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1

18 그러나 큰 군중이 주위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는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말씀하셨다. 19 그런데 한 율법학자가 와서 “선생님, 저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20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둥지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자기 머리를 눕힐 곳도 없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21 제자 중 한 사람이 와서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 주십시오.” 하고 말했다. 22 그러나 예수께서는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자들에게 맡기고 당신은 나를 따르시오.” 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8,18-22)

8장 이하에서 이적 사례를 ‘예수를 따름’이라는 주제와 연결하여 두 일화가 간략히 소개되는 단락이다. 처음과 마지막에 ‘따르다’(akoloutheso)라는 동사가 보인다. 예수를 따르려는 두 사람이 사용한 “선생님”에서 “주님”으로 호칭 변화가 눈에 띈다.

예수를 존경하는 것과 예수를 따르는 것은 같은 차원의 일이 아니다. 율법학자는 예수와 반대편에 선 사람이다. “선생님”은 예수의 적대자들이 쓰거나(마태 12,38; 22,16.24.36), 예수에게 처음에 호감을 가졌지만 결국 예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 쓰는 용어다(마태 19,16). 예수는 그 단어를 긍정적인 뜻으로 쓴다(마태 10,24; 23,8; 26,18). 율법을 배우는 학생은 스승 율법학자의 집에 기숙하며 편안한 삶을 보장받았다. 그와 반대로 예수는 방랑자 처지다. 스승이 방랑자인데 제자가 감히 안락을 꿈꾸는가. 오늘 등장한 율법학자는 예수를 존경했지만 자신의 능력을 지나치게 믿었다.

유다교에서 장례는 특별히 강조되었다(레위 21,11; 민수 6,6). 죽은 자가 죽은 자의 장례를 치를 수는 없다. ‘소리 없는 외침, 알려진 비밀’처럼 모순적인 화법을 예수는 사용한다. 가족 장례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말씀이 전혀 아니다. 희생정신을 멀리하는 제자들에게 충격을 주려는 예수의 의도다.

▲ ‘사도들에게 설교하는 그리스도’, 두초의 작품(1311년)

그리스 철학자 디오게네스처럼 무소유에 자족하는 삶을 의식한 단락은 아니다. 예수를 따르면 희생하는 삶이 요청된다는 뜻이다. 예수는 가능한 한 많은 제자를 만들려고 애쓰지 않았다. 오히려 제자들에게 가혹한 요구를 함으로써 그들을 인간적으로 실망시켰다. 예수를 따름은 불확실한 길에 들어서는, 예수와 운명을 함께하는 십자가의 길이다. 예수의 제자 됨의 어려움과 비장함을 20절과 22절처럼 강조한 구절은 신약성서에 다시없다. 오늘의 단락은 ‘제자들의 가난’을, 즉 ‘가난한 교회’를 강력히 요청하는 말씀 같다.

교황 프란치스코의 화두처럼 등장한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가 사람들을 요즘 감동시키는 것 같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둘은 어느 정도 모순 관계 아닐까. 초대교회를 제외하고 가톨릭교회가 역사상 가난한 적은 거의 없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를 가톨릭교회는 거의 언제나 내세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를 만들기는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난한 교회는 만들기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그 논리가 서로 다른 점이 많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는 가톨릭교회에 명분(가난한 사람을 돕자)과 실리(재산 증식)를 동시에 안겨줄 수 있다. ‘가난한 사람을 돕자. - 그들을 도우려면 돈이 필요하다. - 돈을 주로 부자와 권력자들에게 부탁한다. - 부자나 권력자를 비판하지 않는다. - 얻은 돈의 관리 권한을 교회가 가진다.’ 그러면 교회 재산은 나날이 늘게 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복지시설 소유권을 가진 교회는 고용주로서 기능하게 된다.

그러면 첫째, 가난을 낳은 구조나 세력에 대한 비판을 삼가게 된다. 둘째, 교회는―의도적으로든 결과적으로든― 부자, 권력과 밀착하게 된다. 셋째, 모인 돈에 대한 권한(모금, 분배, 결정, 보관)을 독점하는 세력(성직자)이 교회 안에서 실권을 쥐게 된다. 이러한 논리와 역사를 반박하기 어렵다. 사회복지에 앞장서는 사람 대부분은 불의한 구조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보통 싫어하게 된다.

‘가난한 교회’는 우선 교회 내 재산부터 줄이라는 압력에 직면한다. 교회 내 재산을 줄이면 성직자들의 일상적 안락함이 크게 줄어든다. 그런 희생을 반길 성직자는 많지 않다. 오래 누려온 귀족적인 삶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가난한 교회를 내심 가장 강력히 반대하는 세력이 곧 성직자들이다. 사실 가난한 교회는 진즉 이루어졌어야 한다. 그런데 역사상 그런 적이 거의 없다면 그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다. 만일 가톨릭교회가 가난한 교회가 된다면 인류 역사에 엄청난 사건일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 노선에 가담하는 성직자는 많고 교회에서 존경받는다. 그러나 ‘가난한 교회’를 외치는 성직자는 불순분자로 낙인찍히고 교회에서 따돌림 당한다. 인간적으로 어느 쪽에 서고 싶을까. 어지간한 희생을 각오하지 않으면 보통 양지바른 쪽에 서게 된다. ‘가난한 사람을 위한 교회’를 내세우면서 ‘가난한 교회’를 묵살하는 방식으로 가톨릭교회가 움직이지 않을까?

사회복지를 강조하면서 해방신학을 억압하는 흐름이 가톨릭교회에 예상된다. 그것은 교회개혁을 방해하는 길이기도 하다. ‘가난한 사람을 위하는 교회’가 ‘가난한 교회’를 외면하지 않길 바란다. 내 예상과 염려가 쓸데없는 것이면 참 좋겠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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