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50

14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가셨을 때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운 것을 보셨다. 15 예수께서 그 여인의 손을 잡으시자 열이 곧 그녀를 떠났고 그녀는 일어나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16 날이 저물었을 때 사람들이 예수께 마귀 들린 사람을 많이 데려왔다.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17 그리하여 예언자 이사야가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그분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짊어지시고 우리의 병고를 없애주셨다.” (마태 8,14-17)

▲ ‘시몬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시는 예수’, John Bridges 작품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14-15), 요약(16), 예언자의 말씀이 이루어진 인용문(17)의 세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락이다. 대본으로 삼은 마르코 복음 1,29-34를 마태오는 크게 줄였다. 제자들도, 베드로도 보이지 않고 사람들의 치유 부탁도 없다. 마태오는 치유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하기보다 서둘러 요약한다.

마르코 복음에서 사람들이 베드로 장모의 열병 소식을 예수에게 알렸다(마르 1,30). 루카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에게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쳐 달라고 간청한다(루카 4,38). 복음서 저자들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 같은 장면이 조금씩 다르게 나타난다. 성서무오설을 좁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그 미묘한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까.

베드로의 집이 가파르나움에 있다는 것을 마태오는 아는 듯하다(마르 1,21.29). 요한 복음 1,44에 따르면 베드로는 베싸이다 출신이다. 결혼과 더불어 장모 집으로 이사한 것 같다. 처갓집에서의 더부살이는 당시 흔한 일은 아니다. 장모 집을 베드로의 집이라 언급한 것일까. 그런 자세한 내용에 대해 마태오는 관심이 없다.

예수는 친구 베드로의 집을 방문한다. 예수와 베드로는 친구로 시작하여 스승과 제자 사이가 되었다. 예수와 베드로의 운명처럼 극적인 관계가 인류 역사상 어디 그리 흔할까. 내가 예수라면 누가 내게 베드로일까. 내가 베드로라면 누가 내게 예수일까.

히브리어와 아람어에서 ‘열병’을 나타내는 여섯 가지 단어가 있다. 열병은 위험한 질병으로 알려졌다. 갈릴래아 호수의 기후로 인해 열병은 흔히 더 심각해진다. 부탁받지 않고 병자를 예수가 치유한 사례는 마태오 복음에서 오늘의 본문이 유일하다. 베드로 장모의 시중은 예수에 대한 감사 표시다. 예수는 사람들에게 밥 얻어먹는 것을 즐긴 넉살 좋은 분이다.

16절에서 예수가 “말씀”으로 치유한 대목을 눈여겨보자. 치유 말씀과 복음 선포 말씀이 연결되는 의미다. 예수의 말씀은 사람을 깨끗하게 하고 도와주고 구출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도 그런 힘이 있다. 우리 언어가 이웃에게 희망과 위로를 줄 수 있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다.

베드로의 집 위치, 사도로서 주택 소유, 베드로의 가족관계에 대한 관심이 해석 역사에 있었다. “기혼자가 사도로 초대되었고, 예로니모는 요한을 제외한 11 제자 모두 결혼했다고 말하는데, 로마 교황은 주교와 신부들에게서 아내를 빼앗아간 이유가 무엇인가?” 하고 16세기 개혁가 불링거는 묻기도 했다. 당시 가톨릭 성서학자들은 이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초대교회 전승에 베드로의 아내와 딸에 대한 전승이 있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왜 결혼하지 않은 바울에 대해 왜 그리 드물게 언급하는가?”라고 독일 가톨릭 성서학자 슈나켄부르크는 응수한다.

둘 다 오늘의 본문 메시지와 거리가 먼 언급이다. 성서에서 가톨릭 사제 독신제의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여성 사제품에 대한 거부 이유를 성서에서 찾기란 역시 불가능하다. 사회학적 효율성 면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16절 요약에 마태오의 몇 가지 의도가 담긴 것 같다. 지금까지 설명된 치유 이야기 중 세 가지 대표적 사례―나병환자, 이방인, 여인―를 마태오는 독자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마태오는 또한 예수의 절대적 능력을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17절의 이사야서 인용문을 소개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17절에서 마태오는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예수의 치유능력을 보여주려 한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처럼 예수의 치유행위가 하느님의 계획에 걸맞다는 것이 마태오에게 중요하다. 인용된 이사야서 53,4는 후에 예수의 역사를 해석하는 구절로 자주 인용된다.

하느님의 종으로서 예수의 고통이 오늘 마태오 복음서의 문맥에서 강조된 것은 아니다. 즉, 예수의 치유능력을 보여주려는 인용문이지 예수를 고통 받는 하느님의 종으로 여기서 소개하려는 것은 아니다. 17절은 그렇게 자주 오해되었다. 17절은 마태오 복음서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인 예수의 ‘자비로움’을 돋보이려는 것이다. 나치에 저항하다 처형당한 독일의 본회퍼는 “마태오 복음 8,17에서 예수는 자신의 권능이 아닌 허약함을 통해서 우리를 돕는다”고 해설하였다. 그러나 마태오의 의도는 그와 정반대다.

하느님은 “천대받는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하셨다”(이사 49,13). 고통 받는 사람 하나하나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드러나는 오늘의 이야기다. 거창한 인류 구원에 앞서 예수는 우선 사람 하나하나에 애정을 기울인다.

시간과 장소와 인물이 등장하는 구체적인 일상에서 사랑은 드러난다. 극적인 순간이 우리 인생에서 어디 그리 흔할까. 무료하게 반복되는 평범한 나날에서 비로소 기적도 사랑도 싹튼다. 일상을 벗어난 삶이란 아예 없다. ‘일상(日常)의 영성(靈性)’(K. Rahner)이 사실 최고 수준의 영성이다. 그런 모습을 예수가 오늘 보여준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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