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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앞서 가방을 비우고 마음을 채우기[레알청춘일기 - 하민]

유럽 여행을 온 쿠바 친구들이 재워줘서 고맙다며 시가 한 박스를 선물로 주고 갔다. 처음 떠나는 유럽 여행에 한껏 들뜬 친구들은 뭘 준비해야 할지 몰라 두루마리 휴지까지 짐 가방에 넣어가지고 왔다며 세제, 수건, 책, 그리고 시가와 함께 놔두고 갔다. 한 차례 불필요한 짐을 비웠는데도 각자 큰 이민가방에 추가 캐리어 하나씩, 그리고 배낭까지 짊어지고 가는 모습이 조금은 힘겨워 보였다. 나 또한 잠시 여행을 떠날 뿐인데 많은 것들을 챙기고, 가방을 비우는 대신 더 많은 물건으로 무겁게 채워서 지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올 때가 있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얼마 전 한 프랑스 시골 본당에서 뵈었던 신부님이 떠올랐다.

시골 본당에 계신 그 한국 신부님께서는 한국에서 오랜 시간 교단에 서기도 하신 분인데, 한 곳에 고여 있기 보다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어디든 떠나실 준비로 선교를 신청했다고 하셨다. 내가 혼자서 4년 만에 쌓인 짐만 해도 한 살림인데 다년간 모으신 책과 여러 가지 물건들을 모두 정리하고 떠나오시기란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을 것 같다. 게다가 물질적인 것 외에도, 익숙한 언어와 문화, 사회적 위치 등 모든 생활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버린 이질감에 힘드셨을 것 같다. 학생의 신분으로 외국에 나와 있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선교라 남다른 용기가 필요하셨겠다는 생각도 든다.

떠날 채비를 하는 과정에서부터 수많은 생각과, 다짐과, 이해하려는 노력과 기도가 없었다면 힘겹고 버겁게만 느껴졌을 모든 어려움이지만, 결국 값진 경험과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마무리까지 잘 지어야 한다는 말씀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맺음도 그만큼이나 중요하다는 말씀도.

익숙한 생활을 뒤로 하고 새로운 어려움에 맨몸으로 직면한다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일이기 때문에, 길을 나서기 전에 우리는 작은 일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이것저것 짐을 많이 챙기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준비를 철저하게 한다 해도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기도 하고, 그 어떤 여정도 완벽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준비해온 물건들로 해결할 수 없는 예상치 못한 어려움 앞에 우리는 임기응변의 지혜를 발휘할 필요가 있는데, 그 지혜로운 융통성은 캐리어 가방에서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챙기기에 앞서 다양한 지식과 올바른 마음가짐을 갖춰야 하는 게 아닐까, 신부님의 모습에서 교훈을 얻었다.

   
▲ 도심 속 센느강변에 설치된 ‘해변’에서 휴양지 분위기를 즐기는 사람들 ⓒ하민

이렇듯 한 사람을 만나면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세계 각국의 나라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경험을 하고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우는 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주위 사람들과 시간 보내는 일인 것 같다. 성별이나 나이를 불문하고 나와는 다른 경험들을 하고 다른 일들을 겪으며 살아왔을 상대방에게서 보고 듣고 배우며 간접적으로 접하는 많은 것들이 결국 내게 어떤 형태로든 도움이 된다. 20대 중반의 유학생인 지금의 나에게 가장 값진 것은 바로 이런 다양한 형태의 경험인 것 같다. 어딘가 가서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 인생 선후배의 이야기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겪어보는 것들, 그리고 남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여유가 있다는 게 참 감사한 일이다.

가방은 비우되 마음은 가득 채우는 것이 좋겠다고 느끼게 해 주신 그 신부님을 빠리에서 다시 뵙게 되었을 때에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우연히 한국에 있는 건축물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왜 어떤 사람들이 동대문의 자하 하디드와 청계천의 클래스 올든버그에 대해 이질감을 느끼고 반감마저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토론하면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으로 흘러갔다.

경복궁에 가면 건축양식에 대해 설명을 들을 수 있는데, 중국과 한국의 전통 건축물의 차이 중 나무 기둥의 모양과 건물의 층수가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한 건물의 기둥들을 모두 규격화하고 여러 층을 쌓아 올리기 위해 기둥 여러 개를 잇는 반면에, 한국의 전통 건축물에 사용되는 기둥은 각자 한 그루의 나무의 모양에 따라 길이가 정해지고, 그 나무의 형태를 최대한 살리는 곡선을 이루며, 각기 다른 높이의 맞춤형 주춧돌 위에 얹어짐으로써 건물의 수평을 맞춘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들을 살리면서 주위 환경과 조화를 이루어 아름답다. 자연을 거스르면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기보다 자연스럽게 묻히고 사그라지는 모습에서 경건한 힘과 위엄마저 느껴진다.

지금 나에게도 내 것이 아닌 것을 억지로 갖기 위해, 내 의지로 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이루고 싶은 욕심에 괜히 애쓰는 모습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본다. 내가 가진 나무를 다듬고, 알맞은 높이의 주춧돌을 마련해야 할 때에, 불안정한 기반 위에 급하게 층층이 쌓아올리기 바쁘고, 남들 시선을 의식해 두터운 페인트칠만 연신 해대고 있지는 않은지 새삼 나를 돌아보게 된다.

아무리 화려한 것들로 채운다 한들 기반이 흔들리는 위험한 건축물은 그 누구에게도 안전한 휴식처를 제공할 수 없다. 흔히들 말하는 ‘스펙’을 쌓아가는 20대는, 내가 가진 이상을 인위적으로 추구하기보다 이미 가지고 있는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고 내 것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쯤은 주워 담는 것을 멈추고 혹시 쌓아두었던 것들 중 비워내야 할 것은 없는지, 정리해야 할 것은 없는지 확인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민 (도미니카)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한국에 돌아와 초등학교까지 다니다가 일곱 살에 다시 영국으로 가서 3년을 살았다. 프랑스계 국제학교를 거쳐 프랑스로 유학 왔다. 고등학교 땐 이과였는데 언어와 미술에 관심이 많아 대학에서는 문학과 미술사를 공부했다. 여행을 다니고 새로운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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