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사람 인물열전
강은주, 인권활동가로 살기… 갈팡질팡해도 괜찮아요![인터뷰] 강은주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3년차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강은주 드보라. 2011년 2월부터 인권활동가의 길로 들어섰으니 이제 꼭 2년 6개월이 됐다.

천주교인권위원회의 평화 분야 활동과 소식지 담당으로 마감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는 강은주 활동가. 그가 처음 인권활동가로서의 삶을 선언했을 때, 놀라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 자신도 다만 정의와 평화를 위한 일에 눈감지 않고, 할 수 있을 만큼 힘을 보태면서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잘 나가는 학원 강사였던 그가 더 좋은 일자리로 옮기기 직전, 인권활동가로 유턴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첫 인연, 스무 살 어느 날 스스로 찾아갔던 천정연

사실 강은주 씨는 천주교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이들에게는 낯익은 인물이었다. 첫 인연은 그가 스무 살이었던 2000년 어느 날, 혜화동 천주교정의구현전국연합(천정연) 사무실의 문을 스스로 두드렸던 때였다.

고등학교 때까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즐겨보고, 사회 · 정치 문제를 자주 이야기하던 집안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인지, 대학 입학 후에 뭔지 모를 목마름이 느껴졌다. 대학생이 되면 사회 문제에 대해 공부도 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목소리도 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혜화동에 친구와 공연을 보러 갔다가 천정연 사무실을 발견했다.

   
▲ 강은주 천주교인권위원회 활동가 ⓒ정현진 기자

“열린 문틈으로 어떤 포스터를 봤는데, 민중, 민주…… 이런 단어들이 있었어요. 정말 반가웠어요. 막상 문을 열고 들어가자니 좀 두려웠는데, 그래도 용기를 내고 문을 두드렸죠. 그때 마침 그 자리에 있었던 ‘평화를 여는 가톨릭청년’이라는 단체의 두 대표가 저를 아주 반갑게 맞아줬어요. 당시 신자도 아닌 제가 제 발로 찾아온 데다 젊은이들이 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거든요. 박순희 천정연 대표님은 그 후로 몇 년 간 저를 ‘우리 천사’라고 부르셨어요, 하하하.”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처음 접한 큰 사건은 ‘효순이 · 미선이 사건’, ‘이라크 파병 반대활동’이었다. 아무것도 몰랐지만, 원했던 일이었기에 신이 났고, 보이는 모든 것을 배웠다. 그는 좋은 인연이자 첫 번째 ‘불운’이었다며 웃었다.

천주교인권위 아르바이트, 그리고 ‘급여명세서 사건’

그 후로 10여 년, 학비를 벌기 위해 시작했던 학원 강사를 계속하게 되면서 직장인이자, 의식 있는 시민으로 살고자 했다. 불의에 눈감지 않는 사람으로, 온전히 투신하지는 못하지만 몇몇 평화 · 인권단체 회원으로서, 지지하고 연대하는 시민으로 살자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지내던 지난 2011년, 두 번째 ‘불운’이 찾아왔다. 천주교인권위원회 아르바이트였다. 더 큰 학원으로 옮기기 위해 쉬고 있던 중, 일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고 흔쾌히 나섰다. 그리고 활동가가 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정말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어요. 상임활동가라니……. 인권활동이나 활동가들을 아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었죠. 인권활동가들의 삶을 충분히 지지하고 존경하지만, 정작 내가 한다고 생각했을 때, 생활인으로서는 정말 녹록치 않잖아요.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희생과 양보가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두 가지 감정을 가졌던 셈이죠.”

한 달 정도 고민에 빠졌다. 좋은 일이고 한편으로 욕심나는 일이었지만 현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지만 웬일인지 깊이 고민하게 됐다. 3분의 2 정도 긍정적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던 때,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이른바 ‘급여명세서 사건’. 천주교인권위 업무 중 우연히 서류를 정리하다가 급여명세서를 발견했고, 그것이 결정타였다.

“생각보다 총액이 많더라고요, 하하. 세상이 많이 좋아졌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중요한 건, 하필 그것이 보너스달의 명세서였다는 것이죠. 갈등하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함께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지만, 명세서는 결국 현실적 명분, 결정의 계기가 된 셈이에요. 두 번째 불운이랄까요? 하하하.”

반전이었다. 역시 그 어떤 극적인 전환도 사소한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인권활동가의 삶. 인권운동을 지지하는 것과 활동가로서 투신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일 터였다. 하루의 대부분, 때로는 며칠씩 곳곳에서 벌어지는 반인권 · 반평화의 상황과 씨름해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 어떻게 체감되고 있는지 물었다.

   
▲ 지난해 9월 열린 평화군축박람회에서 강정마을을 상징하는 해녀 복장으로 춤추는 강은주 활동가 ⓒ양여옥

인권활동가들의 인권은 안녕한가요?

그는 “인권의 문제는 생각보다 넓고 구체적이었다”고 말했다. 평화권, 생존권, 주거권, 이동권, 노동권……. 다양하게 나뉘는 전문 영역이나 학술적인 개념을 떠나 인권은 곧 사람이고, 상황과 사람 수만큼의 이름을 갖고 있다고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을 비롯한 활동가들의 인권을 고민하게 된 것이다.

“누군가 ‘너의 인권은 안녕하냐’고 물었어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주고받은 이야기지만, 곱씹어 볼수록 쉬운 일은 아니더라고요. 어떤 분은 천주교 안에서 일하는 활동가로서 스스로의 인권이나 노동권을 살피는 것은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요. 또 운동진영 안에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가부장적 문화, 예를 들면 주변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그냥 담배를 피운다든가 하는 사소한 것들이요. 거대담론을 이야기하기는 오히려 쉽지만, 사소한 일상의 인권 문제를 다루기란 쉽지 않아요.”

그는 스스로에 대해 “여전히 갈팡질팡하고 있다”고 표현했다. 활동가로서 재미도 있고, 자부심도 있지만 어떤 때는 나 하나 건사하는 것도 힘든 존재로서 느끼는 회의감과 무력감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가고 있다고 했다. 일 자체에 대한 회의보다는 언제까지 활동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물음과 두려움이다.

“자기 개발과 충전의 시간은 물론, 지금 당장의 삶도 버거운데 노후 보장에 대해서는 꿈도 못 꾸죠. 그러니 활동가들의 활동 수명이 짧아요. 너무 안타깝죠. 여러 단체에서 늘 사람이 없다고 아우성이고요. 상대적으로 구호단체 같은 곳에는 후원이 많지만, 구조 문제와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권단체는 너무 열악해요. 사람들이 그 두 가지가 모두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도록 문화가 바뀌어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에요.”

강정의 며느리, 강정의 시누이… 첫사랑 강정을 앓다

인권활동가로서 그의 첫사랑은 강정마을이다. 천주교인권위 활동가가 서넛 밖에 안 되는 와중에도 먼저 강정 파견을 원했을 정도였고, 지금도 강정에 대해서는 애틋하다. ‘제주 평화의 섬 실현을 위한 천주교연대’와 인권단체들 사이를 오가는 사무국 역할을 하면서 그녀가 얻는 별명도 ‘강정의 며느리, 강정의 시누이’다.

강정마을 문제에서 그녀가 가장 분노한 것은 국가의 폭력이었다. 오랜 시간 마을을 지켜온 이들에게 국책사업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해군이 직접 주민들에게 폭력을 가하는 것을 보면서, 혼자 울기도 했다.

강정마을을 보면서 희망이라는 단어보다는 사실, 마음 아픈 감정이 먼저인 그는 “평화가 쉽다면 이렇게 갈급하게 구하지 않을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미사 때에 “평화를 주소서”라는 간구가 특별히 와 닿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평화’에 대해 더 오래, 깊이 고민하고 궁리해 볼 작정이라고 말했다.

   
▲ 지난해 3월, 제주 강정마을 구럼비 바위 폭파를 막기 위해 펜스를 뚫고 구럼비 바위로 들어간 강은주 활동가 ⓒ정현진 기자

북극성 바라보며 길 잃지 않고 나아가는 여행자처럼

“지난번 밀양 송전탑 관련 인권실태조사를 할 때였어요. 생전 처음 해보는 일이라 굉장히 두려웠고, 잘 할 수 있을까 불안했죠. 그런데 다른 인권단체 선배가 함께 간다고 했을 때, 나와 같이 활동하는 것이 아닌데도 그저 든든했어요. 그렇게 위안을 받으면서 내가 저 선배들과 같은 존재가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가, 그 순간 다시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는 북극성 같은 선배를 보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 대신, “북극성을 보며 지치지 않는 여행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다”고 고백했다. 여전히 자신이 갈팡질팡하는 활동가라고 말하면서도, 묻지도 않았는데 야무진 꿈을 말한다.

“스무 살 어느 날 두려움으로 문을 열었을 때, 환대해줬던 그 선배들처럼 다른 이들을 따뜻하게 맞아주는 사람, 함께 가는 이들에게 기쁨이 되는 사람, 무엇보다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저 사람이 거기에 있으니, 나도 가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20대 어느 날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떨리지 않는 나침반은 더이상 나침반이 아니야.” 이전의 삶과 새로운 선택, 그리고 미래의 시간 사이에서, 인권활동가로서 맞닥뜨리는 모든 것이 아직은 두렵다고 말하는 강은주 활동가에게 그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 두려움이 북극성과 같이 길을 인도해 줄 것이라고.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정현진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