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로 읽는 헌법 - 12]

슬아, 이번 편지에서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해. 양심의 자유,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 종교의 자유, 평등권 등 여러 가지 헌법상 기본권을 짓밟을 때, 많은 어른들이 내세우는 바로 그것 말이야.

오빠가 10년 전에 경험했던 얘기를 하나 해줄게. 실화란다. 오빠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01년의 일이었어. 오빠와 다른 학교에 다니던 한 중학교 동창 녀석을 만났지. 그런데 평소답지 않게 그 친구 표정이 너무 어두웠어. 왜 그렇게 표정이 어둡냐고 물어봤더니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체육 선생님께서 빨간 운동화 신지 말래.”

황당했지. 난데없이 빨간 운동화를 신지 말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물어 봤어. 그랬더니 그 친구가 하는 말이, 너무 튀는 색깔의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것은 학생답지 못하다며 선생님께서 지적하셨다고 하더라고. 부당한 것 같다고 이야기한 내 친구에게 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

“야, 그럼 미국 가. 미국 가서 신어.”

운동화 색깔 좀 튄다고 미국 가라니. 요즘엔 설마 이런 선생님이 없겠지?

오빠는 이 사건이 생각날 때마다 떠오르는 헌법재판소 판례가 있어. 그것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의의’에 관하여 판시한 헌법재판소의 판결(* 헌법재판소 2001. 9. 27, 2000헌마238등)이야. 헌법재판소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의의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했단다.

“우리 헌법은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의 보호를 그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고 있고, 그 내용은 모든 폭력적 지배와 자의적 지배, 즉 반국가단체의 일인독재 내지 일당독재를 배제하고 다수의 의사에 의한 국민의 자치, 자유, 평등의 기본원칙에 의한 법치주의적 통치질서를 말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기본적 인권의 존중, 권력분립, 의회제도, 복수정당제도, 선거제도, 사유재산과 시장경제를 골간으로 한 경제질서 및 사법권의 독립 등을 의미합니다.”

그때 그 선생님은 이런 헌법재판소의 판시 사항을 알고 계셨을까? 우리가 살고 있는 자유민주적 통치질서라는 것은, 폭력적 · 자의적 지배를 배제하는 질서라는 것을 말이야. 오빠의 친구에게 그 선생님은 완벽하게 폭력적 · 자의적 지배를 행사하셨잖아. 우리 사회의 통치 질서에 비추어 보면 그 선생님 같은 분은 선생님으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오빠는 생각해.

하지만 이러한 점에 문제의식이 없는 어른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 그 선생님 한 분뿐일까? 우리 사회는 1910년 일제 강점과 1945년 광복 후 1987년 민주화 항쟁에 이르기까지, 일본 제국주의, 이승만 독재, 박정희 독재, 전두환 독재의 77년을 겪었어. 20세기의 대부분을 ‘전체주의 사회’로 보냈던 거야. 자의적 지배와 폭력적 지배를 77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 제4조에서 정한 재심사유가 인정되지 않으나 형법 제37조 전단의 경합범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재심개시결정이 이루어진 범죄사실에 대하여, 그 공소의 기초된 수사에 관여한 수사관들이 그 직무에 관한 죄를 범한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으나 위 직무에 관한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확정판결을 얻을 수 없는 경우, 명백하고 새로운 형사소송법 제420조 제7호 소정의 재심사유가 추가로 발견된 것이어서 재심의 심판범위가 유·무죄 판단을 포함한 나머지 범죄사실 전부로 확대됩니다.”

“전두환 등이 1979. 12. 12. 군사반란 및 1980. 5. 18. 광주민주화항쟁을 전후하여 행한 일련의 행위는 내란죄로서 헌정질서파괴범죄에 해당하므로, 이를 저지하거나 반대한 행위는 헌법의 존립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됩니다.” (* 서울고법 2009. 5. 21, 선고 2000재노6)

이것은 전두환 정권 최초의 공안사건으로 한 달 이상의 불법구금 동안 극심한 고문으로 만들어진 속칭 ‘아람회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문의 일부란다. 그 사건은 백일잔치 동문 모임이 졸지에 반국가단체로 둔갑한 사건이었어. 이에 대한 유죄판결에 대해 28년 만에 2009년 고등법원에서 재심이 이루어졌고, 법원은 무죄 판결과 함께 과거의 오판을 사죄했단다.

〔*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언비어 유포’, ‘제2의 김대중 내란음모 기도’, ‘전두환 대통령 시해 모의’ 혐의로 1981년 8월 20일 대전지검이 ‘아람회’라는 반국가단체 멤버 10여 명을 구속 기소하여 이들 중 7명이 1심에서 징역 2~10년을 선고(1982. 2. 11)받았어. 하지만 고등법원이 반국가단체 구성 부분을 무죄로 판결해 5명에게 징역 1년 6월~6년을 선고하고 2명을 집행유예로 석방했는데(1982. 6. 19) 이는 대법원에 의해 파기(1982. 9. 28)됐고, 고등법원은 다시 징역 1년 6월~10년을 선고해(1983. 2. 16) 대법원에 의해 형이 확정(1983. 6. 14)됐지. 5번의 재판이 끝난 6개월 후 ‘반국가단체 구성원 5명’은 모두 형집행정지로 석방(1983. 12. 23)됐어.〕

이런 일들이 신문에 오르내리는 세상에 태어나서 청소년기, 청년기를 거치고 정체성을 형성했던 사람들이라면, ‘자의적 · 폭력적 지배’를 체화한 감수성을 가진 채 성장하기가 쉽지 않았을까?

슬아, 2007년 12월, 대통령 선거 후 한동안 유행했던 말이 있었어. 혹시 아니? “Winner takes all(승자독식)”이라는 말. 압도적으로 대선에서 승리했으니, 5년 동안은 마음껏 원하는 정책을 추진하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말이었어. ‘자의적 지배’의 느낌이 농후한 유행어였지.

하지만 헌법적 가치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그런 말을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된다고 오빠는 생각해. ‘승자(winner)’는 ‘모든 것’을 갖는 것이 아니라 ‘헌법에 보장된 권리’만을 갖는 거지. 대통령도 헌법에 위배되는 권리는 가질 수는 없는 거야. 그리고 헌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국회, 나아가 국민에 의해 제한되는 권리를 갖고 있고.

국민 다수가 아무리 반대해도 어떤 사항들은 그대로 결정된다면, 그것은 ‘국민의 지배’라기 보다는, 특정 집단의 ‘자의적 지배’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FTA들에서도, 4대강 사업 등의 ‘국책사업’에서, 국민 다수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느끼지 않고 있는 것 같아. 그래서 여전히 ‘민주주의’의 문제가 중요하지 않을까, 오빠는 생각해.

슬아, 생각해보면 너희 학교의 반장, 전교 회장, 부회장 친구들도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규칙을 지키고 친구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존중하지 않니? 하지만 만일 그 친구들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 친구들이 깡패처럼 행동해도 아무도 말리지 못하겠지?

그것처럼, 우리가 살고 있고 경험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우리 사회의 구성 원리는 노력해 만들어 완성되면, 그 뒤에는 향유하기만 하면 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꼭 명심하자꾸나. 헌법재판소가 저렇게 멋있는 말로 우리 사회의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해서 설명했더라도, 우리 사회를 정말 저런 사회로 만들려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할 거야.

‘승자’는 절대 ‘전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 명심하자!
 

 
차진태 (모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재학 중이며, 구속노동자후원회 자문위원, 대학원자치회 대표를 맡고 있다. 예수살이공동체에서 배동교육(청년교육)을 받은 회원이며, 서울대 가톨릭 기도 모임 ‘피아트(FIAT)’에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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