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8

그리고 보시오. 한 나병환자가 다가와서 예수께 엎드리며 말했다. “주님, 당신이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손을 내밀어 만지며 말씀하셨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깨끗하게 되십시오.” 그러자 그 나병이 깨끗해졌다. 예수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세요. 사제에게 가서 당신을 보이고 모세가 말한 대로 예물을 드리십시오.” (마태 8,2-4)

Cosimo Rosselli, 1482, 세부
복된 선언(마태 5,2-8,1)에 대한 단락이 끝나고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이적을 다루는 부분이 시작된다(8,2-9,35). 가르침에 이어 실천 부분이 이어지는데 예수의 실천에서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치유 이적이 먼저 등장한다.

가난한 사람들 중에도 아픈 사람이 가장 불쌍하기 때문에 그들이 예수에게 최우선 배려 대상이다. 배고픔 문제보다 목숨 살리는 것이 더 시급하다. ‘행동하는 메시아(구원자)’로서 예수의 모습이 소개되며 교회는 누구에게 먼저 다가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부분이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을 먼저 찾아야 한다.

마르코 복음서 1,40-45를 크게 줄인 오늘의 단락이다. 치유된 환자의 반응은 생략되고 그와 예수의 대화가 중심으로 등장한다. 우리도 예수와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보시오”로 장면이 바뀐다. 고통 받는 개인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소개된다. 나병이란 단어는 당시 여러 종류의 피부병을 포함하는 통칭이다(레위 13,2). 전염성 탓에 나병은 가장 위험한 질병으로 여겨졌다. 나병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사제에게 데려가야 한다. 나병으로 판정되면 더러운 사람으로 알려지고 사회에서 격리된다. 나병환자는 살아있으나 죽은 목숨으로 여겨졌다(민수 12,12). 나병에서 고쳐짐은 죽음에서 부활한 것과 동등하게 생각되었다. 환자의 인권이 예수에게 소중하다.

나병환자는 예수에게 “주님”이라 부르며 엎드린다. 예수에 대한 믿음의 표시다. “주님”은 마태오 복음서 7,21-23에서 예수를 심판자로 소개하는 데 처음 사용되었다. 제자들(8,25; 14,28; 16,22)과 병자들(8,2; 9,28; 15,22)―그 두 그룹만 예수를 주님이라 불렀다. 손을 뻗치는 동작은 이적을 일으키는 흔한 모습으로(2열왕 5,11) 공동성서(구약성서) 70인역(그리스어 번역본)에 80번 이상 보인다.

치유환자에 대한 예수의 부탁은 두 가지다. 치유 받은 사실을 알리지 말라는 침묵 명령이 그 하나다. 마르코 복음서에 나타난 치유환자에 대한 예수의 침묵 명령을 마태오는 네 곳에서 더 받아들였다(9,30; 12,16; 16,20; 17,9).

치유환자에게 레위기 13장에 나타난 대로 제물을 바치라는 말씀이 두 번째 부탁이다. 치유된 사실을 확인받으면 그는 다시 공동체에 복귀하는 것이다(레위 14,1 이하). 제물(doron)은 마태오 복음서 2,11을 제외하면 마태오 공동체에 익숙한 희생제물을 가리킨다(5,23 이하; 23,18 이하). 모세는 마태오에서 언제나 율법과 연관되어 나타난다(19,7; 22,24; 23,2).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는 예수의 부탁은 마태오에게 아주 중요하다. 이스라엘의 메시아로서 예수는 토라를 지킨다. 아직까지 이스라엘의 위기는 마태오 복음에서 나타나지 않는다.

행동하는 메시아로서 예수의 면모를 나병환자 치유 사건에서 처음 소개한 마태오의 의도는 분명하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분명히 지킨다는 것이다.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메시지를 복된 선언에서 언급(5,17)한 이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곧 이어질 이방인, 여인의 사례와 함께 병자 치유는 예수에게 특별한 배려 대상이다. ‘외국인, 여성, 병자’에게 우리도 특별히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다.

오늘 치유된 나병환자는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스라엘을 향한 예수의 애정이 그리스도교 해석 역사에서 소홀히 취급되었다. 마치 이스라엘과 분리하려고 애쓴 분으로 예수는 잘못 소개되었다. 예수를 돋보이려고 유다인을 비난하는 설교는 오늘도 여전히 흔하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가 얼마나 가까운 사이인지 알려주는 설교는 드물다.

오늘의 단락은 그런 옹졸한 태도에 대한 반면교사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는 많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깝게 있다. 오늘 성서신학의 과제 중 하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수의 애정을 상기시키는 일이다.

나병환자 치유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흔히 영적인 나병의 치유, 즉 죽을죄로부터의 해방으로 엉뚱하게 해설되곤 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 칼빈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신체적 고통에 대한 예수의 관심이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 것이다.

성서에 대한 식견이 모자라면 어떤 실수가 생기는지 보여주는 본보기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이나 신학자나 성인도 예외는 없다. 지난 시절 인물들의 성서에 대한 말씀을 분별없이 인용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에게서 우리가 성서를 배울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성서를 가르쳐야 온당하다.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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