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댓말로 읽는 헌법 - 11]

슬아, 이번 편지에서는 양심의 자유, 종교의 자유와 관련되는, ‘사랑할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까 해. ‘사랑할 자유’라니, 조금 우습지 않니? 사실, 그런 용어는 없단다. 오빠가 만들어낸 말이야. 하지만 생각해 보자. 슬이 넌 ‘사랑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니?

사랑하고 싶은 사람을 사랑할 권리는 헌법 제10조의 행복추구권이나 인격권에 의해서 보장되는 헌법상 기본권이라고 할 수 있겠지.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권리는 헌법 제36조에서 보장하고 있고. 슬아, 한 사람에게서 그가 사랑하는 누군가에 대한 마음을 제거해 버린다면 그의 정체성에 남는 것은 무엇일까?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인격을 형성하는 일이기도 하다고 오빠는 생각해.

그런데 이런 ‘사랑’의 영역에 대한 제한은 역사 속에서 늘 이뤄져 왔고, 대개 그것은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 혹은 종교의 영역에서 이루어져 왔어. 예컨대 조선 후기에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전 사회에 뿌리내리면서 당시 사회에는 ‘동성동본금혼’의 관습이 정착하게 된 것처럼 말이야.

흥미로운 점은, 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서는 이미 1908년에 동성동본 혼인금지 조항이 법조문에서 사라졌다는 거야(* 한국사특강편찬위원회, <한국사 특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418쪽).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최근까지도 동성동본 금혼을 비관해서 연인이 함께 자살하는 일이 많이 있었고, 1997년 동성동본 금혼을 규정한 민법 제809조 제1항 위헌제청〔* 헌법재판소 1997.7.16. 95헌가6 내지 13(병합) 전원재판부〕 사건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적용 중지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완전히 동성동본금혼이 폐지되는 방식으로 민법이 개정된 것이 2005년이란다. 결국 중국에서 동성동본금혼이 폐지되고도 100년이나 걸려서야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금혼제도가 폐지된 거야.

헌법재판소의 결정문을 잠깐 볼까?

“동성동본금혼을 규정한 민법 제809조 제1항은 사회적 타당성 내지 합리성을 상실하고 있음과 아울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규정한 헌법이념 및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과 가족생활의 성립 · 유지라는 헌법규정에 정면으로 배치될 뿐 아니라 남계혈족에만 한정하여 성별에 의한 차별을 함으로써 헌법상의 평등의 원칙에도 위반되며, 또한 그 입법목적이 이제는 혼인에 관한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할 사회질서나 공공복리에 해당될 수 없다는 점에서 헌법 제37조 제2항에도 위반된다 할 것입니다.”

판결문 중에 혼인과 가족생활에 관한 헌법 규정이 개인의 존엄과 양성 평등에 기초했다는 점을 주목해 보자. 관련 조문을 한 번 볼까?

헌법 제36조
제1항 혼인과 가족생활은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을 기초로 성립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국가는 이를 보장합니다.
제2항 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제3항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습니다.

혼인에 있어서의 남녀동권은 이미 1948년 헌법 제정 당시부터 헌법적 혼인질서의 기초로 선언되었단다. 그런데도 동성동혼금혼이 폐지되기까지는 60년이나 걸렸어. 우리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성리학 이데올로기의 힘이었던 거야.

슬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어떤 ‘사랑’이 제한되고 있을까?

동성애.

이성이 아닌 동성에 대한 사랑. 남자 동성애자를 ‘게이’라고도 하고 여자 동성애자를 ‘레즈비언’이라고도 해. 우리 사회에서 존재 자체만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인 것 같아.

▲ 지난 4월 25일에 열린 고(故) 육우당의 10주기 추모기도회에 전시된 유품.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기도 했던 그는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교회와 사회에 절망하며 19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문양효숙 기자

존재하는 사람을, 부정하거나 비하하는 것.

그것은 가장 강력한 종류의 차별이 아닐까? 예컨대 장애인의 이동권이 여전히 매우 제약되어 장애인들이 길거리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나 혼혈인들이 ‘단일민족의 신화’ 속에 삶과 배움의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 동성애자들은 길거리에서 애정 표현하기조차 어려운 것. ‘일반’과 다른 ‘이반’의 존재를 일단 부정하는 것. 우리 사회는 이런 경향이 매우 강한 것 같아.

특히 이미 존재하는 동성애자들을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묘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 혹은 내 가까운 사람이 결코 동성애자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것. 더욱이 동성애자들로 인해 사람들이 특정한 불치의 병에 걸릴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면서 그들을 일종의 ‘숙주’처럼 바라보는 어떤 시선에 대해서는 오빠는 웃음조차 나오지 않아.

2010년, 법무부가 입법예고한 ‘차별금지법안’에 ‘성적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포함되는 것을 두고 엄청난 파장이 있었어. 특히 일부 종교 종파들에서 위 내용이 포함되는 것에 대한 대대적인 반대 운동을 벌였고, 그것은 ‘성공’했지. 법안이 폐기되었으니까.

슬아, 이런 이야기들이 헌법상 기본권의 문제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그건 바로 일부 종교 종파들에서 일어난 ‘동성애 반대 운동’이 ‘종교 전파의 자유’의 문제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야. ‘동성애’를 부정하는 교리를 갖고 있고 세상에서 동성애가 사라져야 한다는 교리를 갖고 있다면, ‘동성애자를 차별하지 말자’는 사회적 합의(의 산물인 차별금지법안)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은 대화와 토론의 과정을 거쳐 합의의 과정에 반영될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언론을 통해 대대적인 광고를 하고, 집단적인 집회를 하는 모습들은 단지 사회적 합의에 대한 부동의 의사를 표현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설득시키려는 모습을 넘어서 그 특정 종교의 ‘교리를 전파’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 않니? 물론 우리 사회에는 ‘종교 전파의 자유’가 있지. 따라서 만일 이것을 ‘종교의 자유’의 문제로 본다면, 이것은 특정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종교의 자유와 동성애자들의 평등권이라는 헌법상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로 이해할 수 있게 돼.

앞에서 이야기한 ‘강의석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결에서, 종립학교에게는 특정 종교를 전파할 자유가 있지만, 다른 종교를 가진 학생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그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이야기하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독교의 특정한 종파의 관점에서 동성애에 대해 혐오의 시선을 가져야 하는 걸까? 예컨대 오히려 동성애가 이성애에 비해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동성애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람은 우리 사회에 살면 안 되는 사람인 걸까?

슬아, 사실 오빠는 이것이 ‘생명’을 죽이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통계 자료로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들 가운데 자살률과 이성애자 자살률을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높을까? 동성애자 자살률이 더 높지 않을까?

2010년 방한한 미국 시카고신학대학의 테드 제닝스 교수는 동성애 혐오자들의 왜곡과 달리 실은 성경에서 다윗과 요나단, 룻과 나오미, 마태오 복음에서의 소년을 사랑하는 백인대장 이야기 등 동성 간의 사랑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다고 이야기해. 그리고 바오로 사도의 코린토서 등에 등장하는 죄의 종류 가운데 하나인 ‘남색’이란 실은 ‘전쟁 후 군인들에 의해 이뤄진 집단적 남성 강간’이라는 용어에 대한 후대의 왜곡된 번역임을 지적하기도 하지.

특히 그는 성경을 보면 예수가 이야기한 ‘죄’란 ‘힘 있는 자들이 사용하는 오만과 폭력’임이 분명한데, 교회가 ‘힘 있는 자들’과 한편이 되기로 마음먹으면서 ‘죄’가 성경과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다고 주장해. 즉 교회는 특권층의 죄를 거론하는 대신 보통사람들의 ‘성’을 ‘죄악’의 대타로 등장시켰고, 가장 대표적으로 약자인 동성애자를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란다. 결국 그에 따르면 교회가 수많은 게이 성향 젊은이들이 자살을 선택하도록 몬다는 거야. (* 조현 기자, ‘[테드 제닝스 교수 특별 강연]“교회 안 동성애 혐오는 성경 고의로 왜곡한 탓”’, <한겨레신문>, 2010. 6. 10)

슬아, 우리 사회의 헌법 질서는 헌법 제11조의 ‘만인의 평등’을 대원칙으로 하고 있고 ‘특정 성적 지향을 가졌다고 하여 그것을 드러내지도 못할 만큼 차별 받는 것’을 용인하는 질서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주었으면 좋겠어. 물론 오빠와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겠지. 오빠가 아는 지식은 몹시 부족하고.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단어를 입 밖에 올렸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감옥에 가던 시대에서 벗어난 지 30년도 채 되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동성애자’라는 ‘소수자’들의 눈물을 짓밟는 점에 대해 좀 더 예민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단’을 배척하는 ‘전체주의 문화’에 친숙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다른 사람의 입장을 좀 더 생각하려고 하는, ‘겸손함’이 아닐까?

사랑할 자유를 이야기하다가 여기까지 와 버렸네.

슬아, 좀 더 잘 사랑하려면, 좀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해야겠지?

종교의 자유는 다른 종교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의 헌법상 기본권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인정된다는 점을 명심하자꾸나. 더욱이 그 사람들의 헌법상 기본권이 ‘평등권’이라면,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헌법상 기본권이라는 사실을.
 

 
차진태 (모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 재학 중이며, 구속노동자후원회 자문위원, 대학원자치회 대표를 맡고 있다. 예수살이공동체에서 배동교육(청년교육)을 받은 회원이며, 서울대 가톨릭 기도 모임 ‘피아트(FIAT)’에도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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