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46

“나의 이 말을 듣고 그것을 실천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을 짓는 지혜로운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닥쳐도 그 집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집이 바위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내 말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자기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습니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크게 무너질 것입니다.” (마태 7,24-27)

비탈 바위 위에 서 있는 집과 계곡 모래밭 위에 서 있는 집이 대조되어 나타나는 비유다. 같은 비유가 루카 복음 6,47 이하에도 나온다. 강가 두 집이 대조되어 나타나는 루카 복음 부분보다 언어로나 지형적으로 마태오의 비유가 더 이스라엘 사정에 가깝다. “나의 이 말”이란 단어로써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충실함이 더 강조되고 있다.

유다교 문헌에도 비슷한 비유가 보인다. 선행을 하고 토라를 배우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짓는 사람과 비유되었다. 이스라엘 성인 남자라면 당시 누구나 자기 집을 직접 지었다고 보아도 된다. 이스라엘에서 홍수는 10~11월에 볼 수 있다. 홍수는 공동성서(구약성서)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다(욥 1,19; 에제 13,10). 성서 공부와 율법 실천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토론도 있었다. 성서 공부가 실천으로 이끈다는 설명이 제시되었다. 예수는 성서 공부 자리를 말씀 듣는 것으로 바꾼 셈이다. 예수의 말씀은 아직 기록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쓰인 토라와 쓰이지 않은 예수의 말씀을 들음은 사실 같은 맥락이다.

 ⓒ한수진 기자

예수는 청중에게 두 가지 선택을 자주 제시한다. 예수는 이분법 논리를 좋아하는 편이다. 다른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 주요 청중인 가난한 사람들에게 쉽게 설명하려는 의도에서 그렇다. 집의 비유는 실생활에서 요긴한 처세술에 대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비유다. “바람”은 성서 해석 역사에서 ‘미신, 성욕’(Augustinus), ‘욕망, 악마의 힘’(Hilarius) 등 주로 삶의 체험에 대한 의미로 다루어졌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판을 의식하며 사는 사람을 가리킨다.

“바위”는 예수를 가리킨다(1코린 10,4). 예수의 말씀에 기초하여 살라는 당부겠다. ‘그리스도교 개혁 시대’(‘종교개혁’이란 단어는 적절하지 않다)에 오늘의 본문은 믿음과 행업(실천)이 대립되는 의미로 해설되었다. 믿음에 의지하는 사람은 바위 위에 집 지은 사람으로, 행업에 의지하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지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본문과 전혀 관계없는 잘못된 해설이다.

‘예수의 말씀을 들음’은 오늘의 방식으로 표현하면 성서 공부를 가리킨다. 성서를 모르면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모르면 예수를 알기 더 어렵다. 예수가 만나고 상대한 사람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이다. 부자와 권력자들과 접촉도 간혹 있었으나 대부분 논쟁하는 자리가 그 배경이다.

그리스도인이란 예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은총과 기도는 실천 안에서 비로소 체험된다. 행동할 때만 은총을 경험할 수 있고 은총을 알 수 있다. 은총과 실천은 반대 개념이 아니고 실천은 은총의 체험 무대다. 실천하지 않고 은총을 언급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고서 기도에 대해 토론하는 셈이다. 음식은 먹어보아야 맛을 아는 법이다. 음식을 눈앞에 놓고 사진 찍고 감상해서 그 맛을 제대로 알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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