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희망버스에서 이어진 황인화 씨와 카오리 씨의 인연

▲ 철탑농성 295일차 밤의 모습 ⓒ장영식

▲ 울산 철탑농성 마지막 밤을 지새우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동지들과 함께 시간은 운명의 296일차를 맞고 있다. ⓒ장영식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두 명이 송전철탑에 올라 불법파견 반대투쟁 296일 만인 8월 8일, 농성을 해제하고 땅으로 내려왔다. 나는 농성 해제를 선언한 전날 오후부터 농성 현장에 달려가 밤을 지새웠다. 현장에는 10여 명의 동지들이 함께 밤을 새며 숱한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그 난장에 나도 함께하는 동안에 시간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때 어느 노동자 한 분이 스마트폰으로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우리말과 일본어를 섞어가며 통화하는 모습이 재밌었다. 나는 그의 모습을 사진기에 담았다. 스마트폰 안의 여성은 수줍은 듯 밝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카오리 씨라고 했다. 통화를 하던 남성은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였다. 통화를 하는 그의 손목과 목 부분에는 짙은 화상 자욱이 남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황인화 씨, 현대자동차 비정규직지회 대의원이었다.

2010년 11월 20일 오후 4시 30분경, 울산 현대차 공장 정문 앞에서 개최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는 민주노총 영남권 결의대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황인화 씨는 이 대회 중에 회사의 비정규직 노동자 탄압에 항거해 자신의 몸에 불을 놓았다. 그는 응급조치 후 119로 이송하는 과정에서도 “투쟁” “노동자는 하나다”를 외쳤다고 한다. 그는 팔과 목 등에 3도 화상을 입었으나 다행히 불길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오랜 투병생활과 몇 번의 수술 끝에 회복되었다. 그러나 팔과 목 등에는 그날의 깊은 상흔이 남아 있었다.

▲ 황인화 씨가 철탑농성 296일차를 맞아 떨리는 마음으로 철탑의 두 동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장영식

▲ 황인화 씨가 스마트폰을 통해 카오리 씨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다. ⓒ장영식

황인화 씨는 2001년 현대자동차 4공장 사내 하청노동자로 입사한 뒤, 2005년에 현대차 비정규직노조에 가입했고, 불법파견 반대투쟁을 이유로 그해 9월에 해고됐다. 그 뒤 50여 일 동안 4공장 식당 앞에서 노숙 농성을 진행한 결과, 3개월 정직으로 징계수위가 감면되어 11월에 현장으로 복귀하면서 비정규직지회 활동에 열성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1년 1월, 김진숙 지도위원이 사측의 대규모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그 후 희망버스 기획단이 결성되고 김진숙 지도위원과 연대하기 위한 희망버스가 전국에서 영도로 집결했다. 일본 나카마유니온에서도 희망비행기로 부산에 도착해 희망버스 참가자들과 합류하였다. 나카마유니온은 일본의 비정규직 상황과 해고노동자들의 법적 투쟁을 지원하는 조합이다. 나카마유니온의 일행 중에는 카오리 씨도 있었다. 그녀는 일본에서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과 정리해고 투쟁, 그리고 황인화 씨의 분신 투쟁을 유튜브로 보고 왔다. 그녀는 한국에 오기 전에 “황인화 씨를 꼭 만나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황인화 씨와 카오리 씨의 첫 만남은 85호 크레인 맞은편의 신도브래뉴 아파트 앞이었다. 이곳에서 진행된 문화제에서 문화공연과 발언 등을 통해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들이 다시 만난 것은 그해 8월에 일본 도쿄에서 열린 젠코대회였다. 젠코대회는 우리의 민중대회나 전국노동자대회와 유사한 대회라고 할 수 있다. 젠코대회를 마치고 오사카의 나카마유니온 사무실을 방문하면서 카오리 씨와 더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 지난 울산 희망버스 때, 울산을 방문했던 나카마유니온 조합원과 함께 연대발언을 하고 있는 카오리 씨 ⓒ장영식

황인화 씨와 카오리 씨가 연인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4차 희망버스 때였다. 그들은 남포동 피프(PIFF) 광장에서 노숙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그 전부터 메일과 카카오톡 등으로 친분을 쌓아왔지만, 피프 광장에서의 시간은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결정적인 시간이 되었다. 카오리 씨가 유튜브를 통해 황인화 씨의 투쟁을 보고, “너무나 놀라웠다. 일본에서는 자신을 희생하면서 투쟁한 사람은 없었다. 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었고, 꼭 만나고 싶었다”라며 적극적 구애(?)를 했다.

사실 황인화 씨는 카오리 씨와 서로 메일을 주고받고 카톡으로도 대화를 나누었지만, 카오리 씨를 만날 수 있는 여력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카오리 씨의 진심을 알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소영 다큐 감독은 두 사람이 아름다운 인연을 이어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였고, 6개월이 지난 후에서야 황인화 씨는 카오리 씨의 진심과 진정성을 느끼면서 마음의 문을 열었고 편하게 만날 수 있었다.

▲ 김진숙 지도위원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 황인화 씨는 이 엽서에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썼다. ⓒ장영식
카오리 씨는 일본의 빠찡꼬 회사에 다녔는데, 어느날 갑자기 점장이 바뀌면서 집단 따돌림을 당했다고 한다. 그녀는 이로 인해 우울증을 앓았으며, 1년간 휴직했다. 그녀는 복직했지만 바로 해고당했다. 카오리 씨는 부당해고에 저항하며 법적 소송을 통해 투쟁 중에 있으며, 지금까지 이 재판은 3년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황인화 씨는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나의 사진전 엽서 중에 김진숙 지도위원이 309일 간의 농성을 해제하고 85호 크레인에 나타낸 모습을 담은 엽서를 이용하여 절절한 사랑의 마음을 담아 카오리 씨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 엽서의 사진작가가 바로 나란 사실을 알고 황인화 씨는 깜짝 놀라며 내 손을 더욱 힘껏 붙잡았으며, 바로 “형님”이라고 불렀다. 철탑 농성 296일차를 맞는 파란 새벽에 그렇게 나와 두 사람의 사랑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알고, 나도 소름이 돋도록 전율하며 놀랐다.

한국과 일본의 두 노동자가 같은 하늘 아래서 벌이고 있는 투쟁의 승리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이 맺어지길 소망한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 철탑에서 296일 동안 투쟁했던 최병승 · 천의봉 동지에 대해 영장 청구가 없을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 철탑의 두 노동자가 땅을 밟기 전, 공식 기자회견이 열렸다. ⓒ장영식

▲ 철탑의 두 노동자가 땅을 밟고, 동지들과 감격의 해후를 하고 있다. ⓒ장영식

장영식 (라파엘로,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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