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Basilica Patriarcale di S. Maria degli Angeli in Porziuncola

1569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한 천사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은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성지이다. 대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기원을 입증하는 가장 중요한 장소들 중의 두 곳을 소중하게 품고 있다: ‘포르치운콜라’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삶에 있어서 심장과 같은 징소이며, ‘통과 경당’은 성인이 죽음을 거쳐 천상 하느님께로 나아간 곳이다.

<포르치운콜라>

포르치운콜라 (Porziuncola)는 15세기에 축성한 성 마리아 대성전 중앙에 있는 작은 성당을 가리킨다. 프란치스코가 도착한 1200년 무렵 이곳에는 승천한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된 허술하고 인적이 드문 작은 성당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성당은 떡갈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체 버려진 상태였다. 프란치스코는 성당의 보수작업을 손수했으며, 이곳을 자신과 동료 수사들의 삶의 본거지로 삼았다.

25살의 프란츠시코는 다미아노 성당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처음 접하고 난 후에 포르치운콜라에서 또 다시 그분 현존을 체험하고 나자 지체하지 않고 그 부르심에 응답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 이후로 근본적인 가난을 살기 위해 세상을 버렸고 예수님의 사도로서의 여정을 시작하였다. 성인은 포르치운콜라에서 첫 형제들을 받아들였고, 1211년에는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글라라 성녀의 착복식과 더불어 글라라 수녀회를 창설하였다.

이곳에서 성인은 초창기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총회를 개최하였고, 포르치운콜라에서 자신의 추종자들을 온 세상 사람들을 위한 평화의 선교사가 되도록 초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모 마리아의 중재로 포르치운콜라에서 프란치스코에게 발현하셨다. 1216년 8월 2일 교황 오노리오 (Onorio) 3세는 성인의 요청으로 이곳 포르치운콜라를 방문하는 모든 신자들에게 ‘아시시의 용서’ 라는 특별한 대사를 주도록 허락하였다.
 

포르치운콜라 성당 내부

 

 

 

 

 

 

 

 

 

 

 

 

 


<통과 경당>

프란치스코 성인은 대성당 제대 후면 안쪽에 위치한 ‘통과 경당’에서 1226년 10월 3일 저녁에 찬미가를 부르며 죽음을 맞이하였다. 대성전 오른쪽에는 유혹에 빠진 성인이 장미 가시 사이로 몸을 숨긴 ‘장미의 정원’과 밤에 잠시 휴식을 취한 ‘장미 경당’이 있다. 영성적, 역사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박물관과 거대한 대성전은 위대한 작품들로 가득 찼다.
 


 


* 추신: '천사들의 성 마리아 대성당' 연재글은 다음 번에도 계속됩니다.

에피소드

우리에게 손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이탈리아 생활을 정리하는 막바지 시기에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짐을 부치려고 여기 저기 수소문한 결과 몇몇 이삿짐 회사와 연결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이탈리아에 갈 때 짐 때문에 어처구니 없이 본래 계약했던 금액보다 800유로를 더 지불했던 경험이 있는 지라 이번에는 그 문제의 싹을 잘라 버리려고 신중을 기했건만 또 다시 비슷한 사건을 겪게 되었습니다.

친구의 추천으로 한국 해외 이삿짐 회사의 협력업체인 이탈리아 이삿짐 회사를 접촉하게 되었습니다. 밀라노에 위치한 이 회사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에게 문의해보니 로마에 지사가 있다고 하면서 견적서를 작성할 담당 직원을 보내겠다고 했습니다.

약속한 당일, 그 직원이 오기로 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감감 무소식이라 본사에 전화를 해보니 직원이 도착하지 않았을리가 없다면 의아해하는 목소리였습니다. 거의 2시간이 지나서야 그 직원이 도착했더군요. 화가 난 저는 로마 지사에 전화를 걸어 신용을 담보하는 회사가 늦게 도착하면 양해 전화를 해야하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 늦게 도착하여 미안한 표정을 감추치 못한 직원은 견적서를 내일 메일로 보내겠다며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3일이 지나도 견적서 메일이 안 오길 래 문의 메일과 수차례 본사로 전화했더니 처음에는 사장이 해외출장 중이라, 나중에는 내 메일에서 수신을 거부하기 때문에 견적서를 보낼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 차례 실강이 끝에 받은 메일에는 세부내역은 없고 달랑 2,900유로라는 금액만을 적혀있었습니다. 견적을 내려고 왔던 그 직원은 우리짐을 대강 훌터보고는 기본 금액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2,900 유로 라는 엄청난 금액을 책정한 것입니다. 우리의 출국할 날자가 촉박하다고 여겨서인지 견적서 금액을 부풀려 보냈다는 생각 밖에는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터무니 없는 금액 때문에 밀라노 회사는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출국 날자로부터 이제 3주일 밖에 남지 않았는데 하며 걱정하고 있는데 살레시오 대학의 한 동창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이삿짐을 운반하는 회사의 명함을 받아와서는 저에게 주었습니다. 즉시 'Universal Traslochi' 회사로 전화를 하니 당일 오후에 견적서를 내러 오겠다고 했습니다. 약속한 시간보다 1시간 가량 늦게 회사 사장과 여비서가 우리집에 도착했습니다. 사장은 일사천리로 계약서를 작성하고 나서는 선금으로 총 금액의 반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약간의 의구심은 들었지만 설마하며 계약서에 최종 서명하기 전에 '이 회사가 믿을 만한 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는 가? 그러니 신분증을 제시해달라' 고 청하자 얼굴색이 변하는 사장이 하는 말, 이 계통의 사업을 시작한 지 9년이나 되었지만 한 번도 자기를 의심한 사람이 없었는데 하며 화를 벌꺽 내고는 자신의 신분증을 여비서에게 전달하자 그녀가 신분증 내용을 계약서에 적어 넣었습니다. 계약서를 작성하는 동안 내내 사장은 별종이라는 듯 우리 부부를 쳐다보았습니다. 계약서의 내용을 물론 그 사장과 여비서가 한 모든 말이 거짓이며 사기임을 한국에 와서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도 베드로와 저는 그 사장과 여비서의 행동이 과장되어 있고 신분증 제시에 기분이 상한 그들의 표정의 이면에 있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의심했기 때문에 이탈리아를 떠나기 전에 친한 이탈리아 친구, 페네시아를 비상시 우리 부부의 법정 대리인으로서 모든 상황에 개입할 수 있는 준비를 해두었습니다.

한국에 도착해서 페네시아와 여러 번 메일을 주고 받은 결과, 그 회사 사장과 여비서가 우리 부부에게 처음부터 사기를 치려고 작정한 것임을 차츰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짐을 11월 11일에 집 안까지 배달하겠다고 한 말도 거짓이었고, 이것을 무마하기 위해 계속해서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고 페네시아가 메일로 우리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나는 우리 짐이 11월 29일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아직까지 유효한 로마행 비행기를 타고 그곳에 가서 그 사람들과 끝까지 법정투쟁까지 불사하겠다고 말하자 남편 베드로는 페네시아가 알아서 잘 조처를 취할 테니까 저보고 진정하라고 말렸습니다.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정직을 가장하며 남을, 더군다나 어려운 이들을 등쳐먹는 사람들이 지구 곳곳에 깔려 있음을 체험하게 되어 참 슬펐습니다. 아직도 우리 짐은 이탈리아에 지체되어 있지만, 다행히도 한 친구의 개입으로 다른 회사를 통해 조만간 우리 손에 들어올 것이라고 희망합니다. 또한 우리 부부는 이 불행한 사건을 통해 외국인 형제자매들의 한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어렵고 낮설은 가를 액면 그대로 체험하였습니다. 우리는 이 체험이 비극이 아니라 희극으로 끝나도록 바라며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 닿는 대로 도와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상처 받은 저희 마음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생각으로 쏠리는 것을 보면 모든 죄인들을 위해 '아시시의 용서' 라는 은총을 주님께 청한 프란치스코 성인의 그 넓은 관용을 몸소 실천하기에는 너무도 평범하고 작은 것 같습니다.

/최금자 글;김용길 사진 200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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