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칼럼 - 정현진]

얼마 전 법륜 스님이 즉문즉설에서 내놓은 답변을 듣고 잠시 뜨악했던 적이 있다. “남편이 자꾸 가족들에게 험한 말과 욕설을 한다”는 고민을 듣고, 법륜 스님이 한 말은 이렇다. “남편보다 당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 남편의 말이 더 이상 폭력이 될 수 없으려면, 당신이 그 말을 폭력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도록 마음을 바꿔야 한다”는 요지였다.

그 말을 듣고, 친구와 이야기를 나눴다. “네 마음에 모든 것이 달려있다는 그 말은 너무 위험하다. 그렇다면 세상의 옳지 않은 것에 대해 마음만 다스리면 되는 것이냐”는 내 말에 대한 친구의 이야기는 이렇다.

“그 사람이 남편의 처벌을 원했거나, 이혼하고 싶다는 의사가 있었다면, 스님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같이 살고자 했으니 그런 고민을 털어놨을 테지. 그러려면 문제를 인식한 아내의 변화가 남편도 역시 변하게 할 것이라는 근본 원리를 말한 거라고 생각해. 네가 지금 그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서 그런 거야.”

듣고 보니, 어렵지만 맞는 이야기였다. 문제를 인식한 사람이 먼저 변하는 것. 그리고 “네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가 아니라서 틀렸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는 말에 오래 생각이 머물렀다. 내가 생각하는 답변은 무엇이었나. 남편에 대한 응분의 복수? 정신적 치료? 뭐가 됐든, 나는 질문했던 여성이 뭔가 남편에게 분풀이를 할 수 있는 방법, 처벌의 노하우가 전수되는 ‘쉬운 방법’을 바랐던 것 같다.

분풀이는 동력이 될 수 없다

여기저기 세태에 대한 관전평이 넘쳐난다. 방송과 신문은 물론 SNS를 통해 4대강 문제부터 국정원 사건, 쌍차와 강정 해군기지까지 굵직한 정치, 경제적 스캔들에 대한 비판과 평가의 향연이 이어진다.

필자 역시 그 대열에 참여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극심한 허무감과 피로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비판과 비난, 또 그 비판에 대한 비판이 홍수처럼 넘쳐나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결국 우리 스스로를 피해자의 자리에 앉혀놓고 분노하며 분풀이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세상이 왜 내 뜻대로 되지 않는가”라며 분풀이에 젖어있는 동안 우리는 무언가 중요한 동력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불의에 대한 판단과 처벌이 필요하지만,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그 다음에 이어질 우리의 삶이다. 국정원 사건이 해결되면, 쌍차 문제가 해결되면, 그 다음에 우리는 어디로 눈을 돌릴 것인가. 여전히 존재할 부정과 부패에 대항해 싸워야겠지만, 지난하게 이어질 그 싸움의 동력을 어디서 얻을 것인가.

개인의 삶, 이 사회의 미래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패한 권력자를 가진 것보다 더 큰 비극이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전평은 넘쳐나지만, 정작 내 삶에 대한 이야기, 내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의 이야기가 없다는 것은 그래서 위험하고 지친다.

ⓒ한상봉 기자

불의를 목격한 모든 이의 성찰로부터

분노와 비난의 에너지는 밖을 향한다. “이 모든 것이 너 때문이다”라는 책임전가, “우리는 너희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고 있어. 우리는 너희와는 다르다”는 우월감의 표현이다. 자기 자리에 꼿꼿하게 서서 타인을 심판하거나 회개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그래서 힘이 없다. 심판과 단죄만으로는 세상을 바꾸지 못하고, 회개와 성찰의 대상은 나로부터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의한 사건의 당사자는 물론, 함께 겪고, 목격한 모든 이가 함께 성찰해야 세상의 변화는 가능하다.

잘못된 권력의 폐해를 보면서, 단지 피해자일 것만 같은 나조차도 일상에서 어떤 식으로든 권력을 함부로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경계해야 한다. 최근 벌어졌던 갑을 관계의 논란에서 권력의 관계가 얼마나 일상적이고 미세하게 우리 삶을 파고드는지 목격하지 않았던가. 권력이 나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문제가 되는 순간, 해결법은 사라진다.

“이미 몰락하는 집단과 싸우고 싶지 않아요. 우리의 대안을 만드는 것이 훨씬 중요하니까요.”

어느 모임 자리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한 신학자가 이렇게 말했다. 동감이다. 우리는 이미 침몰하고 있는 권력자들에게 왜 제대로 하지 못하느냐며 분노하고, 의지도 의사도 없는 그들에게 우리를 책임지라고 닦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성범죄자에게 피해자의 삶을 망쳐놨으니 책임지라고 하는, 해묵은 드라마의 대사처럼.

그러나 가해자의 처벌로 피해자의 삶이 예전과 같아질 수 없다. 처벌은 처벌이고 삶의 회복은, 잔인한 말이지만 온전히 피해자의 몫이다. 우리가 꿈꾸는 공정한 정치, 정의로운 사회구조를 만드는 당사자는 그들이 아닌 우리다. 우리 일상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안해야 한다.

처벌과 배제가 아니라 공동선을 지향하는 구체적인 삶, 공동체가 함께할 대안을 마련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 중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길에 비로소 포용도, 비판도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다. 몰락하는 이들과 함께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불의한 권력에 비춰진 내 욕망부터 들여다 볼 일이다.


정현진
(레지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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