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의 리얼몽상] <설국열차>, 봉준호 감독, 2013년작, 현재 상영 중

* 이 글은 명백한 스포일러다. 영화를 이미 본 사람들만 읽길 권한다.

 
그 열차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지만 실은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는 중이다. 18년째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는 인류 전체를 열차 안에 태운 채 달리고 있다. 초반부에는 17년째였다. 17이든 18이든 숫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같은 자리 같은 궤도를 이대로 ‘영원히’ 맴돌 것인가, 이게 중요한 문제다.

영원의 제자리는 어디인가

영원(永遠)이라고 했을 때,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건 누구일까. 영원이라는 것에 염증을 느끼며 회의에 빠지는 건 누구일까. 그 영원을 붙잡고 싶은 것은 누구일까. 영원의 그 영원히 반복될 고리를 안다는 건 행복일까 불행일까. 누가 영원을 유지하려 드는 걸까. 영원을 파괴해야 하는 임무는 누구의 몫인가.

단지 ‘승객’인 상류층에게는 어차피 관심사항이 아닐 수 있다. 엄청난 비용을 지불하고 승차권을 구매한 승객들로서는, ‘안전하게 하차’하라는 안내가 있기 전에는 움직일 필요가 없다. 그들은 열차 시스템을 믿는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엔진이든 뭐든 알아서 잘 굴러갈 거라 여긴다. 적어도 치른 비용만큼의 안위를 보장 받으면 그만이다.

그게 ‘중간칸’ 사람들의 목적이다. 밖은 얼어붙었는데 ‘믿음’마저 갖지 않고 무슨 수로 버티랴. 어차피 (열차 안에 갇혀 있을 뿐) 지금의 여건도 과히 나쁘지는 않다. 그러니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게 확연해 보일 때까지는 이탈하지 않고 믿어보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영화 <설국열차>는 이 열차의 사실상 진짜 ‘승객’들인 중간칸들을 단지 배경 정도로만 그렸다. 그들에게는 의지도 움직임도 없다. 그래서 사람은 꼬리칸과 엔진칸에만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중간층은 한 뭉치의 마네킹처럼 보인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는 절박감을 가장 먼저 느낀 건 꼬리칸이다. 천 명이 넘는 사람이 한꺼번에 올라탔을 때, 이미 알았다. 물도 음식도 없는 한 달을 처절하게 버티면서, 17년을 바퀴벌레만도 못한 족속으로 살아가면서, 세포 하나하나에 뼈저리게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내가 죽어도 끝나지 않는다, 내 아이도, 그 아이의 아이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 타라고 해서 탄 무임승차가 ‘죄’라면, 17년 이렇게 산 걸로 갚을 만큼 갚았다!

▲ 어쨌든 나는 길리엄의 삶을 믿기로 했다. 비록 윌포드 말대로 애초 의도는 ‘앞칸과 꼬리칸은 서로 돕는 사이’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쳐도, 17년을 한결같이 팔다리까지 내어주며 그처럼 살았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성이다.

윌포드의 말,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떤 후일담은 가공의 모략일 수 있다. 자신의 심복에게조차 “혀를 뽑아야” 한다는 말을 듣는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가 들려준 이야기는 ‘반전’일 수 있다. 믿는가? 썩 개연성 있어 보이는가? 여타의 후일담처럼 ‘믿기는 싫지만 가능한 이야기’라고 여기는가?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 있다. 17년을 곁에서 목격한 길리엄(존 허트 분)의 삶보다, 그토록 죽이고 싶었던 윌포드가 들려주는 몇 분짜리 이야기가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 이 엄청난 혼돈! 커티스는 오래도록 길리엄에게 속은 것일까? 아니면 지금 윌포드의 준비된 거짓말에 속고 있는 것일까? 길리엄도 메이슨 총리(틸다 스윈튼 분)도 주의를 준 바 있다. “윌포드를 만나거든 절대로 얘기를 들어주지 마.”

이야기란 무엇일까. 이야기의 효용은 언제 가장 폭발적일까. 평생 고결한 존재로 믿고 우러르던 스승의 ‘진실’을 스승의 ‘적’에게서 들을 때인가? 이야기는 실상 ‘듣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듣는 사람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던 생각이, 환청인지 육성인지 모를 것으로 치환돼 튀어나오며 실체를 얻는 것에 불과할지 모른다.

윌포드의 이야기는, 예수님마저 시달렸던 악마의 최후의 유혹과도 닮았다. 어쨌든 나는 길리엄의 삶을 믿기로 했다. 비록 윌포드 말대로 애초 의도는 “앞칸과 꼬리칸은 서로 돕는 사이”로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쳐도, 17년을 한결같이 팔다리까지 내어주며 그처럼 살았다면 그것은 이미 진정성이다.

왜 아이는 최후의 희망인가

커티스는 절대고독의 단독자가 되어보는 뜻밖의 경험을 한다. 실은 앞칸 문 앞에서 남궁민수(송강호 분)와 얘기를 나눌 때부터, 한꺼번에 반평생의 기억이 몰려들어 감정의 소용돌이에 빠진 상태다. 엔진까지 도달한, “이 열차 모든 칸을 가본 유일한 사람”에게 기다리고 있는 게 이런 것일 줄 몰랐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린다.

그는 결과적으로 동지 타냐(옥타비아 스펜서 분)의 아이를 위해 자신을 던졌다. 그러나 커티스는 ‘남의 아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게 아니다. 17년 동안 내내 ‘지키지 못한 아이’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의 영혼은 티미를 구하고 비로소 해방되었다. 한 번 죽을 뻔했던 아이, 길리엄이 살려낸 아이 에드가(제이미 벨 분)는 자라서 커티스의 ‘오른팔’ 동지가 됐다.

그 에드가를, 자기 눈앞에서 커티스는 죽게 했다. 죽음으로부터 구해낼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못했다. 명분 때문이었다. 끝까지 엔진까지 가야 한다는 대의명분 앞에 동지들의 죽음이 무색해지던 순간, 그의 가슴 속 아이는 두 번 죽었다. 아니, 두 번 죽이고 말았다.

절대 자기를 다른 어떤 것과 바꾸지 않으리라 확신하던 에드가의 자신만만하던 눈빛, 커티스의 묵묵부답을 이해할 수 없어하며 죽던 에드가의 뜬 눈, 그리고 그 눈을 감겨준 길리엄의 손. 이 셋의 관계는 다시 되풀이되었고, 커티스의 죄의식은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원점으로 꺼져 들어갔다. 아니, 곱절의 죄의식의 수렁이 새로 열렸다. 영원회귀인가. 역설적으로, 끝까지 가야 하는 대의명분도 그만큼 커졌다. 죽어간 이들에 대한 빚을 양 어깨에 짊어진 채로.

 

세 번은 할 수 없다. 베드로도 아닌데, 세 번씩이나 부정할 수는 없다. 인간의 한계를 넘는 죄의식이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정한 죄의식 때문에 ‘거꾸로 십자가형’을 감수했다. 이 처형 방식은 스스로에게 내린 형벌이기도 했다. 베드로의 신심은 곧 죄책감과 결부되어 있다. 커티스가 엔진의 일개 부속품이 돼버린 티미를 만났을 때, 그가 마주한 심연의 정체가 아니었을까.

이 아이를 외면하고 뚜껑을 덮으면, 18년을 괴롭힌 죄의식은 세 곱절이 될 것이다. 게다가, 아이는 한 명으로 끝날 리가 없다. 티미가 기계에 먹혀버리면 제2, 제3의, 아니, 끊임없는 ‘120센티미터 미만의’ 인간 부품이 조달되어야 한다. 커티스가 지금 제안 받은 ‘지도자’의 향후 임무란, 기차가 멎지 않게 하기 위하여 인신공희(人身供犧)의 집행자가 되어야 하는 일이다.

엔진은 이미 멈춘 지 오래

한 아이를 죽이려했던 죄의식이, 커티스에게 18년의 험난한 투사의 길을 걷게 했다. 한 시도 긴장을 놓치지 않으며 ‘타이밍’을 살펴야 했고, 한 시도 ‘짐승’이었던 자신의 과오를 잊지 못했다. 그 삶을 영원히, 영원히 반복하며 단독자로, 사람을 잡아먹는 엔진 곁에서 살아갈 것인가? 끝까지 도달해 보고자 했던 영원의 맨얼굴은 그런 식의 영생(永生)이었다.

엔진은 이미 멈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완전히 멎는 건 시간문제였다. 더 이상 ‘인간 부품’을 투여하지 않으면, 바로 멈춘다. 지금은 한 군데에 불과하지만, 곧 여기저기가 고장날 터이고, 부품은 멸종됐고, 모든 부품은 급기야 전부 인간으로 교체되고 말 것이다. 꼬리칸의 사람이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야 할 일이었다. 윌포드가 엔진 설계자로서 정말 전지전능했다면, 꼬리칸을 기획하고 ‘노예들’의 아이들이 계속 태어나게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불멸의 엔진으로 포장했을 땐 이미, 사람을 잡아먹으며 굴러가는 길을 택한 거였다.

종말, 곧 엔진의 멈춤은 이미 와 있었다. 누가 불러낸 것이 아니었다. 커티스와 혁명군, 혹은 남궁민수나 요나(고아성 분) 등등이 조장한 것도 아니었다. 기차 안의 모든 이가 이미 맞이하고 있으나 인지하지 못한 현실이었다. 어쩌면 인지만 못했을 뿐 마음 깊은 곳에서는 불안해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보안설계자가 나서야 할 때란, 이렇게 시스템이 자체 동력을 잃고 타자(他者)를 잡아먹기 시작했을 때일 것이다. 커티스가 아니었어도 윌포드든 누구든 남궁민수를 깨워야 했다.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의 숙명이다. 설령 ‘녹을 준비가 돼 있는 눈’이란 게 그의 몽상에 불과할지라도 그에게는 그때를 틈타 딸 요나와 미래 세대에게 땅을 밟게 해야 할 사명이 있었다.

에너지는 한정돼 있다. 분배가 문제다. “각자 정해진 자리를 지켜라”는 처음 탑승시의 일방적 주문을 18년째 강요하는 동안 착취 구조만 강화되었다. 누군가를 에너지의 희생 제물로 삼으며, 누군가는 에너지 도둑으로 연명한다. 정해진 에너지지만 그때그때 효율적으로 재분배하는 데 골몰했다면, 다른 과정과 다른 결말이 도출될 수 있었을까?

서로를 살릴 수 있는 우리가 되기 위하여

궁금하다. 그 기차에서 몇 명이나 살아남았을 것 같은가? 관객의 세계관은 어쩌면 여기서 확연히 나뉠 수도 있다. 나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아남았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그냥 그렇게 믿고 싶다. 커티스와 남궁민수, 그 외 수많은 사람들도 상당수 살아 있을 거라고 여기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프랑스 작가들의 원작 만화를 모르는 나로서는, 봉준호 감독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단서가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는 ‘죽었다’는 단정은 없었다. 그냥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 좋을 대로 생각하기로 했다. 이 연극적이고 우화적인 영화가 함의하는 알레고리를 긍정적인 쪽으로 몰고 갈 단서들은 많다.

타이밍은 언제고 내가 맞추는 것이 아니었다. 결정한다기보다는 주어지는 것이었다. 외부의 힘일 수도 있고 세상의 어떤 흐름일 수도 있다. 어쩌면 천운 같은 것이 단 ‘4초 동안만’, 드물게 주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럴 때, 준비된 나였으면 좋겠다. 나를 살리고 너를 살릴 수 있는, 그리하여 우리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준비 말이다.
 

 
 

김원 (로사)
문학과 연극을 공부했고 여러 매체에 문화 칼럼을 썼거나 쓰고 있다. 어쩌다 문화평론가가 되어 극예술에 대한 글을 쓰며 살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저작권자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