지나 폐타이어를 태워 게르를 데워도 춥고 긴 겨울을 견뎌내기가 쉽지 않다. 우선 먹고 살아남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다.

최근에는 20여 년간 최고위 지도자로 지냈던 전직 대통령이 국가 세금 유용과 각종 부패 혐의로 구속되었다. 2011년 국제투명성기구 부패지수는 몽골을 방글라데시, 이란과 함께 183개국 중 120위로 발표했다. 양극화와 사회의 불투명성, 환경오염, 중국과 러시아 등 외세의 압박 속에서 몽골이 헤쳐 나갈 길이 곳곳에 습지로 가득한 초원처럼 평탄하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12세기에도 몽골은 가혹한 기후조건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귀족 중심의 신분제와 봉건주의는 하층민들의 예속과 고통을 강요하였다. 그러한 시기에 나타난 인물이 칭기즈칸으로 불리는 테무친이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부족들의 배척을 받으며 고난 가운데 성장한 그는 몽골을 지배했던 상위 1%의 귀족과 그들에게 예속되었던 나머지 99%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회적 평등을 선포했다. 부족의 구분이 없는 천호제, 만호제를 실시하고, 전리품을 공동 분배하며, 각 분야의 전문가를 지속적으로 양성하는 케식텐 제도를 도입하여 세계 역사상 가장 넒은 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그런 정치적 역량 이전에 그의 인간적 성숙함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을 벌레보다 낮출 줄 알았으며, 전쟁터에서는 병사들과 똑같이 식사하고, 똑같은 모포를 덮고 이슬을 맞으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다. 약속을 하면 반드시 지켰고, 병사들과 백성들에게 대칸의 칭호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부르게 했다. 순박하고 정직한 하층 유목민들을 통해 인간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 깨닫고 감격했으며, 그들을 ‘평생 동지’로 삼았다. 많은 재물을 소유했음에도 늘 소박한 생활을 했으며, 종교 지도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말에는 조금도 가식이 없었으며, 언제나 진정성이 있었다.” (서정록, <마음을 잡는 자, 세상을 잡는다> 중에서)

칭기즈칸이 1119년 5월 전진교의 교주에게 보낸 서한에서도 그의 인간적인 친화력을 엿볼 수 있다.

“나는 북방의 초원에서 태어나 자랐소. 바라는 게 있다면 그저 사람들이 본래의 순박한 삶으로 돌아가기를 원할 뿐이오. 나는 사치를 멀리하고 늘 절제한다오. 소 치는 목동이나 말몰이나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으오. 우리는 재물도 함께 나누고 제사 음식도 함께 나누오. 나는 백성들을 내 아이들처럼 생각하고, 병사들을 친형제처럼 돌본다오.”

▲ 몽골 초원 ⓒ이장섭

칭기즈칸이 태어난 지 8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많은 몽골인들이 그에게 존경과 애정을 표현하는 까닭이 바로 이런 점에 있을 것이다. 정복 군주의 이미지에서 사회변혁자의 모습으로 다가온 칭기즈칸을 생각하며 그가 사랑한 몽골의 산하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펼쳐진 넒은 초원 위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양떼들, 그 옆을 힘차게 내달리는 말 탄 목동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리고 이곳 어디에선가 광활한 벌판 위를 달리던 우리 옛 조상들의 기개를 상상해보았다. 푸른 초지 위에서 먼 산을 바라보고 쏟아질 듯 찬란한 밤하늘의 별을 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한없이 맑아진다.

울란바토르의 사회복지센터에서 함께 지낸 중고등부 학생들과 몽골을 떠나는 날 아침, 숙소 바깥에 그동안 자주 찾아오던 8살 몽골 아이 ‘아노’가 서있어서 문을 열어줬다. 아노는 선물 꾸러미를 열어 자기와 친하게 지낸 학생들에게 하나씩 정표를 나눠주고, 노트를 찢어 정성스럽게 써온 편지를 전해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용을 읽어줬다. “사랑해요. 아노가.”

선물을 받은 학생들은 가난하지만 정이 깊은 몽골 아이에게서 먼저 선물을 받고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채 할 말을 잊어버렸다. 그저 “아노, 아노”하고 아이의 이름만 부르고 있었다. 울란바토르의 빈민촌에 사는 아노의 따뜻하고 진정어린 모습을 보며,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답게 사는 세상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 반성하게 되었다. 정말 우리는 풍요로운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일까?
 

이장섭 (이시도로)
아산에서 사회복지사로 일하며 주님을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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