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9

예수께서 가파르나움에 들어가셨을 때 한 백인대장이 예수께 와서 “주님, 제 하인이 중풍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하고 사정하였다.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주겠소” 하시자 백인대장은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아들이 낫겠습니다. 저도 명령하는 권력 아래 있는 사람입니다만 제 밑에도 부하들이 있어서 제가 이 사람더러 가라 하면 가고 또 저 사람더러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는 감탄하시며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셨다. “정말 어떤 이스라엘 사람에게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습니다. 잘 들으시오. 많은 사람이 사방에서 모여 들어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치에 참석하겠으나 이 나라의 백성들은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땅을 치며 통곡할 것입니다.” 그리고 백인대장에게 “가 보시오. 당신이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바로 그 시간에 그 아들의 병이 나았다. (마태 8,5-13)

나병환자 치유 이야기처럼 사건보다 대화를 더 강조하는 단락이다. 마태오 복음서 15,21-28처럼 예수가 직접 접촉하지 않고 말씀으로 ‘멀리서 치유’하는 사건이다(루카 17,12; 2열왕 5,1). 고위 관리의 아들 치유(요한 4,46-53)도 오늘 단락과 같은 전승에 기초한다.

그런데 치유된 환자가 누구인지 복음마다 서로 다르다. 아들(vios, 요한 4,46), 하인(doulos, 루카 7,2.10), 아이 또는 종(pais, 마태 8,6.13; 루카 7,7). 본문 내용에 크게 관계없지만, 파이스(pais)가 종인지 아들인지 학자들 의견이 엇갈린다. 성서 번역마다 다르다. 히브리어로 종을 ‘집의 아들’(알파벳 음역 ben-bajit, 창세 15,3)이라 하며, 또 마태오 복음 8,9와 비교하여 파이스는 종을 뜻한다고 독일 가톨릭 성서학자 그닐카는 말한다. 그러나 마태오는 파이스를 아들을 가리키는데 썼고(2,16), 연관된 마태오 복음 17,14-21에서도 아들을 뜻한다는 근거로 개신교 성서학자 루즈는 파이스는 아들이라고 말한다. (나는 루즈의 의견에 찬성한다.)

▲ ‘예수께서 백인대장의 종을 치료하시다’, 파올로 베로네세의 작품

가파르나움에는 로마 군대가 주둔하지 않았다. 헤로데 안티파스 영주의 군대가 가파르나움에 있던 것으로 추측된다. 헤로데 대왕 군대에 게르만족까지 용병으로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유다인은 군복무에서 면제되었다. 이방인 영주의 군대에서 로마인 군인을 찾기 어려우므로 오늘 단락에 등장하는 군인이 어느 민족 사람인지 정확히 알기 어렵다. 시리아 사람으로 추측된다. 주둔군 문제로 유다인과 이민족 사이의 민족 감정은 좋지 않았다. 용병을 주축으로 한 군대는 로마군대 직제에 따라 조직되었다. 백인대장은 100명 정도를 지휘하는 중급 장교다.

이민족 군인의 간청에 예수는 긍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왜 그는 즉시 기뻐하기보다 자신의 자격 없음을 길게 설명했을까? 예수가 그 부탁을 거절한 것으로 해석된다. 예수의 거절 후에 군인이 다시 길게 간청하는 것으로 보아야 그 대화가 비로소 이해되겠다.

유다인 예수가 이방인의 집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9절의 ‘명령하는 권력’이라는 군대 논리를 이방인 군인이 예수에게 설명하는 자리는 아니다. 당시 군대 논리에 대해 예수가 이미 알고 있는지 우리는 모른다. 이방인 장교가 군대 논리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예수도 이방인 군인에게 명령해도 좋다는 설명은 아니다. 첫째, 예수는 유다인이다. 둘째, 예수는 율법을 지킨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마태오는 독자들에게 새삼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 활동 초기에 일어난 일이니 예수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판단할 시기는 아직 아니다. 그 군인이 예수를 잘 알고 이해하고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그런데 예수는 그 군인의 어떤 점에 그렇게 과장되게 감동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그 까닭을 오랫동안 납득하기 어려웠다.)

예수가 군인보다 더 높은 권력이 있다고 인정받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 악마의 힘이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고 질병은 악마에 의해 생긴다는 당시 세계관을 알아야 비로소 이해되는 단락이다. 예수는 악마를 물리칠 힘이 있다고 군인은 고백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다. 오늘의 본문은 당시 누구를 우선 겨냥한 것일까. 11절에서 마태오는 당시 유다교 지배층에게 이렇게 말하려는 것이다. ‘이방인 군인도 예수를 알아보았는데, 당신들은 대체 지금 무엇하고 있느냐.’

식민지 이스라엘을 점령한 이방인 주둔군 장교의 부탁에 피식민지 백성인 예수가 응답하는 묘한 설정의 이야기다. 그 용병은 부하를 살리기 위해 자존심을 굽히고 예수에게 무릎을 꿇는다. “주님, 저는 제 입술이 더러운 사람입니다”(이사 6,5)를 연상시키는 비장한 자세다. 이민족 주둔군에 대한 불편한 감정과 식민지 백성의 처지에서 예수는 이방인 장교의 부하를 치유해준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 군인도 예수도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다. 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를 미워할 사람에게 무릎 꿇고 도움을 청할 용기가 내게 있는가. 미워하는 사람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고 흔쾌히 들어줄 아량이 내게 있는가.

예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의심하거나 유다교 율법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신앙이란 어떤 교리를 이해하고 찬성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절실한 태도를 요구한다. 생사가 걸린 심정으로 예수께 다가서고 매달리는 것을 뜻한다. 오늘 예수에게 애절하게 간청한 이방인 군인에게 그런 모습이 보인다.

예수를 모르면 예수에게 매달릴 수 없다. 오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 자기 생각과는 달리 예수를 잘 모르고 있다. 예수를 잘 모르면서도 상당히 아는 것으로 자신하며 산다. 예수를 사실상 전혀 모르면서도 예수에 대해 한 말씀 하시는 분들에 대해서는 거론할 필요도 없다.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에 모인다는 공동성서(구약성서) 메시지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쫓겨날 것이라는 심판 경고가 뒤따른다. 오늘의 단락을 우리 시대에 어떻게 비추어볼까. 유럽 밖의 그리스도인이 유럽의 그리스도인에게 ‘당신들은 지금 대체 무엇하고 있느냐’ 말하는 것 같다. 교회 밖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금 당신들은 대체 무엇 하고 있느냐 말하는 것 같다. 최후 심판 때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은 모조리 쫓겨날 것이라는 말씀처럼 들린다(마태 21,43 참조). 교회나 성당에 다니거나 목사, 신부로 살면 마치 구원을 보장받은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에게 섬뜩한 경고겠다.

8절은 가톨릭 미사에서 영성체 전 기도로 사용되는 대목이다. 겸손한 태도를 다짐하는데 도움이 되겠으나 이방인과 유다인의 관계를 의식하는 성서 본래 메시지와 잘 어울리는지 의문스럽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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