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오늘을 말한다 - 14] 8월 18일 (연중 제20주일)

모든 그리스도인은, 개신교 성도든 구교우이든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 예수님이 그냥 위대한사람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외아들이며, 만물의 주인, 곧 주님이라고 믿습니다. 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때문에 죄로 말미암아 멀어진 세상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가 다시 회복되어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믿습니다. 그 예수님만이 참 행복과 참 평화를 가져다주신다고 믿습니다. 그 예수님은 그리스도 곧 메시아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믿으면 만사가 다 잘 될 것이라고 희망하고 믿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와는 너무 다른 일생을, 그것도 아주 짧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요절한 셈입니다. 그것도 처참한 타살로 삶을 마쳤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치고는 그 삶이 참 구차하고 형편없었고 궁색했습니다. 명가에서 귀한 아들로 태어나 도련님으로 자라지도 못했습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남의 나라로 도망갔다가 숨어살았다고 합니다. 장성해서는 머물 곳도 마련치 못했습니다. 아니, 스스로 방랑(?)의 길을 나섰습니다.

점잖게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지만, 어쩌면 사람들의 박대 때문이었을지 모릅니다. 당연히 남들 부러워할 정도로 출세하지도 못했습니다.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놀라워하기도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동네서 쫓겨나고, 심지어는 낭떠러지에서 떠밀려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고향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들한테 마귀 들렸다고 손가락질 받기 일쑤였습니다.

▲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세부, 렘브란트의 1634년 작품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에 내몰릴 때면 누군가 변호해줄 사람 한둘 쯤은 있게 마련일 텐데, 그마저도 없었습니다. 그의 죽음에 아무도 변호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있었다면 빌라도 정도였을까요. 수년 동안 같이 다녔던 제자들은 이해하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잡혀갈 때 모두 도망가 버렸습니다. 베드로의 경우는 참 너무했습니다.

죽음과 부활로 세상의 구원이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세상은 하나도 변하지 않은 채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어쩌면 도망간 제자들이나, 베드로가 이해 안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다가 살해된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은 화려하게 살려 하고, 명가를 일구려 하고,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남들 부러워할 정도로 출세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존경받지 못해 속상하고, 대접받지 못해 화가 나고, 다른 사람을 내 뜻대로 조종할 힘을 갖고 이기지 못해 절망하기 일쑤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위해 내가 바라는 것을 다 해주길 바랍니다. 그런 삶이 행복한 삶이라고, 그렇게 되어야 평화로울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있다는 그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열을 일으키러 왔다고 하십니다(루카 12,51 참조). 그분은 우리가 바라는 행복과 평화를 줄 뜻이 없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나눔은커녕 공정한 분배조차 마음에 두지 않은 채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덜 가진 사람의 것마저 빼앗는 것을 ‘성장’이라고 하고, 그것을 이루는 능력을 칭송하는 이 세상의 탐욕과 욕망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힘이 세야 남을 내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고, 그것을 그럴듯하게 ‘권력’이라 부르고, 그 권력으로 시민을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을 ‘출세’라고 여기는 세태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는 것입니다. 한쪽은 핵무기를 갖고, 다른 한쪽은 고가의 첨단 전투기를 갖고,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서 대규모의 해군기지를 세워 막강한 무력을 갖춰 서로를 벌벌 떨게 만들어야 ‘안보’와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것을 결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따돌림을 받고 배척을 받고, 그리고 마침내 짓눌려서 살해됩니다. 예레미야를 두고 백성의 지도자들, 대신들이 한 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예레미야는 마땅히 사형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이따위 말을 하여, 도성에 남은 군인들과 온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사실 이자는 이 백성의 안녕이 아니라 오히려 재앙을 구하고 있습니다”(예레 38,4).

그동안 우리가 구했던 “백성의 사기”, 우리가 구했던 “백성의 안녕”은 혹시 대신들이 내세웠던 그것이 아니었는지 살펴봐야겠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백성의 사기와 안녕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자기들 재산을 늘렸고, 자기들끼리 권력을 독점했으며, 마침내는 나라를 주변 강대국에 통째로 넘겼습니다. 수천 년 전 이스라엘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불과 백 년 전에 그랬습니다. 을사조약이라고 우기지만 사실은 을사늑약이었고, 그 늑약에 앞장선 이들은 5부 대신들이었습니다.

지난 몇 십년간, 그리고 오늘도 우리의 대신들은 여전히 “백성의 사기”와 “백성의 안녕”을 외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 같은 사람, 예수 같은 사람은 배후자로 지목했고, 때로는 그냥 막무가내로, 때로는 법을 이용해서 처벌하고 배제했습니다. 노동자들은 속절없이 해고당하고, 강정마을 주민은 속절없이 땅을 수용당하고, 밀양의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에게 수모들 당하기 일쑤입니다. “아니오” 하면 “떼”를 쓴다고 손가락질하고, 그래도 “아니오” 하면 “백성의 사기”와 “백성의 안녕”을 해치는 죄인 취급합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들의 바람대로 사기를 떨어뜨리고, 분열을 일으키는 자들은 제거되어야 하고 죽어도 마땅하다고 믿고, 그것을 ‘애국’이라 포장하고, ‘강력대응’에 환호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죄와 맞서 싸우면서 피를 흘리며 죽어간,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신, 죄인들의 적대행위를 피하지 않고 견디어 내신(히브 12,2-4 참조) 진짜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 편하자고 화려하게 장식한 예수님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박동호 신부
(안드레아)
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신정동성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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