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하는 신학 - 이미영]

얼마 전 모 본당 사목회 사목위원이 대폭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말을 듣고, “어머~ 그 본당 신부님, 여성의식이 있으신가봐”라고 했더니 상대방이 코웃음을 쳤다. 알고 보니 독단적으로 사목하는 본당사제에게 몇몇 남성 사목위원들이 항의를 했더니, 기가 센 남성 사목위원들 대신 고분고분한 여성 신자들로 싹 물갈이를 한 거란다. 천주교 여성 단체들이 오랫동안 주장해 오던 ‘본당 사목회 구성의 여성비례할당제’를 굳이 제도화하지 않아도 최근에는 자연스럽게 실현되는 본당이 늘고 있다고 긍정적으로 보았는데, 여성 사목위원이 늘어난 이유가 사제에게 순종적이기 때문이라니 무척 당황스러웠다.

교회 의사 결정 과정에 여성들의 참여가 늘어나면 교회가 자연스럽게 바뀔 거라는 생각은 그야말로 순진하기 그지없는 착각임이 틀림없다. 여성들이 의사 결정에 참여해서 이루려는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 그 가치가 분명하게 공유되지 않으면, 외형으로서의 남녀 비율만 맞춘다고 자동으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연 여성들의 참여가 늘어나는 교회는 ‘어떤 교회’일 거라고 꿈꾸는 걸까? 우선 내 생각부터 나눠보고 싶다.

나는 무엇보다도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차별의 이유였던 성별의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나이나 사상, 직분, 경제력, 장애 등 여타의 다양한 차별과 배제의 이유를 뛰어넘을 수 있는 ‘평등’의 첫걸음이요 상징적 시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종도 자유인도 없이 모두 하나일 뿐(갈라 3,28 참조)이라는 가르침처럼,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을 뛰어넘고자 지향해야 한다고 여긴다. 이런 평등한 공동체에서 사제와 신자 간에 순종을 요구하고, 요구받는 상하 권력관계란 당연히 말이 안 된다. 각자의 다른 직분에서 서로 존중하고 봉사하는 친교의 관계이기를 바란다.

▲ “무엇보다도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차별의 이유였던 ‘성별’의 장벽을 뛰어넘는 것이, 여타의 다양한 차별과 배제의 이유를 뛰어넘을 수 있는 평등의 첫걸음이요 상징적 시도가 될 수 있다.” 사진은 지난 4월 천주교여성공동체 창립 20주년 기념 미사 중 축하공연에 나선 회원들 ⓒ정현진 기자

흔히 여성의 특성은 남성보다 ‘성취지향’이라기보다 ‘관계지향’인 것이라고 한다. 물론 관계지향적인 남성이 있듯 성취지향적인 여성도 많이 있다. 성별에 따른 특성 역시 사회적으로 형성된 편견의 산물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남녀의 품성을 단정 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교회 공동체는 권력과 성취보다는 서로 보듬어가는 관계 안에서 친교와 조화를 이뤄가는 것이 더 마땅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런 품성을 지닌 이들이 교회 공동체를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따뜻한 배려와 돌봄, 대화와 친밀함에 익숙한 이들이 많은 교회 공동체여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이 위로받고 해방을 체험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또한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한다. 자모회 간식 당번을 할 때, 아내와 함께 나와 대량의 음식을 만들기 위한 무거운 솥을 옮겨주고 뜨거운 기름이 튀는 조리를 전담해주는 남성 교우를 보며, 함께 준비하는 밥상공동체가 더 신나고 즐겁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성 회장이 리더십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다는 편견을 깨고 ‘형님’으로 불리며 단체와 모임을 능숙하게 이끄는 여성 회장님들을 보면 신앙 안에서 남녀 역할이 과연 따로 있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든다. 과연 신앙 안에서 남성만 해야 하는 일이란 무엇일까?

전통적으로 교회가 신자들, 특히 여성 신자들에게 표양으로 제시하는 것은 ‘성모 마리아’의 모범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서한 <여성의 존엄>은 주로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요 동정녀로서만 강조하고 있어, 예수님의 뒤편에 서서 조용히 믿고 순종하는 그림자 같은 어머니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말하는 듯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있다.

예수의 어머니이기 이전에 마리아는 처녀가 임신하면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당대의 관습에 저항하며 부르심에 응답하는 당찬 결단을 내렸던 신앙의 여인이었고, 세상의 구원과 해방을 믿고 노래한 희망의 사도였다. 예수께서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을 칭송하는 사람에게, 참으로 복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것이라고 정정해 주셨던 것처럼(루카 11,28 참조), 우리 교회 역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믿음으로 여성을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미영 (발비나)
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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